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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민음사 [2000년]

by 길철현 2016. 12. 1.

단정함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민음사

 

나희덕의 시를 읽고 나서 일단 느끼게 되는 것은 그녀의 시가 읽기 쉽다는 점이다(황현산은 나희덕의 시는 늘 착하고 얌전하며, 게다가 읽기 쉽다(p115)’라고 말하고 있다). 시란 비유와 압축을 그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시는 이 수사의 문제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 현 실태라고 했을 때, 나희덕의 시는 그러니까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라고 보여지기도 한다. 산문적인, 혹은 단정한 문장은, 독자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반면에 시적인 긴장감을 주지 못하고 밋밋하게 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인데, 그녀의 경우는 이러한 일상 어법을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에도 시적인 견고함을 유지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좀 더 덧붙여 설명하자면 예이츠의 시 아담의 저주에 나오는 시행, ‘한 행을 쓰는 데 몇 시간이 걸릴 수도 있으나/ 그게 한 순간의 생각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그 행을 잣고 풀고 한 것이 헛수고라는 구절을 나희덕의 시는 잘 예시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말이 그녀의 시가 한결 같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나희덕 시의 이러한 특성은 첫 번째 시집 [뿌리에게]에서부터 계속적으로 이어져 온 것으로, 아마도 그것은 그녀의 기질상의 특질, 섣부른 말이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전통주의자적인 측면 때문이 아닌가 한다(이 글을 쓰는 이 시점에 와서야 떠오른 것이지만 그녀의 시는 김종길의 시와 많이 닮아있다. 좀 더 덧붙여 말하자면 그녀는 선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고, 모성애나 자기 희생 등의 덕목을 놓치는 적이 없다). 그러나 첫 시집에서 덜 익은 주장처럼 울려나오던,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도덕 교과서 같던 면들은(첫 시집을 읽고 난 느낌은 과도한 해석적 진술이 어떤 곳에서는 억지 춘향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늘을 찧으며같은 시에서 마늘을 찧는 행위를 탄압과 비교하고 있는데, 마늘을 찧는 행위 자체가 우리가 마늘을 양념으로 쓰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행위라고 볼 때, 마늘을 찧는 것과 탄압과의 유추는 적절하다고 보기 힘든 구석이 있다), 두 번째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이번 세 번째 시집을 거치면서 많이 누그러지고 난숙해졌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그녀의 기질상의 특질을 두고 그녀의 시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시가 굳건한 토대(이것이 전통이든 보수이든 혹은 다른 그 무엇이든)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로운 상상이나 실험성을 그녀의 시에서 찾기는 힘들 것이라는 점이다. 이 시집의 표제시에서도 그런 점은 두드러진다.

 

<상략>

 

어느 겨울 아침

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

새 한 마리

 

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덮어 주었다

 

숲길에서 죽은 새를 보고 나뭇잎으로 덮어주는 행위는 전적으로 문명화된 행위이다. 교육을 제대로 받은 자의 행위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행동에서 야만은 숨을 죽이고, 그 때 우리 상상력과 행동의 자유는 잘리우고 만다. 사회 속에서의 우리는 자유로울 수가 없지만, 글에서조차 우리의 자유로움이 속박당하고 말 때 우리는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긴 하지만 나희덕의 시를 이런 측면에서만 보는 것은 편향된 시각이리라. 시인의 시에 대한 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떤 항아리는 그녀의 시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건 금이 간 항아리면서

금이 갔다고 말할 수 없는 항아리

 

손가락으로 퉁겨 보면

그런 대로 맑은 소리를 내고

물을 담아 보아도 괜찮다

 

그런데 간장을 담으면 어디선가 샌다

간장만 통과시키는 막이라도 있는 것일까

 

너무나 짜서 맑아진,

너무 오래 달여서 서늘해진,

고통의 즙액만을 알아차리는

그의 감식안

 

무엇이든 담을 수 있지만

간장만은 담을 수 없는,

뜨거운 간장을 들이붓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고 말 운명의,

 

시라는 항아리

 

이 항아리는 무엇이든 담을 수가 있지만, 간장은, 즉 고통의 즙액은 담을 수가 없다. 시인이 꼭 담고 싶은 것이 고통인지 아닌지는 잘라 말할 수 없겠지만, 어쨌거나 고통만은 담을 수가 없다(인간은 담을 수 없는 것을 자꾸만 담고 싶어지기 마련이 아닐까?). 시인이 자서에서 고통을 발음하는 것조차 소란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것이 안으로 안으로 타올라 한 줌의 재로 남겨지는 순간을 기다려 시를 쓰고는 했다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인의 시가 지향하는 바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으리라.

나희덕의 시는 그냥 단정해 보이지만 사실 그 밑바탕에는 삶의 고통을 견디어 나가겠다는 굳건함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단정함은 쉽사리 흐트러 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시인의 이러한 특질은 시적인 자유마저 허용하지 않는 구석이 있어 보인다.

Nature always begins by resisting the artist, but he who really takes it seriously does not allow that resistance to put him off his stride; on the contrary, it is that much more of a stimulus to fight for victory, and at bottom nature and a true artist agree. Nature certainly is "intangible," yet one must seize her, and with a strong hand. And then after one has struggled and wrestled with nature, sometimes she becomes a little more docile and yielding.

--The Complete Letters of Vincent van Gogh vol I, p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