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시 및 감상

박기영*장정일. 성*아침, 청하, 1985 [2000년]

by 길철현 2016. 12. 1.

*아침, 박기영*장정일 시집, 청하, 1985



장정일은 현재 소설가로 더욱 잘 알려져 있고, 거기다 그가 쓴 작품 중의 하나가 외설성으로 인해 그가 실형을 선고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세인의 주목이 되었지만, 장정일은 시인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그의 첫 시집은, 그의 시 스승인 박기영과 같이 낸 이 작품집이다.

일단 이 첫시집을 읽고 난 인상을(몇 편을 제외한 이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는 다음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에 재수록 되었으며, 이 시집을 읽고 나는 다음과 같이 썼었다. 장정일의 시적 전통은 어디에 있는가? 전통의 거부라면 그 전통의 대표는?(*이 말은 전통의 거부가 그의 시적인 방법론이라면 그는 그러한 방법론을 누구에게서 이어받고 있는가?) 이상, 그 다음 조향, 다시 황지우 대략 이 정도의 시인들을 나는 같은 맥락에서 보려 하거니와, 장정일은 더욱 대담하고 공격적이다. 물러서질 않는다. 절제할 필요도 없이 그대로 사실들을 까발린다.) 시적 방법론적인 측면과 주제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볼 때, 예전에는 그가 시를 써내는 방식이 일반적인 압축?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까발리는 식이라는 점에 관심이 갔었는데, 이번에는 그가 서 있는 위치,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 혹은 저임금 노동자로서의 그의 위치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강정 간다>, <석유를 사러>, <화물>, <샴푸의 요정> 등의 시에 이러한 측면이 잘 나타나 있다). 이번에 이 시집을 읽으면서 장정일의 이러한 토대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갖지 못할 경우, 그의 시를 올바르게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게 되었다.

장정일의 시는 <샴푸의 요정>처럼 쉽고 재미있으며, 그러면서도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것들이 많다.

 

사내는 추리극장이 싫다. 국내 소식이

싫고 운동 경기가 싫고 문제의 외화가

싫다. 안 본다. 그리고 방송출연하는

많은 다른 여인들이 역겹다. 나는 그녀만을 본다.

여덟시 반의 그녀를 기다린다. 보시겠읍니까

광고하지요. 보시겠읍니까

 

텔레비전 광고에 등장하는 연예인을 짝사랑하는 화자를 통해, 광고가 보여주는 세계와 실상과의 차이를 극대화시켜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상품 사회의 허구, 모든 사람이 다같이 풍요롭게 쓸 수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것은 소비를 충동질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허구는 <강정 간다>라는 시에는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강정 간다>라는 시에 대해서는 시집 해설에서 이하석이 자세히 분석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인용해 보기로 하겠다.

 

강정은 대구 서편, 낙동강가의 유원지로 서민들의 휴식처이다. 대구 사람들은 주말이면 강정으로 가서 깊은 물에 돌팔매를 하고’ ‘그곳 모래치마에 누워하루를 즐기고 온다. 말하자면 강정은 대구 시민들의 닫힌 삻을 열어주는 자연 공간이다. ‘의 이웃 사람들도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이면 총총히 강정으로 떠나간다. 그것은 울적한 직할시 변두리와 숨막힌 스레이트 지붕 아래 찌그러진 생활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이다. 이 시에 나오는 역시 강정에 놀러가자는 어머니의 권유를 받는다. 그래서 형과 어머니 등 세 식구는 제각기 생각으로 김밥의 속을 싸들고 강정으로 간다. 그러나 대개의 유원지행이 그렇듯 갈 때의 행복에 비해 정작 강정에 가보니 그저 그럴 뿐이다. 기껏 고산족이 태양에게 경배를 바치듯 강둔덕따라 늘어선 미류나무 높은 까치집이나 쳐다보며 하품하듯경탄하는 정도의 자연의식을 갖는 것이 고작이다. ‘울적한 직할시 변두리와 숨막힌 스레이트 지붕 아래 찌그러진 생활에서의 도피는 결국 별 수 없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사람들은 그런 곳에 우리가 찾는 희망의 새사랑이 있다고 은근히 믿지만, 결코 그런 것 없다. 다만 짜증난 모습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와 주름진 바짓단에 묻은 모래 몇 점을 털어놓는, ‘그저 그런 곳에 갔다왔다는 생각뿐이다. 기실 가 강정에 가는 것은 스스로의 의사와는 상광없이 타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남들이 다 가니까우리도 빠질 수 없다는 어머니의 소박한 희망의 제시가 그것을 말해준다. <강정간다>는 결국 장정일의 도피심리가 찌들린 삶에서의 해방에 대한 꿈 때문에 비롯됨을 보여준다. 그 삶은 도시 변두리의 춥고 배고픈 서민들의 삶이다. 매일 희망의 시간을 가슴에 새기어 보지만 전망은 언제나 암담하며, 모든 재화와 안락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을 느낄 뿐이다. 여유없는 삶, 겨울에 쌀을 한 봉지 사느냐, 석유를 좀 사느냐하는 비참한 선택 앞에서 망설이는, 최소한의 쌀과 석유를 같이 살 수 없는 아슬아슬한 삶(<석유를 사러>)이다.

 

시집 중반 이후에 실린 시들은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반면 첫 몇 편은 읽기가 쉽지 않다. 첫 시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을 살펴보자. 다시 읽어 본 느낌은 그다지 막히지는 않는데, 4연과 5연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낮잠 자버린 사람들은 부르주아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렇다기보다는 피곤함으로 인해 지나치게 자버린 사람들로 보고, 그리고 시편은 성경의 시편이라고 한다면(이 부분은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 다음 5연은 그 구절의 패러디라고 할 수 있으리라(이 구절은 Boney M의 노래 ‘Rivers of Babylon’의 가사에도 삽입된 것인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ah we wept when we remembered Zion). 바빌론이 환락의 도시이지만 유태인들에게는 유배의 지역이고, 시온이 예루살렘에 있는 산이름자, 유태인들에게는 고국내지는 고향과 동의어라고 본다면, 이 구절에서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씌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풀어내고 나니까 시는 명료해 진다. 이 시도 삶의 힘겨움에 지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각이 배어있는 작품이다.

다음 시도 분석이 쉽지는 않다. 1연의 화자는 새앙쥐를 잡는 인물이다. 2연에서 세계와 거리가 멀어진 인물이고, ‘갇힌 인물이다. 이 너가 누구인지 애매하다. 너는 왕에게 불경했고, 그때 이미 죽은 그런 인물이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는 있겠다. 나는 쥐를 잡으려 하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그 쥐가 자기를 잡으러 오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다. 너는 실패한 후에 잡혀간 상태이다) 3연에서 보면 나도 잡혀 와 있는 듯이 보인다. 4연의 그는 이미 쥐가 된 인간이고, 나도 죽음 앞에서 용서를 받고는 쥐가 된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혼란스럽고 효과도 의심쩍다. 다만 자꾸 읽은 결과 인간은 현대 사회를 무난하게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사색과 지혜는 잘리워진 채, 쥐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주된 메시지이다.

마구잡이로 거침없이 쏟아내는 장정일의 목소리는 때로 가벼운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의 목소리 속에 든 내용은 현실 사회의 모순, 불평등에 대한 반항이고, 그러한 반항의 다른 형태는 그의 시 <도망>이 보여주는 도피 심리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적 기법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데 이 작업은 다음 시집을 읽으면서 좀 더 공구해보도록 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