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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유하. 무림일기, 중앙일보사, 1989년 [2000년]

by 길철현 2016. 12. 1.

무림일기, 중앙일보사, 89

*키치를 통한 키치 반성

유하의 첫시집의 특징 혹은 핵심은 김현의 비평이 적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명료하다.

 

문화적 형식주의자라면, 복제기술이 낳은 거칠고 소비성 강한 예술들을 반드시 성찰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지만, 그런 현실주의자는 그리 많지 않다. 유하는 그 많지 않은 현실주의자에 속한다. 그는 그가 소비하는 것들의 문화적 의미를 밝히려고 애를 쓴다. 그가 즐겨 소비하는 것은 만화(-영화), 프로레슬링, 무협소설(/), 초능력자에 대한 이야기, 영화, 삼류 포르노 영화(/소설) 등이며, 다시 말해 예술비평에서 키치(Kitsch)적인 것이라는 말로 흔히 통용되는 범주의 것들이며, 그것들을 소비하는 자신의 문화적 의미를 반성하는 것이 그의 시가 연 새 지평이다. 그는 키치 중독자이며, 키치 반성자이다. 그 이중의 역할이 그의 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 활력의 이름은 건강함이다. ([무림일기], p143--144)

 

유하의 시를 읽으면서 사실 우리는 진지하게 반성해보아야 할 것을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중 문화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고 있다는 점이다(내가 개인적으로 소비하는 키치 중의 하나는 만화인데 특히 고행석의 [불청객] 시리즈를 즐겨본다. 한 때, 아니 지금도 나는, 고행석의 만화의 특징을 집중적으로 조명해볼까하는 생각을 가끔씩 한다). 우리가 많은 부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통속 문화의 의미를 반성하는 것을 자신의 시의 화두로 삼은 유하는 그러한 의미에서 새롭다. 이런 점에서 먼저 주목할 시들은 그가 한 때 아르바이트로 쓰기도 했다는 무협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우리 사회를 무림으로 비유한 <무림일기> 연작시이다. 무협소설 양식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낯설 수밖에 없는 온갖 무협 용어를 동원(<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무림일기1>의 예로 살펴보자면, ‘차도살인지계, 천상옥음, 칠골지체, 금나수법, 노화순청, 공수무극파천장, 비무 등)하여 우리의 과거사와 당대의 현실을 풍자하고 있는 이 시들은 그 착상의 특이함과, 뛰어난 필력 등으로 우리 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밖에 인기만화영화, 프로레슬링, 영화 등의 키치 문화 소비에서 느낀 것들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들 시에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키치 문화의 중독자이면서, 그 문화의 이면에 놓인 것들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시인의 모습인 것이다(<파리애마--영화사회학>과 같은 시는 얼마나 적나라한 반성이고 비판인가!). 또 김현도 지적하고 있지만 그의 말장난(punning)은 가히 수준급으로, 말을 잘 주므르고 있다는 걸 누구나 느낄 수 있다(예를 들자면 박통시절, 박통터지게 인기있었던,’ --<프로레슬링은 쑈다>에서의 그 무릎을 치게하는 말장난).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유하의 첫시집은 너무 재미와 놀이쪽에 치우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떨칠 수가 없다. 1부에 실린 몇몇 시들, <살아가기>, <코코코>, <오공 시대> 등은 생각의 깊이를 가늠해보게 한다.

 

 

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무림일기1

 

경천동지할 무공으로 중원을 휩쓸고 우뚝 무림왕국을 세웠던

무림패왕 천마대제 만박이 주지육림에 빠져 온갖 영화를 누리다

무림의 안위를 위해 창설했던 정보기관 동창서열 제이위

낙성천마 금규에게 불의의 일장을 맞고 척살되자

무림계는 난세천하를 휘어잡으려는 군웅들이 어지러이 할거하기 시작했다

차도살인지계를 누구보다도 잘 이용했던 천마대제 만박

천상옥음 냉약봉, 중원제일미 녹부용이 그의 진기를 분산시킨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수하친병의 벽력장에 철골지체 천마대제가 어이없이 살상당한 건

곁에 있는 사람도 자객으로 변한다, 삼라만상을 경계하라는

무림계의 생리를 너무도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었다

천마대제가 죽자 무림존폐의 위기를 느낀 동창서열 제오위 광두일귀 동문혹은

낙성천마를 기습, 금나수법으로 제압한 뒤 고수들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무력18년 겨울, 고금성 주위엔 무림의 앞날을 걱정하는

천수신마, 건곤일검, 남해일노등 내공이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른

초고수들이 암암리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벽안의 무사들에게 빌린 천마벽력탄과 육혈포를 가지고

동창서열 제삼위 무적금괴 승룡을 제압 중원을 평정하기에 이르렀다

서역의 천마벽력탄 앞에서 무적금괴의 철풍장 정도는 조족지혈이었다

무력 19년 초봄, 칠청단이란 자객의 무리들이 난데없이 출몰해

무고한 백성들을 자객훈련 시킨다며 백골계곡에 잡아가둔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소림삼십육방 통과보다 더 악명 높다는 지옥십관 훈련

그러나 대부분 지옥일관도 통과하지 못하고 독가시 채찍에 맞아 원혼이 되었다

그무렵 하남 땅에선 민초들의 항쟁이 있었다

, 이름하여 하남의 대혈겁

광두일귀는 공수무극파천장을 퍼부어 무림잡배의 폭동을

무사히 제압했다고 공표 무림의 안녕을 거듭 확인했다

그날은 꽃잎도 혈편으로 흐드러졌고 봄비도 피비린내의 살점으로 튀었다

이 엄청난 혈채를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가

무력 19년 가을, 광두일귀는 숭산의 영웅대회에서 잔혼귀존 폭풍마독등과

형식적인 비무를 거친 뒤 무림맹주의 권좌에 등극하였다

그날 무협신문들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표하며

혈의방 무사들이 통천가공할 무공을 익히며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는 이때

강력한 무공의 소유자가 중원을 다스려야 한다고

수심에 가득찬 기사를 썼지만 대부분 인면수심들이었다

천마대제는 비명에 갔지만 강자존 약자멸!

이 무림의 대원칙이 깨질 것을 우려한 광두일귀 및 일부 뜻있는 고수들은

武歷은 무력으로밖에 지킬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 앞에 숙연해 하며

한층 겸허하게 무공연마에 정진할 것을 다짐했다

 

*차도살인지계:남의 칼로 적을 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