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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유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지, 1995년 [2000년]

by 길철현 2016. 12. 1.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지, 95

<세상의 모든 아침은 이미 사라졌노라고>

 

그리고 많은 날들이 흘러갔다

시간이라는 인부의 힘에 의해, 풍금은

그것을 추억하는 이들의 가슴으로 옮겨져갔다

난 담담하게 말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이미 사라졌노라고,

--<풍금이 있던 자리>

 

시간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만 달려가는데, 난 자꾸 멈칫멈칫 뒤돌아본다. 몸과 마음은 생의 난바다 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떠밀려가고, 내가 걸어온 길의 형체는 점점 희미해져간다. 그 지워져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 영원히 내 삶의 처음들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 그 되돌아갈 수 없음의 절망이, 나를 추억케 한다. 지워진 길들은 추억의 육체를 빌려 자신의 존재를 복원한다. 추억만이, 유일하게 되돌아감을 허용한다. 추억 속에는 아직 굳은살이 박히지 않은 설레임들과 첫 햇살의 환희 같은 것들이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마음의 손을 뻗어 그것들을 완강하게 붙잡음으로써, 잠시 생의 난바다로 떠밀려 가는 속도를 늦춘다. 하여, 그 늦춰진 속도만큼 내가 머물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넓이는 확장된다. 말하자면 추억한다는 것은, 더없이 사라질 이 순간의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일이다. 난 확장된 이 순간의 넓이 속에서, 살아 있음의 현재를 더 오래 음미한다.

 

유하의 이 시집을 읽어나가는 동안에(역시 시간에 쫓겨서 느긋한 마음으로 읽어내지는 못했지만) 여러 생각들이 물밀져 왔다. 왜 유하는 5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 시집을 마지막으로 새로 시집을 내지 않았는가? 그것이 그의 시의 동반자였던 진이정의 죽음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가? 자서에 나오는 수남형은 진이정의 본명인가? 등등의 의문과,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저주이지만 동시에 프로이트적으로 말하자면 원래 무기물인 모든 생명체는 그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고자하는 본능과(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죽음의 상태로 회귀하고자 하는 본능(이것은 일반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조만간에 실현이 되고마는 것이다) 사이에 위태롭게 서있다는 생각. 그리고 인간이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세계로부터 소외되고 말았다는 생각. 무슨 말인가 하면 언어가 아니라면 우리는 상황을 온몸으로, 일치된 상태에서 체험을 하지만, 언어를 갖게 됨으로써 우리는 상황을 객관화하고, 거리를 두면서, 즉 분리된 상태에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상황과 우리, 즉 타자(대상)와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 ‘소외가 발생한다. 시인은 이 건널 수 없는 간극을 메꾸려고 부단히 도로를 기울이는 자이다(이 이야기는 박이문이 <시적 언어>[시의 이해, 민음사]라는 글에서 한 이야기이지만)라는 생각. 또 인간은 두 번의 탄생을 하는데 첫 번째는 육체적인 탄생이고, 두 번째는 정신적인 탄생이다. 유아는 세상과 자기가 분리되어 있다고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언어를 습득하고 자라는 과정에서 자기와 세상은 분리된 것이며, 자기가 하나의 동떨어진 개체라는 걸 인지하게 된다. 분리와 개체화는 필연적인 과정이지만,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는 일체감을 영구적으로 갈망하게 된다(이것은 그러니까 [유아의 정신적인 탄생]이라는 책에서 읽은 것이다)라는 생각. 그리고 나서 돌아오는 생각은 내가 읽은 것은 과연 유하였을까? 아니면 내 생각의 투사를 읽은 것일까? 아마도 둘 다 이겠지.

유하의 이 네 번째 시집을 나는 정과리의 평론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정과리는 유하의 시를 아주 미세하게, 그러면서 동시에 확대해 보여주면서, ‘유하 시의 심원을 어떤 대상에 두지 않고 부재 혹은 침묵의 형태 자체로 파악하고 있다(그럴 경우 내가 위에서 생각한 것들과 유하 시는 어느 정도 공통 분모를 갖는가?) 실제로 이 시집은 두 번째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세상의 모든 아침]이 교묘하게 뒤섞인 듯한 느낌을 주는데(좀 더 성숙된 모습으로),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시들이 과거를 제재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물론 <재즈> 연작편은 제외해야겠지만). 이번 시집의 시들은 많은 부분이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은 여인에서 출발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를 좀 더 실질적으로 압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진이정의 죽음으로 비춰진다. 현실은 버팅기기가 너무 힘든 상황이라 회고조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나 혼자 남았다

그리도 투명했던 사람은 가고

 

나 혼자 남았다

이승의 길이 아니기에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몸 있는 자, 추억만 붙잡으리라

 

끝내 몸을 사랑한 자,

남아있는 악보를 넘기며

저 혼자 악기를 두드리리라

--<재즈 10> 전문

 

나는 유하가 이 시집에서 보여준 세계에 취해(아니면 내가 보고자 했던 세계들에 취해) 그의 시를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읽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그렇다. 술이 깨고 나면 술취한 행동이 부끄럽지만, 술이 얼큰 취했을 때는 세계가 내 안에서 화해하지 않는가!)

 

유하의 이번 시집은 그의 시적 성숙의 한 정점에 놓여져 있지 않나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가 시인이란 사회로부터 영원히 추방된 자라는 명제를 몸소 보여주고(<달의 몰락>), 그러한 삶을, 즉 자신의 쓸모 없음을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혹은 견디어 갈 것을 언명한 시집이다(그렇다면 왜 그 이후로 그는 시를 쓰지 않는 것일까?). 정과리의 말을 빌자면 욕망의 이름으로 그를 찍어내어 가짜 환희와 가짜 유혹의 진창 속에서 허우적 거리게 하는 그 삶을 그는 택했다. 언어의 차원에서 그것은 그가 침묵을 선택하지 않고 가장 시끄러운 수다를 선택했다는 것과 동의어이다(p150)’가 될 것이다.

 

*좀 더 사실적인 차원에서 이 시집을 정리해보자면 이 시집은 그 동안 그가 추구해온 시적 작업이 한 매듭을 묶는 듯한 그런 느낌을 주는 것으로서, 그의 시적 대상들인, 하나대, 사랑했던 사람, 도시 문명의 허구적 욕망 등이 한데 묶여 있다. 그런데, 그의 어조가 회고조이고, 많은 시가 추억에서 제재를 따온 것은 그의 시우 진이정의 죽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 않은가 한다.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것들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내가 파악한 바는 이 글의 모두에서 밝인 그런 이유이고, 정과리의 말을 빌자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살아 있음이여,

난 끝내 절망하지 않겠다

다만 절망을 연주해갈 뿐,

감각의 파티가 끝날 때까지

내 안의 모든 세포들이 세션맨처럼 분주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