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블루스], 창작과 비평사, 96
<외로운 마약, 외로운 섹스>
신현림의 첫시집과 이 두 번째 시집을 비교해볼 때 우선 눈에 두드러지는 차이는 언어의 사용면이다. 이것은 비슷한 제목의 두 시, <외로움의 마약, 외로움의 섹스>([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외로운 마약, 외로운 섹스>([세기말 블루스])를 놓고 볼 때 확연히 드러난다.
외로움의 마약, 외로움의 섹스
<외로움의 폭력>을 시인 쵯승자는 읊었다
녹슨 외로움의 총구를 당차게 쏘아보는
시인의 젖은 눈을 떠올리며 외로움,
그 어질어질한 분화구를 너는 나와 함께 배회하겠니?
외로움에 우리는 하얀 수의처럼 흐느꼈다
언제나 외로움을 마약처럼 갈아마시면
마음 하나가 거대한 섹스가 되었다
외로움의 섹스가마니
정든 마음에 네 마음 비벼도 너는 괴로와
외로움을 요양소로 생각하기로 했다
시시종종 불가사의한 동굴
슬픔이 우글우글한 동굴 하느님의 고민 많은 동굴
하얀 병원인 여기에 칩거할 수 없다면
이게 없다면 너나 나나 살맛이 안날 거야
싸늘한 열기에 중독되는 건 불행이 아니야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그리움과 슬픔에
익숙하기 위해서야 곡예사처럼 능숙능란해지는 것
슬픔을 공처럼 다루며 살 만하다고 속삭이는 거야
외로운 마약, 외로운 섹스
주차장 앞에서 한 사내가 지워지고 있소
우리는 아마 죽을 때까지 인생을 모를 거요
나날은 빌린 모자처럼 헐렁거려 쉽게 날아가오
나는 고독과 그리움만 느끼며 헤매왔고
시를 쓰며 외로움을 잊는다는 희망이
외로움을 견디게 하오
종횡무진 하던 언어는 좀 숨을 죽였고, 무시무시한 비유도 좀 목소리를 가라앉았다(참신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나날은 빌린 모자처럼 헐렁거려 쉽게 날아’간다는 표현은 이 시에서 그럭저럭 잘 녹아들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전체적으로 어조가 차분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좀 더 읽기 쉽게 되었고, 어지러운 언어의 몸놀림에 더 이상 현기증을 느낄 필요는 없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시는 더욱 산문적이 되고, 더욱 직설적이 된 것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현림의 시에는 첫시집과 둘째 시집 공히, 관념적인 어휘가 많이 등장한다. 위의 두 시에도, ‘외로움, 불행, 그리움, 슬픔, 고독, 희망’ 등을 찾아볼 수 있다. 관념어는 시인과 독자와의 거리를 멀게 벌여놓기가 쉽고, 잘못 쓸 경우에는 시를 공허하게 한다. 신현림의 시에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나름대로 ‘시인의 눈이 좀 더 섬세하지 못하여, 여성인 그녀와 남성인 나와의 차이를 좁힐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데 실패’했다고 보고 있다. 나는 이러한 시의 대표적인 예로 <나의 싸움>을 생각했다.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중략)
다만 그녀의 시가 갖는 매력은 그것은 이문재의 말대로 수동적인 ‘정직함’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까발리는 ‘솔직함’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녀는 우리의 현실, 특히 환경 문제, 여성 문제, 가난, 소외 등의 문제를 인정사정 없이 까발린다. 자기 자신조차도 까발림을 피하지 못한다(그러고 보니 이러한 솔직함의 힘, 혹은 온몸으로 밀어붙일 때 나오는 힘을 예전에 윤정모의 [고삐]를 읽을 때도 느꼈다). 그러나 예술은 언제나 예술이다. 삶을 떠난 예술을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은 분명 맞는 말이지만, 삶 자체가 예술일 수는 없는 것이다(이 점에서 엘리엇이 한 말, ‘어떤 작품이 훌륭한 작품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문학의 잣대만으로 잴 수 없겠지만, 어떤 작품이 문학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분명 문학의 잣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예술은 삶을 모방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고, 삶의 이상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예술은 또한 예술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신현림의 시에서 그런 문학적인 향기가 좀 더 진하게 느껴지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램이다. 이번 시집에서 그래도 <유배된 시인>, <너를 위해 죽어도 좋아>, <자화상> 등을 만난 것은 그래도 큰 기쁨이었다.
자화상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한국시 및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 [2000년] (0) | 2016.12.01 |
---|---|
정한모, 김재홍 편저, 한국대표시 평설, 문학세계사, 2000년 8월 15일 (0) | 2016.12.01 |
신현림.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세계사, 1994 [2000년] (0) | 2016.12.01 |
유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지, 1995년 [2000년] (0) | 2016.12.01 |
유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문지, 1991년 [2000년] (0) | 2016.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