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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이상국.우리는 읍으로 간다, 창비, 92년 (2000년 8월 21일)

by 길철현 2016. 12. 1.

우리는 읍으로 간다, 창비, 92(2000821)


<읍에서 부르면 우리는 간다>

우리 나라의 현대사를 잠시 돌이켜볼 때, 질곡의 역사였음에는 분명하지만,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로 넘어오면서, 우리 나라의 경제적인 발달과 더불어 대다수가 물질적인 혜택을 입은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인구의 도시 집중으로 농촌의 경제가 피폐화되고 고령화되고 있는 점도 사실인데, 농촌의 현실에 대해 그다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입장은 아니다.

여기서는 우리의 농촌 현실을 다루고 있는 이상국의 시가 가진 의미를 생각해 보려 한다. 이 시집에는 시인의 고향인 강선리 사람들이 다수 등장한다. 시인의 부모와 형, 봉희네, 우물집 아저씨, 방아다리 이장의 딸, 대밭집 홍강이, 복골 사람들 등, 시인이 접하는 인물 군상들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는데, 한결같이 피폐해진 농촌의 환경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다. 첫 시를 살펴보자.

 

나무들의 피는 푸르다

그래서 밤나무 겨우살이는 푸르게 살쪄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싸움이 그러하듯

겨울 강선리에서는

밤나무 겨우살이들이

늙은 밤나무 몸뚱이에 이빨을 박아놓고

겨울을 나고 있다.

--<겨울 강선리에서> 전문

 

이 시의 겨우살이를 착취자, ‘늙은 밤나무피착취자로 본다면, ‘늙은 밤나무는 현재의 체재 아래에서 착취를 당하고 있는 농사꾼들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그러한 해석의 타당성은 3행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싸움이 그러하다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시가 그다지 절실함을 가지고 다가 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농촌의 현실에 대한 나의 무지와, ‘겨우살이라는 어휘가 주는 생소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신경림의 <겨울밤>은 좀 더 적실하게 와닿는데, 그것은 그의 시가 제시하는 상황들이 좀 더 구체적이고, 그리하여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택의 <섬진강> 시편들도 호소력이 짙다.)

이상국의 농촌 시편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가 제시하고 있는 농촌의 현실이 너무나도 피폐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어떤 방향성의 전환을 느끼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그리고 너무 적나라한 사실적 제시는 문학적 감동을 주지 못하기가 쉽다. 그래서 오히려 농촌 살이의 힘겨움과 간난스러움을 겨울 배추에 빗댄 <싸움> 같은 시가 던져주는 바는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배추를 밭에 세워놓은 채 겨울을 나고 있었는데

얼음 버적버적 어는 밤으로 그것들은

언 발등에 오줌을 싸대며 야단이었다

<중략>

 

삽날로 밑둥을 지르고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그들은 힘없이 넘어갔다

버티고 버티다가 속에 아무것도 든 게 없는 것들이

겹겹이 누더기를 두르고 용을 쓰다가

그렇게 쓰러졌다

 

이상국의 시는 농촌의 현실뿐만 아니라, 전방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에서 오는 분단 현실의 문제, 또 박노해의 구속이나, 임수경의 방북 등, 사회적인 이슈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설악산을 소재로 한 5부에 실린 시들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이상국은 신경림과 김용택으로 대표되는 농촌 시인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영이 그의 모습에서 소를 떠올린다고 썼던 것처럼, 그의 시에는 소처럼 뼈빠지게 노동을 하고도 아무런 보답도 못 받고 오히려 자신의 살까지 내주는 희생을 겪어야 하는 농민들의 울분과 억울함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그의 그러한 목소리에 동감은 하면서도 절실함은 느낄 수 없는 것이, 스스로를 <변두리 도시민>으로 규정하고 있는 나와 그와의 차이이자, 또 그의 시가 갖는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읍으로 간다

 

우리는 읍으로 간다

한때는 슬픈 식민지 백성으로

또는 인공의 인민이 되어서,

자유당 공화당 지나 세상이 자꾸 바뀌어도

읍에서 부르면 우리는 간다

 

할아버지 지게 지고 부역 가던 길

볏가마 실려나가고

아이들 공장으로 떠나던 그 길

머나먼 유엔 사무총장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반나절이면

혁명과 쿠데타에도 도장 찍어주고 오던 길로

오라면 우리는 간다

 

읍에서 오라면 우리는 간다

걸핏하면 프래카드 앞세우고 가

그렇게 손 흔들어 주었음에도

세상 뒤숭숭하고

서울이 위험하면

오늘도 우리는 읍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