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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김정란.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지, 89년, [2000년]

by 길철현 2016. 12. 1.

-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지, 89



<약한 너에게 기대어>

김정란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실존 철학에 대한 생각을 두어가지 떠올렸다. 하나는 대학교 때 [현대 철학] 시간에 배운 사르트르 편에서 나를 생각하는 나는 나가 아니다. 그리고 나를 생각하는 나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는데 그것은 무이다라는 부분이고, 또 하나는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에 나오는 부분으로 우리의 일상, 친근하고 당연한 것으로 있던 세계가 갑자기 낯설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실존 철학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이러한 우리 모습에서 삶의 부조리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김정란의 시는 다분히 이러한 철학적인 문제, 그것도 형이상학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부조리한 삶에 집중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시는 읽기가 쉽지 않다. 해설을 쓴 김현은 김정란의 시에 접근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나름대로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김정란의 시를 읽기는 쉽지 않다. 그 어려움은 때로는 그녀의 서구식 어법에서 오기도 하며, 때로는 지나친 생략법(혹은 사투리)에서 오기도 한다. 또는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낯선 서구의 이미지들에서 오기도 한다. 그러나 꼼꼼히 그녀의 시를 읽으면, 그 난해함의 외관 아래 삶에 대한 중요한 지혜가 숨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녀의 시를 즐기는 첫 번째 요체는 그녀의 외관에 속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 .그녀의 시를 계속 읽어나가면, 그 불유쾌함 자체가 시인이 미리 만들어놓은 함정이라는 것을 알게 도니다. 삶이 그러하듯, 시도 불유쾌한 것이다. 아니 차라리 질병학적인 것이다.

 

김정란 시의 이미지는 그녀의 시의 외관처럼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오히려 단순하기까지 하다. 그녀의 시는 꽃-나비/두부-넝마의 대립에 의지하고 있다. 꽃과 나비는 긍정적인 이미지이며, 넝마와 두부는 부정적 이미지이다. (124--5)

 

김정란 시의 이미지에 대한 김현의 지적은 적확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녀의 많은 시들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이 시점에서 나는 다시 앞서 말한 김정란 시의 철학성, 그 형이상학적인 면모를 다시 이야기해 볼까 한다. 그녀의 많은 시에는 이나 존재(때로는 진한 글씨체로 된)’ 등의 언어로, ‘본질혹은 본원을 추구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현재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대부분의 시에서 이 신과 화자의 사이는 메꿔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나를 생각하는 나사이가 메꿔질 수 없는 것과도 흡사하다. 시는 갈 수 없는 신, 혹은 존재, 때로는 너라고 이름 붙여지는 것에 다다르고자 하는 무모한 몸짓이다.

 

나는 말[]이 그 다리라고 생각했어, 정말 열심히, 내 작은 몸뚱이 속을 천길만길 날뛰는 이 예감들을--‘에게 전할 길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어--그리고 정말 에게 가는 길이 진짜로는 大文字에게로 가는 길인 걸 알았으니까--아니면, 오히려 일까.

 

<중략>

 

실상 는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 이 납작한 종이 위에서 만날 수 없는 것이 나의 욕구를 무효화시키지는 않는다. 나는 전화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필자: 싶으니까 위에 방점)

--<TV의 말놀이를 주제로 한 몇 개의 성찰> 부분

 

삶에서 시인은 에게 다다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존재 여부 자체에 의문을 갖기도 한다. 그럼에도 시인은 에게 다다르고자 하는 욕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다. 시인에게 삶은 불유쾌하다. ? 그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러한 모습이기도 하고, 시인의 특수한 생존 양식일 수도 있다. 아니, 신을 추구하는 것이 시인의 삶이라면, 신에게 다다를 수도 없고, 신의 존재 여부 자체도 의심스러운 현실의 삶은 불유쾌할 수밖에 없으리라.

 

등뒤로 음모처럼 삶이 다가왔다, 사뭇,

음험하게. 그는 마치, 내가 저와

마주서지 못하는 것을 잘 안다는 듯이.

나는 알고 있다--그것이 병이다, 정말은

--내 생존 형태에 대하여.

 

빠져나오기, 살지 않으려 들기,

유보되는, 꼭 그만큼의 죽음의 양만큼의

생존. 내 삶에 관하여 등돌리는

꼭 그만큼의 생존의 의미

--<나의 병 * 1--자가 진단, 반성을 위하여> 부분

 

김정란 시의 정체성을 규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누구의 작품에서나 그렇듯이 꼼꼼한 읽기와 사색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떠오르는 강한 인상을 바탕으로, 규명의 단초를 마련하는 작업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다시, 앞의 시 <TV의 말놀이를 주제로 한 몇 개의 성찰>로 돌아가 볼 때, 시인은 에게로 가는 다리, 혹은 대문자인 나에게로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시집에는 를 제목으로 달고 있는 시들이 많이 있고, 이 시편들을 살펴볼 때 그녀의 시가 지향하는 바는 조금 뚜렷해 진다.

 

참조:

8. 김정란, 나의 ()--삶은 각질이다. 따라서 언어도 각질이다.,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지, 70

이 시에서 그대는 시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다른 나의 시들도 똑같은 지는 좀 더 살펴보아야겠지만.

 

정해져 있는 모든 테두리들을 향해

또는 체제라고 불리는 모든 삶의

딱딱한 껍질들을 향해--나의 , 오 빨개벗은 연체동물

나는 의 혓바닥으로 아니라고 말한다.

그대는 꼬물대며 기어간다--비효율적!

어느 천년에......아닌게 아니라 걱정스럽기는 하다.

그 기약 없는 절대성의 존재 놀이......

 

여기서는 시의 필요성과 비효율성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는 정도로 무리 없이 해석할 수 있다. 2연의 달팽이는 존재의 궁극으로 지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라고 볼 수 있으리라. 후반부는 시인을 따라잡기가 힘이 든다. ‘우리는 꼭 한 채의 집만 짓지만, ‘나는 목마름으로 사막을 건너며, ‘텅 빈, 태고의, 무관한 집을 꿈꾼다.’

삶은 각질이다. 따라서 언어도 각질이다.’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는 일상적인 삶이 징그럽고 딱딱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상적 언어도 그러하다는 말이며, 시로서 시인은 그러한 딱딱함을 벗어나려는 턱없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일까?

 

9. 나의 --약한 너에게 기대어, 상동, 78-9

이 시에서 그는 너이고, 그것은 나의 시이다, 나는 이 약한 너에게 기대임으로써 살아나간다. 이 시는 쉽게 공감이 간다.

 

10. 김정란, 나의 --죽음과 더불어 살기,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지, 80

 

그때 천사의 날개로 퍼덕이며 무형의 공간을 헤집으며 날아오르던

너의 힘센, 순결한 움직임을, 그 상향의,

형태 없는, 존재로의 비약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잡히지 않는 유령이여.

 

이 시에서도 너는 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상하게도 자꾸 죽음쪽으로 촉수를 뻗는다. 그 까닭은 시가 잡히지 않는 유령이듯이 죽음도 그러하기 때문이리라. 김정란의 다른 <나의 시> 연작들처럼, 이 시도 <나의 시>와 부제인 죽음이 일체성을 띠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전체를 다시 읽어볼 결론은 너는 일단은 죽음으로 보고, 그 다음 시로 이어진다고 보는 쪽이다.) (다시 한 번 시를 읽어본 결과 일단 이 시에 등장하는 너와 그대라는 대명사는 일차적으로 나의 시를 지칭하고 있다고 봐야할 듯하다.)

3연은 애매하다. 왜 갑자기 순결이 등장하는가?

 

몸을 얻기 위해 내 깜깜한 비천한 창고 속

와글거리는 흐느낌 속을 뒤척이던 아

순결이여, 내가 그대를 향해 일껏

 

퍼줄 수 있는 것이 이 덜덜 떨리는 예감뿐인 것을,

어쩌면 그대 자신 진즉부터 알고 있었던가.

내 가난한 넝마의 혼 안에서 울부짖는 날개,

피투성이로, 피투성이로.

 

어쨌거나 순결몸을 얻기 위해’ ‘뒤척인다. 순결은 몸을 얻지 못한 상태이다. 그것은 죽음을 모르는 그런 상태였단 말인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 아니 그보다는 시로 향하는 몸부림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볼 때 이 부분은 시인이 시를 향해 할 수 있는 것은 보잘 것 없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5연에서 안으로만 날이 서는 이/끔찍한, 가운데에서 시를 죽이고 싶은 마음마저 드는 것이다. 내가 시를 떠날 수 없지만, 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보잘 것 없으므로. 시인이 빠진 불행은 끔찍한 삶에서 시를 벗어날 수 없지만, 시를 향해 할 수 있는 것은 보잘 것 없기 때문? 이 시도 상당히 난해하다. 그렇지만, 나름대로의 이해의 고리는 찾은 셈이다.

 

11. 김정란, 나의 --무한의 받아쓰기, 상동, 82-4

이 시는 일단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거리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2연을 보자.

 

본질에 첨예해지는 덕성 대신에

말씀이여 그대가 얼마나 황당히

내게서 삶의 물량을 앗으셨나이까

 

그리고 시인은 아주 위태롭게, 바늘처럼 뾰족하게매달려 있다. 그런데, 시인은 당신, 즉 말씀을 만났다. 이 당신은 먹물이고, 시인은 영혼의 뾰족한/자질로 당신을 푹푹 찍어쓰리오까라고 묻고 있다.

내 나름대로의 분석으로는 이 시 또한 김정란의 기본적인 태도, 언어와 사물(혹은 존재) 사이의 거리에 대한 절망감을 표출하고 있는 그런 시이다.

 

12. 김정란, 나의 --여기에서, 언제나 여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지, 89

시를 물질의 저 너머 혼까지, 뒤적거려내려는’ ‘턱없는 시도로 보고, ‘그러면서도 여기 이 자리, 한치도 떠날 생각이 없으니까, 얼마나 그것은 감당키 어려울까? 대충 맥을 짚어보자면 이 정도라고 보는데, 그 밖의 부분은 내 이해의 안테나에 잘 걸리지 않는다. 특히 그러니 내가/역사와 탈역사의 꼭 가운데에서/팥죽으로 끓는 연유를 이해하시라라는 부분은 깜깜하다. 김정란의 언어에 대한 기본 접근은 나의 생각과 유사한 부분이 있어서 낯설지는 않지만, 시의 전개 방식은 색다르다.

 

13. 김정란, 나의 --그대에게 가기 위하여, 상동, 36-7

이 시는 3연이 참 아름답다.

 

돌이거나 풀이거나 흔들리는 물바가지이거나 떡갈나무에 매인 노란 리본이거나 한 나의 는 당신을 꿈꿉니다. 당신에게 가는 것이 나의 궁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겨울입니다. 그러나 얼어붙은 겨울의 연못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갇혀져 소외된 힘들이 참을 수 없는 갈증의 힘으로 버석이며 무한의 날개를 단 가슴을 하늘로 쳐올려보내는 것을. 장관이 아닙니까.

 

나의 시는 도상에 있. 하지만 나의 궁극은 당신에게 가는 것이다 당신 혹은 그대에게 갈때까지 나는 헤매인다.

김정란의 이러한 시도가 부재의 신을 갈망하는 몸부림으로 나에게는 보이기도 한다.

 

를 제목으로 한 시편들의 분석을 통해 드러나는 것도 역시 현실적으로 부재한 신을 갈망하는 부질없는 몸짓이 시라는 정도이다. 이 시편들도 썩 잘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군데군데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그나마 시의 난해함을 견디게 하고 있다.

다시 시의 이미지로 돌아가보자. 김현이 지적한 것처럼, 나비와 꽃은 긍정적인 이미지, 즉 가벼움의 이미지이고, 두부와 넝마는 부정적인 이미지, 즉 딱딱함의 이미지라는 것에는 큰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

 

나비를 보았다.

 

깊은 밤, 내 숨소리 허공을 향해 올라갔을 때.

 

우리의 기질이 나비의 날개를 가진다면

 

우리는 다만 있는 일만으로 족하리라. 왜냐하면

버려버릴 것을 모두 가벼운 날개짓으로 벗어버린 뒤에

 

우리는 알몸으로 비로소 남아 있을 수 있으므로

--<나비의 꿈> 부분

 

나는 그들 곁에 있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참을 수 없이

 

이것봐, 두부들아

 

그리고 나는 조심성 없이

아무데나 그들을 푹푹

찔러보았다

--<他人들과의 관계> 부분

 

가벼운 나비는 비상과 초월의 이미지로 다가 온다. 그와 반대로 아무런 핵도 없는 두부는 아무데나 찔리는 그런 것이다.

대충 이 정도로 김정란의 시를 시의 내용과 이미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형식에서의 과감한 시도들이나, 비유보다는 생략에 많이 의존하는 어법, 그리고, 시인이 공부한 외국 문학의 영향인지 자주 등장하는 인칭 대명사, 이 인칭 대명사는 지칭하는 자가 누구인지 불분명해 우리는 한편 한편 시를 읽을 때마다 고심해야 한다. 여기서 김정란 시의 난해함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고 물어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거기에는 해답이 있을 수 없다. 시인이 택한 시적 방법론에 대해서 우리가 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다만 받아들이든지, 내팽개치든지 할 뿐인 것이다. 김현의 도움, 혹은 내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비추어서(나는 그것이 김정란의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시를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어 내었다. 시인의 시인됨은 아무리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아름다운 이미지혹은 무릎을 치는 말을 던지는 것이리라. 그 점에서 김정란은 실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음 시는 전혀 시인을 좇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달려갔다. 어머니, 착한 어머니.

 

길이 우리 앞에 있었다. 시간이 죽은 거리.

우리는 나비처럼 옷을 벗었다. 어두움.

뱀처럼 꿈틀대는 길. 그것은 우리보다 강했다.

 

누가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진실보다 아름다웠다. 진실을 향해 옷을 벗어던진 여자.

진흙이 일어섰다. 안녕.

 

너무 늦었어요. 너무......”

 

그녀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삼켜졌다.

인류의, 타락한 종족의 방황이 을 겨누고 흔들렸다.

도처를 한 표적.

 

--<파비안>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