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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김정란. 매혹, 혹은 겹침, 세계사, 92 (2000년 8월 28일)

by 길철현 2016. 12. 1.

매혹, 혹은 겹침, 세계사, 92 (2000828)

<부재의 습격>

김정란의 시를 읽어내는 일은 역시 힘겨움이다. 지난 주에 읽은 이상국 시의 정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시에서 말하는 것은 한 가지로, 그것을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변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첫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에서 보여주었던 나비, 날개, 가벼움의 이미지는 지속되고 있다.

우선 시인의 시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자.

 

시는 도망친다

쓰여진 시 속에

시는 없다, 그것은

언제나 미래로

던져진다

--<에필로그, 출구, 아니 입구> 부분

 

그녀의 시는 언제나 일상적인 어법으로 볼 때 모순적인 언어 위에 서 있다. ‘시 속에/시는 없다, 이것은 내 안에 갇혀서, 나에 의하여 뒤틀려서, 문득 나에 의하여 낯설어진 나(<받아들이는 어두움>)’라는 표현과 동류이다. 다시 쓰여진 시 속에/시는 없다는 말을 풀어보자. 이 말은 쉽게 생각하자면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도가도(道可道)면 비상도(非常道), 명가명(名可名)이면 비상명(非常名)이라구절과 일맥 상통한다. 시인이 생각하고 있는 본질적인 시는 쓰여질 수가 없으며, 유형의 형태를 띠는 순간 소실 되고 마는 것이라는 정도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인이 이 구절에서 말하는 라는 어휘는 다른 차원으로, ‘쓰여진 시라고 말할 때의 시는 우리가 일상 생각하는 시이고, 시는 없다라고 할 때의 시는 본질적인 어떤 것, 시인이 꿈꾸는 이상 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노자는 진정한 에 이름붙일 수 없음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이라는 어휘를 하나 더 삽입시켰는데, 김정란의 경우에는 쓰여진이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 붙어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김정란은 왜 시는 쓰여질 수 없다고 보는 것일까? 나는 이것에 대한 대답을 박이문의 글에서 찾아 본다.

시는 언어로 시작되고 언어로서 끝난다. 바꿔 말하자면 시도 일종의 언어표현*양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는 근본적으로 역설적인 언어이다. 왜냐하면 시는 다름아니라 궁극적으로 언어를 통해서 언어로부터 해방되려는, 언어를 씀으로써 언어를 쓰지 않는 언어가 되려는 불가능하고 모순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시와 과학], 일조각, 122)

 

김정란의 생각이 박이문의 시적 언어에 대한 해명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지를 속단할 수는 없지만, 시가 언어를 통해서 언어로부터 해방되려는시도라는 점에서는 유사하다고 볼 수있다. 그녀가 첫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에서 책 뒷표지에 <시니피앙의 편을 들며>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 ‘제발, 나의 엉성한 그물, 시니피앙들만을 건져 올릴 뿐인, 배은망덕한 그물이여 도와다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볼 때에도,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거리로 고심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무수한 K. K, 분명히. 제시된 시니피앙들. 그러나 동시에 K가 아닌. K만 아닌.

--<--도피선 긋기> 부분

 

좀 더 쉽게 말해서 말과 말이 지칭하는 대상 사이에는 지울 수 없는, 메울 수 없는 거리가 있다. 나는 이것이 김정란의 시적 태도의 출발점이라고 본다. 이것은 나는 천천히 알아차렸어. 내가 라는 존재놀이에 덤벼들어 한번도, 진작에 있는, 예약된 그 장소를 포획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 흰 여백이 내 글쓰기의 장소라는 것을(<비껴 있음>)’이라는 구절에서도 확일할 수 있다.

황현산은 이 시집의 두 가지 큰 주제를 모욕의 현장이자 그 수납처였던 육체를 지우기,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가기라고 지적하고 있다. 나는 김정란이 계속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가짜의 삶, 가짜의 언어들(<사건 X>)’에 둘러싸인 삶에서의 벗어남, 혹은 그러한 가짜의 삶의 핵심으로 파고들어 뭔가를 발견해내겠다는 결의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짜의 삶과 가짜의 언어들은 일차적으로는 위에서 말한 것으로 풀어볼 수가 있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남자의 말이고 남성 중심의 세계라고 볼 수도 있다.

 

<장미>는 없다, 죽은 지 오래다, 라고 펜을 든 남자들이 말했다.

--<<장미>, 보내지지 않는 늙은 여자> 부분

 

가능하다면, 나는 그대들을 닮고 싶다. 칼과 돈을, 교수대의 밧줄과 교언巧言의 혀를, 힘센 자를 잘도 골라 적절히 허리굽히는 그 비법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여러 개의 얼굴, 또는 두꺼운 피부를. 나는 그대들을 흠모한다. , 나의 주여, 어찌하여 내가 사랑을 주시나이까. 내가 그로 인하여 새카맣게 타나이다, 용서하소서, 내가 이 잔을 들고 쩔쩔매나이다.

--<<있는> > 부분

 

거짓이 거짓을 섬기며 거짓이 거짓을 거느리며

억만 년 왕노릇할 줄 아느냐, 천지조화가

무슨 영구 땡칠이마냥 마냥 좋다좋다

꼬랑지나 흔들며 너희들에게 김밥이나

말아다 바칠 줄 알았더냐

 

삶이 그렇게 너희에겐 아무렇게나

내어돌려도 좋은 깨어진 그릇 같은 것이더냐

--<거짓의 밥, 옛다, 실컷 먹어라> 부분

 

이러한 가짜의 삶과 가짜의 말에 둘러싸인 그녀의 삶을 지속시키게 해 주는 것은 어느 순간 문득 그녀를 찾아오는 부재이다. 이 부재는 시인의 영혼 속으로 쳐들어와/모든 사물들의 뿌리를 뒤흔(<부재의 습격>)’든다.

 

오르페, 그대인가요?

 

이 목소리, 내 귀가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몇 겁 시간들의 커튼을 흔들며, 말들을 넘어서,

말들 밖의 말로 나를 부르는?

 

그러나 당장에 내 영혼 속으로 쳐들어와

모든 사물들의 뿌리를 뒤흔드는?

오 내 삶이 다름으로 겹쳐져요

 

아라베스크 무늬 몇개, 뼈가 비추어보이는

내 지워지는 살 위에 드러나요

--<부재의 습격> 전문

 

오르페를 기다리는 에우리디체의 목소리를 빌어 말하게 하고 있는 3부의 시들은, 기다림이 그냥 기다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영혼 속으로 쳐들어오는 것으로 기술되고 있으며, 날개를 달고 가벼워 지기도 한다. 그래서 육체는 반쯤 없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글을 쓰고 보아도 내가 어느 정도 김정란의 시에 접근하고 있는 지는 모르겠다. 내 나름의 독법으로 있는 힘껏 읽어 나가는 수밖에는. 그녀의 시가 난해하다는 것을 떠나서 성공적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글자의 크기나 행의 배열에 있어서의 자유분방함 등은 그다지 큰 실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읽는 시에서 보는 시로의 전환의 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듯 하기도 하다. 첫시집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시는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상징 체계와 생략법 따위가 없는 곳에서는 비시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몇몇 이미지들은, 첫시집보다는 덜하지만, 살아있다.

 

 

 

 

 

 

 

<참고>

*박이문, 시적 언어

하나의 언어가 외연적 의미로서 쓰일수록 그것은 과학적인 것, 미학적인 것에 가까와지고 그 언어가 내포적인 의미로서 쓰이면 쓰일수록 문학적인 것, 시적인 것에 가까와진다. 어떠한 언어도 실제적으로는 외연적 의미와 내포적 의미를 완전히 분리시켜서 쓰일 순 없지만, 한 언어가 문학적으로 쓰여졌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 언어의 외연적 의미 혹은 내포적 의미가 어떻게 초점적으로 쓰여졌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46). 언어를 떠나서는 엄밀한 뜻에서 의식도 없고 의미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언어는 존재의 거소>라는 하이데거의 말이 이해된다. 언어 이전의 느낌*생각*경험*존재는 그냥 그대로 있지, 인식되지도 않고 의미를 갖지도 않는다. 위와 같은 사태나 사실, 그리고 사물들에 대해서 무엇인가 기술되려면 우선 그러한 것들이 인식되어야 하는데, 인식은 인식하는 주체자인 의식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따라서 주체로서의 의식과 그 객체로서의 대상과의 논리적 거리는 인식이 핵심적 구조임을 나타낸다. 바로 거리가 인식과 따라서 의미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48). 참다운 앎은 내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 때만, 즉 자의식이 섰을 때만 있을 수 있다. 자의식은 한편으로 의식과 그 대상, 또 한편으로는 그 의식 자체에 논리적 거리를 둠으로써만 가능하다. 이 거리는 다름아닌 언어인 것이며, 이 언어를 매개로 해서 주체로서의 인식과 객체로서의 대상이 구별되고, 이런 구별이 이른바 인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49).

인간이 사물의 관계를 고찰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원칙이나 법칙을 찾아내서 보다 더 효율적으로 사물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 사물을 상징화, 즉 의미화함으로써 그것을 공간이나 시간을 초월한 논리의 세계 속에서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언어가 없었더라면 인간은 오직 끊임없는 영원한 현재 속에 잡혀 있어서 과거나 미래라는 개념을 갖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경험의 축적이나 앞날의 계획도 불가능했었음이 분명하다. 그랬더라면 우리는 오늘과 같은 문명이나 자아에 대한 엄청난 힘을 행사하지 못했었을 것임은 물론, 더 나아가서는 동물로서의 인간은 딴 동물이나 자연의 재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미 아득한 옛날에 소멸되었을 것이다(49). 그러나 언어는 인간동물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요, 인간생활에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위대한 도구요 힘이며, 인간동물의 가장 찬란한 승리의 훈장과 같으면서 동시에 바로 이러한 언어는 정반대로 동물로서의 인간의 가장 치명적이며 근본적인 조항이기도 하게 되었다(50). 언어를 창조함으로써 인간이 자연에서 소외된, 즉 자연과 거리를 갖게 되어 구체적 존재인 자연 속에서가 아니라 추상적 세계인 의미의 세계에 살게 된 사실이 인간의 불안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면 인간이 궁극적으로 동경하고 모색하는 열반의 극락세계란 다름아닌 언어로부터의 해방된, 즉 의미의 세계에서 실체의 세계로 귀의한 상태를 의미함에 지나지 않는다(51).

시는 언어로 시작되고 언어로서 끝난다. 바꿔 말하자면 시도 일종의 언어표현*양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는 근본적으로 역설적인 언어이다. 왜냐하면 시는 다름아니라 궁극적으로 언어를 통해서 언어로부터 해방되려는, 언어를 씀으로써 언어를 쓰지 않는 언어가 되려는 불가능하고 모순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적 언어는 비정상적인 <비틀린 언어>로 되게 마련이다(51). 철학적 사고가 가장 추상적 사고인 것에 비해서 시적 경험은 가장 구체적인 사고인 것이다. 따라서 시의 이상은 가능한한 구체적인 상태로 경험의 대상을 표현코자 한다. 그는 될 수만 있다면 언어로서 그 대상을 상징함으로써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구체적인 그냥 그대로 나타내고자 하는 불가능한 꿈을 꾼다. 그는 그 경험의 대상, 또는 경험 자체가 언어이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언어는 반드시 추상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경험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 나타낼 수 없는 운명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언어로부터 해방되어 언어 없이 경험이나 경험의 대상을 표현코자 하는 인간인 것이다(55). 시인의 시도는 다름아니라 하나로서의 모든 존재로부터 소외된 인간이 다시금 그 존재 속에 통합되어 그것과 하나가 되어 조화를 찾고자 하는 인간존재학적인 욕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욕망은 어머니의 품 안에 다시 포근히 안기고 싶은 정신분석학적인 욕망, 혹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버릴 수 없는 깊고 따뜻하면서도 애절한 향수와 비교될 것이다. 바꿔 말해서 시는 추상화 이전의 한 유기체로서의 완전한 존재에 대한 인간 본연의 향수다(56).

똑같은 존재가 (위와 같이) 서로 병립할 수 없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면 그와 같은 인식은 주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시의 존재에 대한 감각은 필연적으로 기벽성, 즉 반보편성이 되게 마련이다. 물론 모든 기벽성이 시의 매력일 순 없다. 한 기벽성이 시적인 것으로 되려면 그것이 새로운 기벽성, 즉 새로운 감각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개별성*특수성이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 어느 정도 처음이긴 하지만 납득이 될 수 있게 하는 요소, 즉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58).

언어를 가지고 언어로부터 해방을 꾀하지 않는 언어 표현이 아닌 언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가장 원시적인 감각을 언어로써 표현코자 하는 내용을 갖지 않은 언어는 그것이 어떤 형식으로 되었건간에 시가 될 수 없다. 거꾸로 말해서 위와 같은 것을 근본적인 목적으로 하는 언어 표현은 그것이 어떤 형식을 갖추건 간에 시적인 언어가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허다한 이른바 시로써 쓰이고 발표된 많은 언어들이 왜 시가 아닌가 확실히 밝혀지게 되며, 어째서 많은 형식상으로는 산문과 똑같은 언어 표현들이 시로서만 독자에게 울려오는가 하는 이유도 알게 된다. 자유시가 보여준 것처럼 시적인 요소는 모든 형식을 벗어나고 초월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시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파괴하고 존재와 일치하려는 언어 표현이기 때문이다(59).

--정현종, 김주연, 유평근 편, [시의 이해], 민음사, 46--59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