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푸른숲, 94년
(중앙일보 독서 감상문 모집에 응모하기 위해서, 나는 시집으로서는 유일하게 올라와 있는 이정하를 선택했다. 그의 시의 수준이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분명 쓸 말을 있을 거라는 기대하에.)
<눈부시지도 눈물겹지도>
이정하의 시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라기보다는, 역시 그의 시가 보여주는 세계는 깊이가 없고 안이하다는 것이 전체적인 나의 감상이다. 왜 그런가 하는 것을 하나하나 짚어 보도록 하자. 책의 앞부분에 실린 그의 글은 흥미롭다.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리하여 그와는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사랑은 가혹한 형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터뜨리는 사람이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랑은 왜 이처럼 현명하지 못한가 모르겠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는 98년에는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이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산문집도 펴냈다.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이정하가 말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첫문장으로 볼 때 그가 말하는 사랑은 사람을 향한 사랑이고, 그것도 이성간의 사랑의 형태로 비춰진다. 그렇다면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은 맺어질 수 없는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리라. 그런데도, 이러한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터뜨리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 때문에 ‘사랑은’ ‘현명하지 못한’것으로 비춰진다.
시인이 시집의 앞에 실은 이 글은 그러나, 사실은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우리는 대략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에 공감을 하나, 좀 더 인식을 철저히 해보고자 할 때는 시인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게 되고 만다. 첫째로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이라는 말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말이 필요하지 않을까? 둘째로 ‘사랑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것’은 너무 엄청난 말이 아닌가? 내가 약간 억지를 부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시집 전체에서 이러한 얄팍하고, 설명적이며, 미성숙한 독자의 취향에 영합하는 걸(물론 미성숙한 독자에게는 이 정도의 시가 적합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글쓰는 사람은 아무래도 독자를 끌어올리려는 시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도처에서 발견하기 때문에, 여기서 딴지를 거는 것이다. 지방 일보이긴 하지만 두 군데의 신문에서 당선된 사람이 시를 이 정도로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리라. 이정하 시인에게 실망하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상황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고 마는 글쓰기 태도 때문이다.
하지만 <별>이라는 첫 시는 나름대로 공감이 간다.
너에게 가지 못하고
나는 서성인다.
내 목소리 닿을 수 없는
먼 곳의 이름이여,
차마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다만 보고 싶었다고만 말하는 그대여,
그대는 정녕 한 발짝도
내게 내려오지 않긴가요
이 시 5-6행은 구문 자체가 의미하는 바와, 시의 흐름의 맥락에서 읽을 때의 의미가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 그것은 6행의 ‘말하는’이라고 쓴 부분 때문인데, 이 부분만을 볼 때는 그대가 ‘차마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다만 보고 싶었다고만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시의 맥락상 그 말을 하는 것은 나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말하는’이 아니라 ‘말해야 하는’이라고 쓰는 것이 맞으리라. 하지만, 이 부분은 의미의 그런 충돌이 묘한 매력을 불러온다. 두 가지 의미를 다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문법의 측면과, 심경의 측면이 충돌뿐만 아니라, 의미의 중첩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시인의 직접적인 의도인지, 아니면, 시적 기술에 꼼꼼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불러 일으킨 것인지, 다른 시편들을 볼 때 후자에 더 가까워 보인다는 점이 아쉽다. 전체적으로 쉽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피시 웃어버릴 수 있는 시편들이 대부분이지만, <새벽 안개> 같은 시는 애매하다.
시에 등장하는 ‘그대’는 분명, 내가 아닌 존재이고, ‘당신’과는 동일한 인물로 비춰진다. 왜 ‘그대’라고 했다가, ‘당신’이라고 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신을 가장 그리워 하는 사람’은 안개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당신을 가장 그리워 하는 사람’은 화자이리라. 그렇다면 화자가 안개가 되어 ‘그대의 창문가에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1연의 시적 정황이다. 그런데, 2연에서는 이것이 정반대로 제시되고 있다. ‘떠나가는 사람’은 당신이고, ‘머리풀고 흐느끼는 내 영혼의 새’는 나인지, 당신인지 애매하기 짝이 없다. 이 시는 나와 당신이 혼돈스럽고, 그 혼돈스러움이 의도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시인의 시적 치밀성의 부족에서 기인한다고 보여진다. 다음 <사랑의 시차>를 보자.
먼 곳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곳은 새벽인데 그곳은 밤이라 합니다.
이렇듯 우리 사랑에는 시차가 있는가 봅니다.
나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지독한 그리움뿐.
나는 새벽인데
그대는 밤이라 합니다.
이 시는 이정하의 시들이 안고 있는 약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새벽과 밤의 시간차를 이용해서 사랑의 거리를 보여주려는 시적 발상은 나름대로 흥미롭다. 그러나, 그 발상을 일일이 다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또 그리움이라는 상투적인 발상을 내세우는 건 무책임한 일 아닐까?
먼 곳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나는 새벽인데
그대는 밤이라 합니다
이 정도만 해도 시에 그래도 여백이 생기고, 상상할 여유가 있게 되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해 이정하의 시는 ‘사랑’이라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을, 거기다 김소월(사실 그의 몇몇 시들은 김소월의 목소리가 느껴진다)의 이별이라는 정한과 결합시켜서, 지금껏 너무나 많이 노래된 것을 별다른 반성없이, 독자의 취향에 영합하여(이것은 상업주의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지만) 얄팍하게 그려내고 있다. 다만 <수평선 지우기> 같은 시는 그나마 시를 향한 몸짓이 살아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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