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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이윤림, 생일, 문학동네, 2000년 <2000년 9월 3일>.

by 길철현 2016. 12. 1.

**이윤림, 생일, 문학동네, 2000<200093>


<부재로 들여다 보는 삶>

(지난 달 천안에 갔을 때, 형엽이 형의 추천이 생각나, 천안에서는 꽤 큰 서점인 양지 서점에서 이 시집을 구입했다.)

이윤림의 시는 일단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으며, 그리고, 거기에 담긴 시인의 시각도 뚜렷하게 캐치해 낼 수 있다. 시인이 명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시인이 죽음을 앞에 두고 쓴 시라는, 유서처럼 쓴 시들이라는 것을 쉽사리 눈치챌 수 있다. 표제시인 <생일>에서부터, 제목과는 반대편에 서있는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맛없는 인생을 차려놓은 식탁에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생일> 전문

 

이 시가 특히 두드러지는 면은 없지만, 아무도 없는 쓸쓸한 생일, 거기서 시인이 돌아감, 즉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의외이고, 그래서 독자에게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런 말을 하게 했을까? 그러나, 사실은, 이 보다 앞에 나오는 <自序>에서 우리는 시인이 중병(어쩌면 불치의 병)을 앓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시를 접하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생일>이 주는 충격은 가벼운 것만은 아니다. 때로 현실의 고달픔*강파름이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되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꿈꾸고, 또 실지로 죽음에 몸을 던지는 사람도 있지만, 죽음이 목전을 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죽음을 보는 시각이 엄청나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 시에서 흙에서 왔으니/흙으로 돌아가리라라는 진술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시인의 의지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병을 앓은 시인이라는 점에서 엄원태도 같이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 되리라.)

우리의 삶이 보트를 타고 대양을 향해하는 불안한 여행이라는 것을 잘 형상화한 시가 <나뭇잎배>이다.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죠, 그게 중요해요

언젠가 당신 발 밑에 등불을 들이대보세요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은 땅이 아니에요

캄캄한 물위를 가득 덮고 있는 나뭇잎들

우리는 거기 실린 한 점 물방울이에요

언젠가는 굴러떨어지겠지요

돌아가겠지요, 바닥 없는 깊은 물 속으로

종종 이마에 미열을 지피는

정체 모를 멀미의 근원을 아시겠어요?

깃발 대신

흔히 눅눅한 빨래가 나부끼는 항해죠

느닷없는 물벼락의 세례도 피할 수 없구요

하지만 바다에 별이 내리듯

반짝이는 소금의 시간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미풍에 실린 햇살의 황금화살이

굳게 여며진 가슴속을 관통하는 순간 같은 거죠

그때, 검은 아가리를 벌린 발 밑의 물이

향기로운 포도주로 화하는

거룩한 변용이 일어나기도 하지요

그게 다예요, 이 항해의 역사에 기록될 건

 

저기, 당신이

저기, 또 저기

떠내려오네요

보트 피플 동포 여러분

모쪼록 즐거운 여행을

--전문

 

시인은 우리의 이 위태로운 항해에 별다른 의미가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미풍에 실린 햇살의 황금화살이/굳게 여며진 가슴속을 관통하는 순간’ ‘물이/향기로운 포도주로 화하는/거룩한 변용이 일어나기도하는 정도라고 본다. 그것은 순간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이므로, 그것이 어쩌면 우리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부재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모든 기획을 불가능하게 하고, 하루하루를 던지면서 살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러나, 그 하루하루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절감하기 때문에 대상은 시인에게 피부에 생생하게 와닿는다.

 

통유리문에는 얇은 레이스 커튼을 쳐

햇빛을 살짝 거르겠다

부시지 않은 빛 가운데서

실내의 모든 윤곽들이 모서리에서 힘을 빼리라

--<실내정경화> 부분

 

위와 같은 시행은 보통의 상상력으로는 캐치해낼 수 없는 그런 표현이다. ‘실내의 모든 윤곽들이 모서리에서 힘을 빼리라라는 표현은, 사실 그 자체로서도 이미지로 충분히 살아나지만, ‘존재의 딱딱한 욕구?를 벗어던지려는 시인의 안간힘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시인은 <슬픈 당나귀>로 이 무거운 삶을 뚜벅뚜벅 걸어가지만, 때로는 사소한 <먼지 요정>이 되어 잡다하고, 가볍게 사방에 부유한다. 당나귀의 스러지지 않는 기억, 먼지 된 자의 무궁무진한 고통이 이 삶을 더욱 힘겹게 하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초월의 꿈을 놓지 않는다

 

인간이 마지막 외나무다리 앞에 섰을 때

빙하 같은 공포 앞에 백약이 무효일 때를 위해

마지막 소원으로 무엇을 남겨둘 것인가

누가 묻는다면 나의 답은 이것--

흐르는 모차르트 위에 눈이 내리기를......

눈밭에 맨발로 서서

<아베 베룸>을 들으면

탄생의 상처가 없는 날개가

잊었던 듯 펼쳐지지지 않을까

덫이었던 몸을 그대로 입은 채

승천할 수 있지 않을까

눈이 오면

하얀 환호처럼 눈이 오면

깃털처럼 가볍고 따뜻하리라

죽음마저도

 

이윤림의 시는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의 상황 앞에서 그 상황과 맞서려는 안간힘을 넘어선 어떤 지점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같다. 그 목소리는 연약하고 가볍고, 한편으로는 차분하다. 자신을 부재로 돌린 시점에서의 사물들은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이 그녀의 시가 우리에게 주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