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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최준.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고려원, 97년 [2000년]

by 길철현 2016. 12. 1.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고려원, 97



 

(들어가기 전에, ‘나 없는 세상에 대한 단상)

전에 준기, 승규와 술을 한 잔 하면서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 세상에서 내가 없어 진다고 해도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겠지만, 좀 더 엄밀히 이야기 하자면 극히 미미미하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내가 사라짐과 동시에 이 세상도 동시에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바꿔 말하자면 내 존재 여부에 따라 이 세상은 나에게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이 말을 다시 생각해보니까, 뒤의 말은 생각을 더 해보아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나의 말은 죽음이 무엇인지 안다는 입장에서 한 말이었는데, 내가 평소에 품어온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본 것이리라, 죽음은 사실은 낯선 것이고 미지의 것이라고 해야 자칫 저지르기 쉬운 오류를 비껴 서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점에서 죽음에 관한 레비나스의 글을 인용해보고자 한다.

 

죽음이 어떠한 현재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은 죽음에 대한 우리의 도피에 기인하거나 용서받을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 대한 건망증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손에 거머쥘 수 없으며(insaisissable) 남성다운 힘과 주체의 영웅주의의 종말을 표시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 79)

 

죽음은 우리가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즉 그에 대해 우리의 권력(pouvoirs)이 충분하지 못한 현실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힘(forces)을 넘어서는 현실들은 이미 빛의 세계 안에서 스스로 나타난다. 죽음의 접근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특정한 순간부터 할 수 있음을 더 이상 할 수 없다(nous ne pouvons plus pouvoir)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서 주체는 주체로서 자신의 지배를 상실한다. (83)

 

레비나스의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밝혀내는 것은 나의 몫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죽음은 단절이고 종말이라는 것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최준으로 돌아와 보자. ‘나 없는 세상에 무얼--자신의 시겠지--던지는 행위는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행동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또 참으로 용감한 행위이기도 하다. 시인이 무엇을 던지는 지는 시를 읽어나가면서 알게 되겠지만, 아이러니컬하고도 용감한 행위라는 이 이중성과 이 시집이 어떤 연관을 맺는지 찬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부재의 어두움, 낯섬>

1부에 실린 시편들을 읽으면서 우선 든 생각은 그의 시들이 부제가 말하고 있듯이 부재 의식, 죽음과 밀착되어 있으며, 그와 동시에 시니컬한 그의 목소리가 다소 가라앉으면서 풍성해진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꼭 시인의 아이의 죽음을 그린 듯한 시로 읽히는 <봄바다>(윤성근은 죽은 아이가 뜻하는 상징이 시인이 들고 다니는 검은 가방에 있던 생명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 시가 그리고 있는 장면이나 묘사의 서정성 때문에 가슴에 와닿는다. 마지막 행 봄바다는 더없이 넓고 따스해!’는 앞의 묘사와 대비해서 너무나 역설적이라 튀는 느낌이 강해서, 오히려 시를 갉아먹은 것 같지만, 그래도 이 시집에 실린 시 중에서는 이 시가 시적으로는 가장 잘 형상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2, 3부로 오면서, 뭔가 하나의 흐름을 보여주지 못하고 끊어지는 느낌을 주는 그런 시들이 많았으며, 거기다 나의 이해가 따라가지 않는 시들도 많이 있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나의 독법을 의심했고, 또 한편으로는 최준의 시를 의심했다.

 

명징하게

앞발 두 개가 접시 밖으로

삐져 나와 있다

 

늦은 아침식탁 위의 적요

 

그 너른 세상 다 놔두고

어머닌 하필 거기서 살다 가셨을까요?

 

늙은 자매가 고집스럽게

게장을 집적거린다

--<게장--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전문

 

이 시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의미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은 3연의 거기서라는 구절이다. 시에서 찾아 볼 때는 식탁, 혹은 부엌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이 시가 갖는 의미는 도저히 좇을 수가 없다. 큰 맥락에서 보자면 이 시 역시도 부재--어머니의 부재--와 연관지을 수 있다. 죽은 게가 담긴 게장을 헤적거리는 늙은 자매. 늙은 자매는 죽은 어머니를 헤적이는 것일까? 이런 류의 시가 2, 3부에는 상당히 많고, 그래서 읽는 사람의 인내를 시험한다.

 

관념론자들이 어서 멸종해 버려야

공룡의 시대가 다시 올텐데

(나는 꿈꾸는 나뭇잎

나무 뒤에 숨어 서서 쥬라기를 기다리는 셋방 아이)

 

배때기가 검은 주전자는

그 콧구멍으로 얼마나 많은 수증기를 뱉어 냈을까

관념으로 퉁퉁 부은 몸

저 몸이 온전히 야위어야

나는 곁눈질로라도 해탈을 힐끔거릴텐데

(관념의 이빨 뽑힌 아가리 속으로

삼켜지는 꿈을 꾸는 나, 幻兒)

 

面前에서 놈이 나를 무안 주다니!

문드러진 발톱으로 제 샅을 벅벅 긁다가

--너도 죽어 봐, 용기 있으면

희번덕거리며 쿨쿨 웃었네

 

철사줄로 가까스로 견디던 척추뼈가

나뭇잎 지듯

무너져 내리는 나날의 저녁

(, 들자 차린 건 없어도

! 하지만 네 몸의 실밥부터 먼저 뽑아 버리렴)

--<공룡과의 대면--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전문

 

최준의 시가 어려워 진 것은 한편으로는 괄호안의 글귀들 때문이기도 한데, 이 부분들은 시의 전체 흐름과 때로는 상당한 비약이 있기 때문에, 종잡을 수가 없다. 이 시는 읽을 때에도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인 듯 하면서도, 시인의 의식을 좇지 못해서, 상당히 애를 먹었는데, 될 수 있는 대로 꼼꼼히 살펴보자.

 

관념론자들이 어서 멸종해 버려야

공룡의 시대가 다시 올텐데

(나는 꿈꾸는 나뭇잎

나무 뒤에 숨어 서서 쥬라기를 기다리는 셋방 아이)

 

공룡의 시대의 도래와 관념론자의 멸종이 어떤 연관 관계가 있기에 시인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공룡은 6억 년이나 그 전쯤에 멸종했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관념이다. 이런 관념이 없다면 공룡의 멸종도 없다는 말인가? 시인의 발언에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바로 뒷행에 나오는 이라는 말과 연관을 지어서 이 부분을 생각해본다면, 공룡은 좀 더 자유로운 상상력이고, 관념론자들은 그러한 상상력(꼭 상상력이라고 못을 박는 것은 어폐가 있지만)을 가로막는 사람들이라고 풀어볼 수는 있으리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많은 것이 가능한 것이 꿈이므로, ‘공룡의 시대가 다시오는 것도, 관념의 반발만 없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리라. 그래서 셋방 아이나는 꿈꾸는 나뭇잎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거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쥬라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배때기가 검은 주전자는

그 콧구멍으로 얼마나 많은 수증기를 뱉어 냈을까

관념으로 퉁퉁 부은 몸

저 몸이 온전히 야위어야

나는 곁눈질로라도 해탈을 힐끔거릴텐데

(관념의 이빨 뽑힌 아가리 속으로

삼켜지는 꿈을 꾸는 나, 幻兒)

 

1연을 위와 같이 해석을 하고 나니까, 2연의 해명이 조금은 수월해진다. 관념론자의 객관적 상관물로 등장한 것이 주전자이다. 그것도 배때기가 검은 주전자이다. ‘콧구멍으로. . .많은 수증기를 뱉어. 이 관념이 온전히 야위어야’, ‘나는. . .해탈을 힐끔거릴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공룡과의 대면>도 가능한 것이 되는 것이다. 괄호 안의 글은 내가 드디어 관념의 힘을 벗어나는 모습을 꿈으로 체험하는 걸 보여준다.

 

面前에서 놈이 나를 무안 주다니!

문드러진 발톱으로 제 샅을 벅벅 긁다가

--너도 죽어 봐, 용기 있으면

희번덕거리며 쿨쿨 웃었네

 

꿈에서 공룡과 대면한 나는 공룡으로부터 죽을 용기가 있느냐는 무안을 당한다.

 

철사줄로 가까스로 견디던 척추뼈가

나뭇잎 지듯

무너져 내리는 나날의 저녁

(, 들자 차린 건 없어도

! 하지만 네 몸의 실밥부터 먼저 뽑아 버리렴)

 

이 마지막 연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 ‘실밥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척추뼈가’ ‘무너져 내리는 나날의 저녁.’ 여기서 괄호 안의 말은 상당한 비약이다. 저녁이라는말에서 저녁 식사를 연상한 것인가? 그렇다면 실밥은? 상처를 꿰맨 자국인데, 실밥을 뽑는 것은 상처가 다 나았다는 말인데, 여기서도 그렇다면 그런 상황일까? 관념이 무너져 내리고, 관념의 흔적인 실밥부터 뽑아, 나는 드디어 공룡의 시대를 살려 내었다?

최준의 이 시집은 첫 시집과 달리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 그리고, 힘겨움 다음에도 좋은 느낌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시가 비약과 단절을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공룡과의 대면>을 분석해본 결과로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시가 무논리적은 아니라는 점이다. 거기다 그의 시가 주는 어두움과 죽음 등 부재의 이미지는 암담하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윤성근의 말을 인용해본다.

 

이 시집의 전체를 일관하여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나 없는> 세상은 존재의 없음이라기보다는 인식할 대상이 없는, 부재의 의식이다. 그럴 때 세상은 무덤이고, 검은 물, 검은 피이고 아예 없으며 있었을 때의 흔적, 박제만이 남아 있음이다. 그래서 최준은 거듭거듭 무덤만이 살았다고 적게 되나 보다.(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