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언희, 트렁크, 세계사, 95
(김언희의 이 시집은 전철을 타고 왔다갔다 하면서, 읽었다)
이승훈은 김언희의 시를 들뢰즈와 가따리가 공저한 [앙티 오이디푸스]에 나오는 ‘욕망하는 기계로서의 인간’이라는 정신분석적 개념으로 분석해내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분석에 동의 가부를 밝히기 전에, 내가 이 시집에서 느꼈던 것을 우선 말해보기로 하자. 어쨌든 김언희의 시가 특이하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시집을 읽어나가면서, 그녀의 시가 갖는 특징을 대충 요약을 해보았는데, 그것은 첫째, 성적인 기발한 상상력이 많이 등장하고, 상처나 죽음 등의 폭력성을 동반한 참혹한 이미지가 주를 이루며, 우리의 일상이 전혀 다르게 재해석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의식은 없지만 돌아가는 기계, 라캉의 용어로는 시니피에를 억압하면서 끊임없이 연결되는 시니피앙들의 운동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런 점에서 <욕망하는 기계>일 것이다.
김언희의 시가 보여주는 것이 그렇다. 그녀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떠도는, 흐르는, 멈추고 다시 흐르는, 집을 찾아 헤매는 욕망이다. 한 마디로 앙티 오이디푸스의 세계이다. (93)
이 시집과 꼭 연관을 짓지 않더라도, 들뢰즈와 가따리의 이야기는 사실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문제인데, 그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는 아무리 무엇인가를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욕망의 노예’라는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욕망의 노예라는 사고를 한다는 자체는 우리가 거기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기는 하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한 생각들은 공부와 천착이 있어야 하겠지만, 프로이트 이론의 기본틀은 ‘우리는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이드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리라. 그걸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다시 시집으로 돌아와 볼 때, 김언희의 시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성적인 기발한 상상력’과 연관이 되겠지만, ‘상스러운 언어의 남발을 통한 충격’이다. (*이 점은 내가 시를 쓸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는 성에 대해서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지로는 성적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상당히 위축되어 있다. 욕설, 비속어, 성과 관련된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그것이 필요하다면, 쓰야 하리라. 그 출발점이 어머니에 대한 시인가?)
첫 시이자 표제시인 <트렁크>는 그것이 제시하는 이미지 때문에라도 우선 꼼꼼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이승훈이 이 시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시인이 직접 선정을 했던 하지 않았던 표제시는 시집을 대표하는 성격이 있는데 왜 이 시를 분석하지 않았을까?)
이 가죽 트렁크
이렇게 질겨빠진, 이렇게 팅팅 불은, 이렇게 무거운
지퍼를 열면
몸뚱어리 전체가 아가리가 되어 벌어지는
수취거부로
반송되어져 온
토막난 추억이 비닐에 싸인 채 쑤셔박혀 있는,이렇게
코를 찌르는,이렇게
엽기적인
이 시의 분석은 시 자체의 어구를 따라가서는 해명에까지 이르지는 못하기 십상이다. 이 시는 그보다 이미지로 뚜렷하게 각인된다. 그 이미지는 ‘물에 빠져 죽은 시체’의 이미지이다. 3연의 ‘지퍼를 열면/몸뚱어리 전체가 아가리가 되어 벌어지는’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그 날 이미지는 가히 충격적이다. 몸뚱어리 전체가 아가리가 되어 벌어지다니. 아가리는 어떤 아가리인가? 욕망의 입구이자 출구로서의 아가리? (갑자기 서정주의 <화사>가 떠오른다. ‘너의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達辯의 혓바닥이/소리잃은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트렁크가 인체로 비유되는 것은, 트렁크가 인간의 속성을 띤다는 성격보다는, 인간이 트렁크의 속성을 띤다는 쪽으로 보게 되는데, 그건 내가 이승훈의 글을 읽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우리 사고는 인간에서 사물로 나아가기 때문이리라. 정말이지, 질겨빠지고, 팅팅 붇고, 무거운 트렁크를 누가 받으려 하겠는가? ‘수취거부로/반송되어져’ 오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 트렁크 안에 들어있는 비닐에 싸인 토막난 추억, 코를 찌르고, 엽기적인 그런 트렁크. (추억이라는 의미도 약간은 담겨 있다.) (이 시는 다시 읽어보니까 무척 흥미롭다. 처음에 그녀의 시를 읽었을 때, 그녀가 전해주는 모든 도발성에도 불구하고, 시속에 별말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 아쉬움이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늙은 창녀의 노래*2>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그 다음 시는 송기원의 [마음 속 붉은 꽃잎]에 나오는 “늙은 창녀의 노래” 부분을 차용한 듯 보이면서도, 실상 시는 송기원의 시가 ‘이상/감상’으로 보이도록 딴판이다. (이 두 시의 비교가 80년대와 90년대의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한 단서가 될 법도 하다.)
열아홉 꿈꾸는 나이로, 보리밭 이랑에 앉아
나물을 캐었어요.
보리밭이나 나물만 어디 푸르렀나요.
가난하지만 때묻지 않은
내 웃음도 푸르게 눈부셨어요.
아직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젖가슴은
이랑, 이랑을 메울 듯이 터지게 부풀었구요
당신처럼 마음이 허해서 떠도는 이를 보면
한잔 술에 스무 해 전 내 열아홉을 담아주고 싶어요.
갈색으로 시들은 웃음 저 너머
차갑게 식어버린 젖가슴 저 깊이
그때의 보리밭 이랑에서, 처음 가슴을 열어
당신처럼 허한 마음을 채우고 싶어요.
--송기원, <한잔 술에> 전문
버리지 말아요 나의
기둥서방 당신
붙잡을 바짓가랭이도 없는 당신
입에서 항문으로
당신의 음경에
꼬치 꿰인 채
뜨거운 전기오븐 속을
빙글빙글빙글
영겁회귀
돌고 돌께요 간도
쓸개도 없이
--<늙은 창녀의 노래*2> 부분
이 시는 이승훈의 말을 빌자면 <욕망의 기계로서의 인간>(사실은 들뢰즈와 가따리의 말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이라는 개념을 적실하게 보여주는 그런 것이다. 꼭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다 해도 이 시에 보이는 욕망의 추구는 부인할 수 없다.
. . . . . .복합 마데카솔, 이 연고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딱
지 위에 덧발라 흉터 없이 상처를 아물게 합니다.
흉터 없이?
아물러 붙지 않는,쩌억
갈라진
恥毛로 뒤덮인 삶
을. . . . . .?
--<마데카솔> 전문
하지만 이 시가 보여주듯이 그 착상이 기발남에도 불구하고, 시가 가벼워지는 경우가 김언희의 시에 있어서 약점이 아닌가 한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말하는 방식의 흥미로움을 넘어서는 뭔가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 그녀의 시를 읽을 때의 아쉬움이었는데, 그러한 아쉬움은 그녀의 시가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쉽게 가시지는 않는다. 두 번째 시집에서 이러한 아쉬움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특히 <방>이라는 시는 진술에 모순이 보이는 듯하다.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방 한 칸 아무도 살아보지 않은 방 한 칸’에 대해서 화자는 너무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언희의 시가 보여주는 기발한 상상력과 이미지는 일단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그 시가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것일 터이다. 그녀의 시가 이승훈의 말처럼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기계와 인간의 동일시, 욕망의 흐름과 차단, 다시 계속되는 흐름을 노래하는 바, 욕망에는 무슨 의미, 말하자면 목표나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성적인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다’라고 한정짓는 경우에도 장력에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의 언어는 살아있어야 하겠지만, 그 살아있는 언어가 아무곳도 지향하는 데가 없다면, 궁극적으로 그걸 보여줄 뿐이라면, 모든 것의 토대는 무너져 내리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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