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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이상국. 집은 아직 따뜻하다, 창비, 98년(2000년 8월 22일)

by 길철현 2016. 12. 1.

- 집은 아직 따뜻하다, 창비, 98(2000822)

 

<강원도의 농촌의...>

이상국의 이 시집에도, 이전 시집 [우리는 읍으로 간다]에 실렸던 시편들과 마찬가지로, 시인의 고향인 농촌의 해체와, 분단 문제, 그리고 설악산과 동해를 소재로 한 시편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소재들이 울분과 분노를 직정적으로 표현해내어 그러한 현실을 엿볼 수는 있게 해주었으나, 시적 감동의 측면에서는 다소 아쉽던 것이, 이번 시집에서는 좀 더 풍성하고 원숙해준 비유와 시어들을 바탕으로 깊이를 더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시편들이 무위자연이나, 윤색된 추억이라는 우리가 쉽사리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를테면, 자식을 위해 고생을 마다않는 아버지 어머니, 따뜻함, 고향의 정취, 소처럼 우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룸으로써 자칫 진부하기 십상일 위험도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나이 잡수신 길들은

아직 장마당에서 만난다

장작을 여 내 고무신을 바꾸고

소를 내다 팔아 며느리를 보던 사람들

난전 차일 아래 약장수가 놀고

장돌뱅이들 이악스럽게 설쳐대도

농사꾼들은 해마다 낫과 쇠스랑을 버리고

감자꽃 같은 아낙들 무릎맞중을 하고

산 너머 집난이 소식 끝에 치마폭에 코를 풀던 곳

때로는 사는 게 팍팍하여

참나무 같은 어깨를 부딪치며

막걸리 사발에 가슴을 데우거나

우전머리에서 송아지 엉덩판 후리치며

공연히 음성 높이던 사람들 다 어디 가고

우리나라 울퉁불퉁한 길들만

장마당에서 겨우 만나고 헤어진다

--<장마당에서> 전문

 

이 시는 이제는 더 이상 보기 힘든 시골장의 정취를 맛깔스럽게 형상화해낸 시이다. 장마당 시골 사람들의 정경이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며 동시에 정감을 자아내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이 시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소설에서 흔히 접한 풍경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이런 점이 이상국의 시가 아쉬운 점이다. (처음에 읽을 때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을 한 가지 덧붙이자면, 첫행의 나이 잡수신 길들울퉁불퉁한 길들은 나이드신 분을 지칭하는 동일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고, 중간에 이야기되는 부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중장년층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집에 실린 많은 시들 특히 2부와 3부에 실린 시들은 지난 시집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시편들로, <국수가 먹소 싶다>, <동명 화암리 박씨집 가을 아침> 등의 시는 옛날을 그리는 시인의 감정이나, 바쁜 시골의 가을 아침의 정경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딸부잣집에 딸이 또 태어나던 날의 상황을 그린 <울음소리> 같은 시는 안일한 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농촌의 해체를 다룬 시편들 중에서 특히 주목이 가는 것은, 지금은 전원 카페로 바뀐 방앗간을 소재로 한 <방앗간카페에 가서>이다.

 

도대체 이 동네로 무엇이 지나갔길래

한때는 벌판 하나를 다 먹어치우고도

성이 안 차 식식거리던 발동기가

침세 대신 커피를 얻어먹고 사는 걸까

--<방앗간카페에 가서> 부분

 

자본의 논리라는 것은 어디에서도 예외를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어서, 농촌 경제의 한 중심이든 방앗간이 지금은 도시민의 휴식처가 되고마는 것이 현실인데, 시인은 그러한 변화를 소리 높여 개탄하기 보다는, 어처구니 없어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경제적 풍요는 공사판에 나가 망치만 들고 어정거려도 일당이 몇만원씩 하는 세상(<상복리 연종회>, 67)’이라는 시인의 말 가운데서도 엿볼 수 있거니와, 그러한 풍요 속에서 상대적으로 빈곤해질 수밖에 없는 농촌에 머물러 농사를 지을 사람은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상국의 이번 시집에서 오히려 주목하고 싶은 것은 농촌의 현실이나, 시인 자신의 주변을 다룬 시편들보다는, 삶을 총체적으로 조명해보고 있는 <낙타를 찾아서><선림원지에 가서> 등의 시이다. 특히 <선림원지에 가서>선림원이라는 이제는 터만 남은 곳을 찾아가는 과정, 또 그곳에서 몸을 누이고 느낀 것들을 차분히 풀어낸 이 시는 세상살이의 힘겨움을 힘써 맞서겠다는 시인의 의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 자연스러운 가운데에도 힘있게 다가온다.

 

이상국의 시는 다른 많은 시인들과는 달리 시골에서 살며,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또 그곳의 모습을 꾸밈없이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는 어렵지 않으며, 그를 통해 우리는 농촌의 모습을--피폐되고 해체된 모습을--듣는다. 그의 말에 우리는 쉽사리 공감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시가 굳건한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유나 시어의 구사도 능숙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시에서 뭔가 본질적인 이야기는 듣지 못한다. (<제초제와 봄> 같은 시에서 돈복이 아버지의 죽음이나, <쇠기러기>에서 집나간 홍종이 처의 이야기가 피상적이라는 것이 그 좋은 예가 될까?) 현상의 이면을 보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