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비, 96년
<눈물은 왜 짠가>
(세 번째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함민복이 앓은, 혹은 지금도 앓고 있을 지도 모르는 우울증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그의 우울증이 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하면서 생긴 일종의 직업병인지 아니면 그의 개인적인 특성에 기인한 것인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첫 시집과 둘째 시집에 실린 시들이 보여주는 자조(차창룡의 말을 빌자면, 113)와 무력감이 그의 우울증이라는 병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사실 둘째 시집에 실린 신랄한 상업 자본주의의 물질 문명의 비판이 나는 그의 개인적인 기질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신랄함이 오히려 그의 시를 메마르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걱정을 알게 모르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함민복 자신이 감각적인 기질의 사람이 아닌데, 감각적인 비판을 일삼으려 하다 보니 무리가 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은연 중에 했던 듯 하다. 이번 시집은 그런 점에서, 모든 시들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첫 시집에서 제시되었든 문제점들(그가 문제의 한 복판에 서지 않고 비켜나 있다거나, 다소 감상적인 태도들--잠이 오고,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데, 이렇게 막 함부로 이야기를 해도 되는 것일까?)을 연시가 보여주는 서정과, 성숙함으로 극복하고 있으며, 또 둘째 시집에서처럼 함민복의 본류라고 생각되지 않는 상업 자본주의의 비판에 지나치게 경사하지 않음으로써 균형을 획득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제 1부, ‘선천성 그리움’에 실린 시들은 뜻밖이면서, 동시에 함민복이 그의 시의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했음을 보여주는 그런 것이다. 물론 이 시편들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첫 시 <선천성 그리움>은 우리가 끝내 하나로 ‘포갤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그리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시의 후반부에서 상승과 하강의 구조로 잘 보여주고 있다. 또 한 편 지극히 아름다운 시는 <눈물은 왜 짠가>인데, 이 시는 시인과 어머니의 그 관계가 첫 시집에서 드러나던 감상성을 어느 정도 극복하면서 지극히 리얼한,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림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밖에 <서울역 그 식당>(‘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이나, <흐린 날의 연서> 등은 읽는 이의 가슴을 싸아하게 하는 그런 연시이다.
3부 ‘거대한 입’에 실린 시들은 두 번째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시들--이를테면 <하늘을 나는 아라비아 숫자>, <자본주의의 주련>, <아남 내셔널 텔레비전>--이 있는데, 새로운 것을 제시하지 못하는 유사한 시적 제스처이므로 우리를 다소 식상하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상식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작가 자신의 생활에서 나온 진솔한 이야기인 <우표>가 오히려 가슴에 와닿는다. 4부에 실린 시 중에서는 <꽃>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 시는 이해가 그렇게 쉬운 시만은 아니다. 우선 두 번째 시집의 첫 번째 부분의 제목이 <꽃의 악>이었던 걸 상기해 볼 때, 악이라는 글자가 빠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문득 함민복은 두 번째 시집에서 세상의 악 앞에서 곧 쓰러지고 말 듯한 그런 위치에 처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번 시집을 통해 그 악을 어떤 식으로든지 넘어섰다는 느낌도.)
이 꽃은 이 시에서는 삶의 은유이다. 그것은 4연의 눈물이 삶의 은유인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경계는 전생과 내생 사이의 현생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의 화자는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에 서있고, 꽃은, 구체적으로 국화꽃은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피어있다. 이 꽃의 의미는 무엇인가? 안과 밖을 분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안과 밖을 연결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말은 현생이 전생과 내생을 분리하는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전생과 내생을 연결하는 다리일 수도 있다는 말이리라. 어쨌거나 이 경계는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 운명에 놓여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꽃이 아름다움이든 아니면 악이 깃든 것이든 결국엔 무너지고 말 그런 것이다. 이 시가 그 이상 무엇을 말해주고 있다고 나로서는 볼 수 없지만, 우리의 삶을 그렇게 성찰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함민복의 이 세 번째 시집에는 그의 너무나도 선한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신랄한 상업 자본주의를 비판한 시들에는 결핍되어 있던--그래서 너무 건조하다고 느껴졌던--그의 서정성이 되살아나서, 아름다운 시들이 꽤 많이 실려있다. (함민복은 장정일 류의 사람이라기 보다는 나희덕 류의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감각적이고, 신랄하고, 발빠른 그런 류가 아니라, 따뜻하고 인내하고 반성하는 사람. <버드나무> 같은 시는 그 해석적인 목소리가 나희덕을 떠올리게 한다. 나희덕의 <뿌리에게>나 <매미> 등의 시와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함민복은 세 권의 시집을 내는 동안에 시적으로 상당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난으로 인한 현실적인 고달픔 때문에, 그가 좀 더 시쓰기에 몰두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의 생활 또한 시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앞으로 그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 자못 궁금한데, 언어와 좀 더 투철하게 싸우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으면 하고 주제넘은 기대도 해본다.
'한국시 및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국. 집은 아직 따뜻하다, 창비, 98년(2000년 8월 22일) (0) | 2016.12.01 |
---|---|
이상국.우리는 읍으로 간다, 창비, 92년 (2000년 8월 21일) (0) | 2016.12.01 |
함민복. 자본주의의 약속, 세계사, 93년, (2000년 8월 17일) (0) | 2016.12.01 |
함민복. 우울氏의 一日, 세계사 (2000년 8월 16일) (0) | 2016.12.01 |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 [2000년] (0) | 2016.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