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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함민복. 자본주의의 약속, 세계사, 93년, (2000년 8월 17일)

by 길철현 2016. 12. 1.

자본주의의 약속, 세계사, 93, (2000817)


<자본주의냐, 삶이냐>

함민복의 두 번째 시집은 첫 번째 시집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각 시집의 첫 번째 시들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두드러진다. <성선설>이 보여주고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태도는 빛이 바래버리고 말았다.

 

가로수가 더이상 전원에 부착된

안전벨트로 보이지 않는 도시

서울의 클리토리스 남산

거대한 주사기처럼 스포이트처럼

발광하며 문명을 주사하는 타워

어둠이 내리면 연꽃처럼 피어나는 광고

여관 개업식 날 만국기를 다는 곳

서서히 사람들을 처형하는 독가스

합법적으로 내뿜으며 질주하는 자동차

현재의 인구와, 작금의 교통사고 현황과,

환경오염도와, 일기예보와, 활자뉴스와......,

순간적 인식과 찰나적 망각을 종용하는

슬픔과 아픔이 숙성될 수 없는

정서의 겉절이 시대

--<백신의 도시, 백신의 서울> 부분

 

어떻게 인위적인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 거대한 공룡과 같은 서울의 모습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는 이 시에서, 시인이 인식하고 있는 서울은 지옥의 다른 모습이며 환경의 오염이 극해 달해 있는 그런 곳이다. ‘이제는 정말 늦은 것이다(고형렬, <서울>, [마당식사가 그립다], 11)’는 고형렬의 시구절이 절로 떠오르게 할 정도이다. 그런데 시인은 왜 제목을 <백신의 도시, 백신의 서울>이라고 했을까? 병을 주지만 약도 준다는 의미인가? ‘순간적 인식과 찰나적 망각을 종요하기 때문인가? 실지로 서울은 시작도 끝도 없는 복마전이라는 걸 누구나 다 느끼고 있다. 그 혼란스러움이, 그리고 그 무지막지한 속도가 비관스럽기만 한 것인가, 돌이킬 수가 없는 것인가 하는 부분에 가서는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가 있다. 어쨌거나 함민복의 경우에 있어서, 서울은 그가 비판하는 자본주의(이 자본주의라는 것에 대해서 시인의 좀 더 깊은 성찰을, 아니면 좀 더 극단적인 제시를 요구하게도 되는데) 물질 문명과 상업 문명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고, 이에 대한 시인들의 비판은 그 이전에도 장정일이나, 유하 등에 의해서 시도된 것이다. (나중에 좀 더 부연하겠지만 이 시집에 실린 함민복의 시는 어찌보면 밋밋한 장정일이라는 생각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이 시집은 12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두 부분의 제목에 이라는 말이 들어간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환치한 꽃의 악부분과, 동제목의 연작시가 많이 실려있는 악의 질서부분. 함민복이 우리의 팔십 년대, 혹은 구십 년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것은 첫 시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자본주의라는 제목이 들어간 시들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날아온 서신이 모두 납부통지서인 것을 두고 이 시대에는 왜 사연은 없고/ 납부통지서만 날아오는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절실한 사연 아닌가라고 말하면서 의사소통의 단절을 반의적으로 극적으로 보여주는 <자본주의 사연>이나, 전화 통화자의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극적 독백(Dramatic Monologue) 기법으로 모든 것이 상표와 기호화 되어서 그 속에서 허우적 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약속>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함민복의 이러한 시도는 장정일이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나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 등을 통해서 보여준 것과 유사하다. 장정일이 좀 더 감각적이고, 또 좀 더 상업적이라면, 함민복의 시편들은 좀 더 편향적이고(계급성도 엿볼 수 있다?) 좀 더 반성적이다(이러한 부분을 좀 더 확실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두 시인에 대한 심도있는 추찰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나의 개인적인 촉각이 지시하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현재 삶을 비판하고 있는 시편들은 다음에 인용하는 구절처럼 통찰을 주기도 하지만, 그냥 재미있게읽고 지나갈 위험도 적지 않다.

 

그렇다 매스컴의 화려한 유혹은 시청자인 나를 티브이 속의 세계로 유혹한다 하여 내가 매스컴 속에 깊이 빨려들어갔을 때 매스컴 속에 깊이 잠식되었음을 깨닫고 바깥으로 나오려고 할 때 매스컴은 나를 가둔 채 OFF할 것이다

--<엑셀런트 시네마 티브이 * 1> 부분

 

악의 질서부분에 실린 시들은 상당히 색다르다. 여기에 실린 시편들 중에 몇몇은 초창기에 쓴 작품들도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런 시들보다 우선 <악의 질서> 연작들을 놓고 볼 때, 여기서 시인은 위악 혹은 뒤집어 보기를 시도하고 있는 듯하다. <푸르른 나무숲은 더러운 산소 똥을 싸고--악의 질서 * 2><태양, 그 제국주의자의 잔인한 빛살--악의 질서 * 3> 등의 제목에서 우리가 당장에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 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여지는 것들이 뒤집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이러한 시도가 왜 어머니에게는 미치지 않았을까?). 생명을 흙의 욕망의 찌꺼기가 모인 필터로 보고, 태양은 생명을 흩뿌려,/ 고통의 빛을 주는 존재로 상정하는 것은 대단히 극단적이고 작위적인 태도이다. 시인의 이러한 시도가 지향하는 바는 어디일까? 그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절망의 힘의 거대함에서 나오는 자신의 무력감을 아이러니컬하게 제시하는 것인가?

함민복의 이 두 번째 시집은 당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우리는 그 비판에서 판을 새로 짜야 한다거나, 이 판을 뒤집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는 없다. 다만 시인이 느끼는 절망감을 어떤 식으로든지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만은 절감한다. 그는 장정일의 시적 기법을 많이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현대 자본주의의 물신성을 아이러니로 비꼬고 있는? 오규원에게서 그 정치성을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 지 미리 상정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의 언어가 좀 더 시적인 풍요로움을 지녔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버릴 수 없다.

 

자본주의의 약속

 

혜화동 대학로로 나와요 장미빛 인생 알아요 왜 학림 다방 쪽 몰라요 그럼 어디 알아요 파랑새 극장 거기 말고 바탕골 소극장 거기는 길바닥에서 기다려야 하니까 들어가서 기다릴 수 있는 곳 아 바로 그 앞 알파포스타 칼라나 그 옆 버드 하우스 몰라 그럼 대체 어딜 아는 거요 거 간판 좀 보고 다니쇼 할 수 없지 그렇다면 오감도 위 옥스포드와 슈만과 클라라 사이 골목에 있는 소금창고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라는 카페 생긴 골목 그러니까 소리창고 쪽으로 샹베르샤유 스카이파크 밑 파리 크라상과 호프 시티 건너편요 또 모른다고 어떻게 다 몰라요 반체제인산가 그럼 지난번 만났던 성대 앞 포토폴리오 어디요 비어 시티 거긴 또 어떻게 알아 좋아요 그럼 비어 시티 OK 비어 시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