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시 및 감상

유하, 천일馬화, 문학과 지성사(2000년) 2001년 1월 29일

by 길철현 2016. 12. 1.

유하, 천일, 문학과 지성사(2000) 2001129


 

---이광호, 말달리자, 말달리자

*이번에는 경마장이다. 무림과 압구정동과 세운상가를 서성거리던 유하의 주인공은 이제 구겨진 마권을 손에 쥐고 경마장을 배회하고 있다. 시인은 그 경마장 연작에 천일라는 제목을 붙여준다. 그런데 왜 경마장인가? 경마장이 무림과 압구정동과 세운상가의 연장선에 있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불길한 욕망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곳들은 한 개인의 사소하고 비루한 욕망이 추억의 빛깔로 물들어 있는 자리이며, 동시에 비판적인 문맥에서의 사회, 문화적 의미를 함유하는 공간이다. 유하를 통해 이 하위적인 문화 공간들은 새로운 시적 대상이 될 수 있었고, 그것에 매혹되면서 동시에 그것을 반성하는 화자는 우리 문학사에서 볼 수 없었던 낯선 서정적 자아의 얼굴을 드러냈다. 경마장 역시 욕망과 추억이, 그리고 매혹과 반성이 뒤섞여 있는 곳이다. (119)

*그런데 다시, 시인은 왜 그 경마장 이야기를 만화의 제목을 빌려, ‘천일라고 했을까? 이 지점에서 경마장은 앞의 장소들과 다른 시적 의미 공간으로 뻗어나간다. 우선, []과 말[]의 운명에 대한 사유가 그 하나이다. 유하의 경마장 연작은 단순히 말[]에 관한 시들이 아니라, []에 관해 말[]하려는 욕구에 관한 시이다. ‘천일라는 제목은 그 두 가지 말의 층위에 대한 시적 성찰을 동반한다. 또 하나는 갬블러의 욕망과 부진마의 운명과 관련된 실존적 상징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의 실현을 위해 생()을 베팅하는 삶,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마주한 삶이라는 실존적 주제에 연결되며, ‘부진마들은 거세되고 무기력한 남성성이라는 상징과 만난다. (120)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연작들에서 볼 수 있는 것 역시 서정적 목소리를 반성적 성찰과 매개시키는 특유의 화법이다. 그 화법 안에는 회한이 묻어 있는 고백과 명상적인 잠언이 교차된다. 이 시에는 <천일> 연작의 말들의 질주와는 반대편에 위치하는 산책과 명상의 시간이 흐른다. 자전거를 타는 자의 아웃사이더의 서정산책가의 몸은 기계적 동력과 속도가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비판의 문맥 위에 서 있다. “은륜의 텅 빈 내부를 흐르는 무한한 곡선의 시간은 종말의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직선적 시간과 대비되며, 이는 탈근대적인 동양적인 사유와 연관된다. 시인은 그 자전거의 시간 안에서 목표와 속도로부터 자유로운 길의 선지자로서의 시인의 이미지를 조명한다. (131)

*유하의 시에는 압축과 혼돈의 코드가 동거한다. 그는 침묵과 수다의 언어를 모두 사용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의 시에서 키치적 상상력이 발동시키는 현란한 말놀이와 삶에 대한 깊은 서정적 침묵을 함께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행복이다. (131-2)

*그의 많은 선배 시인드이 그러했던 것과는 달리 유하는, 풍자에서 해탈로 혹은 치욕으로부터 자기 연민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기 시의 불온성에 새로운 호흡을 부여해왔다. 그는 풍자를 포기하는 것 대신에 풍자와 서정이 함께 갈 수 있는 미학적 모색을 계속했다. 그의 시는 풍자를 통해 죽음의 현실과 산문의 세계에 접근하며, 맑은 서정성을 통해 사랑의 공간으로 귀환한다. 풍자가 현실의 낙후성과 부정성에 대해 비판적 인식의 소산이라면, 서정성은 존재의 자기 모순을 껴안는 사랑의 문법이다. 이런 이유로 그의 풍자는 냉소의 차원이 되지 않는 창조적 파괴에 이르며, 그의 서정은 상투적인 감상성을 비껴가는 역동적인 욕망의 드라마를 품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풍자를 통해 풍자를 바꾸어가고 서정성을 통해 서정성을 지워나가며, 욕망을 통해 욕망을 해방한다. 그래서 유하는 말[]달리고, []달린다. 그것은 이미 변방에 몰린 시를, 변방성의 극점에서, 죽음의 질서를 전복하는 불온한 사랑의 동력으로 만드는 마술이다. (133)

 

*바로 이 전 시집에서 우리를 다소 실망시켰던 유하는 이번 시집을 통해 이전부터 그가 천착해 왔던 작업에 다시 한 번 불을 붙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무림, 압구정동, 세운 상가 등과 같은 계열에 서 있는 경마장 연작시들은, 이광호의 말을 빌자면, 우리 인간의 불온한 욕망들이 활개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사 박물관에 가면 당신은

한때 뚝섬을 주름잡았던 명마의 박제를 만날 수 있다

경주마 이름은 포경선

생전에 그에겐 많은 돈이 걸렸다.

물론 사람들이 원하는 건 바람 같은 질주가 아니었다

그는 시간이라는 조롱 속에 갇혀

끝없이 황금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오직 죽음만이, 이 저주 받은 이야기꾼의 운명을

정지시켜줄 수 있다는 것을,

죽음은 그의 바람대로

그를, 말의 육신을 멈추게 해주었다

이윽고 그의 몸은 방부제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하여 황금 고래에 관한 이야기는

영원히 썩지 않는 박제가 되었다.

 

--<천일--명마 捕鯨船>

 

이 시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이 명마에게 바란 것이 질주가 아니라, ‘시간이라는 조롱 속에 갇혀/끝없이 황금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이광호의 지적을 빌자면, ‘유하의 경마장 연작은 단순히 말[]에 관한 시들이 아니라, []에 관해 말[]하려는 욕구에 관한 시라는 것이 잘 드러난다. 포경선은 저주 받은 이야기꾼의 운명을타고 났으며, 그 운명은 죽음만이’ ‘정지시켜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은 황금 고래에 관한 이야기를 영원히 썩지 않는 박제가 되게끔 했다. 이 시가 시사하는 바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끝없이 달려야 하는 말들의 운명을 통해, ‘영원히 이어져야 하는 이야기의 천형적인 속성을 내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의 제목이 배금택의 만화 제목에서 따온 것이긴 하지만(유하처럼 이런 일을 잘 해 내는 시인이 또 어디에 있을까), ‘천일마화인점이나, 세헤라자드를 대신해서 마헤라자드(<천일--걸리버 여행기>)가 등장하는 것이나 모두 그런 맥락에서 파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마장의 이야기는 정치 현실(<천일--걸리버 여행기>)이나, 세속 도시의 비속함(<천일--프루프록의 연가>)을 풍자하기도 한다(유하가 이 경마장 연작에서, 엘리엇의 시들을 패러디하고 있다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이광호의 지적을 인용해보자. ‘시인은 다시 <천일>의 이야기에 <황무지>를 겹쳐놓는다. <황무지>의 다성성(多聲性)과 이미지와 이미지들을 병치시키는 콜라주의 기법과 언술의 다채로운 속도감들은 <천일> 연작의 열린 장르적 성격과 만난다. 물론 주제 의식의 공유도 있다. <황무지>에서의 정신의 불모성과 무의미한 일상 생활과 성, 재생이 없는 죽음 등의 주제들은 경마장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표현되는 현대적 삶의 황폐함과 만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 경마 연작시의 화자는 끊임없이 부진마, 변마들을, 비난하면서도, 또 끊임없이 그 부진마에 배팅을 해서, 대박을 노리고 있다는 점이다.

 

나를 사랑한 자들은 모두 그랬다. 어디 한 군데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채 표표히 떠나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는 결코 이곳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세속의 온갖 말들의 후미에서 해찰이는 불용 처리 직전의 부진한 말들만을 사랑하는 게 그의 업이기에.

 

--<천일--변마의 독백> 부분

 

이 시를 통해 볼 때 우리는 부진마가 처한 입장과, 현재의 시인들이 처한 입장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불용 처리 직전의 부진마와 문화의 변방으로 몰려가는 시와 시인의 운명, 그가 부진마를 사랑하는 것은 운명 공동체라는 의식에서일까?

경마장 연작은 독특한 소재를 유하 특유의 요설로 시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끌지만 한 편 한 편이 시로서 크게 다가오지는 않는 반면, 서정적인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의 연작들은 우리의 욕망이 가라앉은 산책과 명상의 세계를 아름답게 보여준다.

 

두 개의 은륜이 굴러간다

엔진도 기름도 없이 오직

두 다리의 힘만으로

은륜의 중심은 텅 비어 있다

그 텅 빔이 바퀴살과 페달을 존재하게 하고

비로소 쓸모 있게 한다

텅 빔의 에너지가 자전거를 나아가게 한다

나는 언제나 은륜의 텅 빈 중심을 닮고 싶었다

은빛 바퀴살들이 텅 빈 중심에 모여

자전거를 굴리듯

내 상상력도 그 텅 빈 중심에 바쳐지길

그리하여 세속의 온갖 속도 바깥에서

찬란한 시의 月輪을 굴리기를, 꿈꾸어왔다

놀라워라, 바퀴 안의 가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희망의 페달을 밟게 한다

바퀴의 내부를 이루는 무가

은륜처럼 둥근, 생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구르는 은륜 안의 무로

현현한 하늘이, 거센 바람이 지나간다

대붕의 날개가 놀다 간다

은륜의 비어 있음을, 무를 쓸모 없다 비웃지 마라

그 텅 빈 중심이 매연도 굉음도 쓰레기도 없이

시인의 상상력을 굴린다

비루한 일상을 날아올라 심오한 정신의 숲과 대지를 굴리고

마침내 우주를 굴린다

길이여, 나를 태운 은륜은 게으르되 게으르지 않다

무의 페달을 밟으며

내 영혼은 녹슬 겨를도 없이 自轉하리라

 

--<의 페달을 밟으며--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1>

 

이 시가 현대적 삶의 속도감에 전면적으로 반항하는 명상적이고, 동양적인 사고관을 드러낸 시라는 것은 자명하다. ‘바퀴의 텅 빈 중심은 노자의 사상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 현대 문명이 처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한 방편의 제시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시로서도 아름답다. 묵상과 아포리즘으로 가득찬 이 자전거 연작시들은 별 어려움 없이 우리의 가슴에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