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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유하,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열림원 (2001년 1월 29일)

by 길철현 2016. 12. 1.

유하,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열림원 (2001129)


작년 8월에 나는 유하의 시집 네 권을 읽고, 정리를 했었다. 나는 그 때 유하의 시가 90년대의 한 축을 부여잡고 있으며, 현재의 대중 문화의 속물주의--우리가 흔히 키치라고 부르는--의 쾌락과 반성을 동시에 행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를 9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 내세우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그가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이후로 시집을 내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상은 99년에 이 시집을 내었던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가 한 동안 시를 쓰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부분은 자서에도 나와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가 영화쪽으로 외도를 하고, 또 문우인 진이정의 죽음 등등이 그 배경이리라.

 

한동안 시를 쓰지 못했었다. 3년 시의 아득한 후방을 맴돌았다고나 할까.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시의 초심(初心)을 만났다. 그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처음 서툴게 시작하는 자의 심정을 다시 갖게 된 것이 나는 기쁘다.

 

한 동안 시를 놓았기 때문일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몇몇 아름다운 편들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어색하고 서투르다는 것이 전체적인 인상이다. 이 말은 전에 그의 시들이 보여주었던 시적 성취에서 한 걸음 물러난 느낌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첫 시는 예전에 그가 [세상의 모든 저녁]에서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서정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바람이 분다

땅 위에 선 자들아

오월의 강가에 선

이 저녁의 그리움들아

바람에게 경배하라

장미는 향기를 타고

장미에게로 가고

나무는 씨앗을 타고 나무에게 간다

저 바람 속으로

은빛 실을 풀어놓는 거미들

거미는 그 허공의 비단길을 걸어서

그리운 거미에게로 간다

 

--<바람에게 경배하라> 전문

 

모든 생명체의 원동력으로서의 바람의 이미지를 적절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아름다운 시이다. 하지만, 이 시집에는 이 정도의 성취를 보여주는 시들이 많지 않고, 연시성의 감정이 감상의 테두리 경계에서 머무는 것이 눈에 많이 띈다. 그러나 다음 시도 좋다.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리라

바람도 찾지 못하는 그곳으로

안개비처럼 그대가 오리라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모래알들은 밀알로 변하리라

그러면 그 밀알로, 나 그대를 위해 빵을 구우리

그대 손길 닿는 곳엔

등불처럼 꽃이 피어나고

메마른 날개의 새는 선인장의 푸른 피를 몰고 와

그대 앞에 달콤한 비그늘을 드리우리

가난한 우리는 지평선과 하늘이 한몸이 땅에서

다만 별빛에 배부르리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빗방울처럼 그대가 오리라

그러면 전갈들은 꿀을 모으고

낙타의 등은 풀잎 가득한 언덕이 되고

햇빛 아래 모래알들은 빵으로 부풀고

독수리의 부리는 썩은 고기 대신

꽃가루를 탐하리

가난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이란 오직 이것뿐

어느 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지평선과 하늘이 입맞춤하는 곳에서

나 그대를 맞으리라

 

이 시집의 시들이 다소 맥이 빠지는 것은 그가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세운 상가 키드의 사랑] 등에서 보여준 당대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빠져 있기 때문이리라. (나 역시도 몇 개월 시를 등한시 하여 이 시집을 꼼꼼히 읽지 못한 점 비난 받아 마땅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