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학, 1. 먼지의 집, 문학과 지성사
2.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문학과 지성사
3.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문학 동네
4.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문학과 지성사 (2001년 1월 25일)
밍기적 거리다가 독후감을 제때 쓰지 못하고, 네 권을 다 읽고 난 지금 전체적인 인상만이라도 기록해 두려고 한다. 이윤학 시의 출발이나 비밀은 박형준이 지적한 대로 다음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감자밭머리에 앉아 오래도록 기다렸네
그 아이 보이지 않고,
이십 년 가뭄도 퍼낼 수 없던
보창에 끈 풀린 별 하나가 떨어져
풍금 소리 물소리에 막혔었네
그 아이 돌아오지 않고 기다렸네
개구리 울음 저벅저벅 울고
독새풀 헤치고 가는 초승달을 보았네
그 아이 무덤 위에
억센 조선잔디 보름처럼 입히고 싶었네
그 자리 억새 사이 빛 고운
잔디씨, 누런 봉투 가득 훑어
나만 홀로 학교에 갔었네.
--<잔디씨> 전문, [먼지의 집]
박형준([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발문)이 전해주는, 혹은 이윤학의 산문에 나타난 이 어린 시절에 체험한 죽음은 처절하다. 외롭게 지내던 초등학교 3학년 소년에게 다섯 살바기 여자 아이가 다가온다. 외로운 소년은 이 다섯 살바기 여자 아이에게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113)’ 친하게 지낸다. 그런데, 그 여자 아이가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세상은 가장 소중한 것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앗아가는 가혹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가혹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대상조차도 지켜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인 것이다. 여기에 분노와 죄의식이 겹쳐지고, 그것은 세상에 대해 ‘고통의 신음 소리(100)’를 낳게 한다. 몇 부분 더 인용해 보도록 하자.
아이의 죽음은 소년의 죄의식의 근원이자 기억의 출발점이다. 어느 날 아이는 소년이 놀아주지 않자 혼자 냇가로 갔다. “노을이 붉게 물들인 들판 어디에도 그 아이의 모습은 없었다. 찾을 수 없었다. 이웃집 아저씨가 아이를 들고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 물에 젖은 옷, 그 하얀 얼굴을 보았다.” 그 아이의 마지막 모습을 본 순간을 소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
소년은 자신의 밑바닥에 있는 기억을 온전하게 껴안기 위해, 그리고 그 기억의 바닥에 가 닿기 위해 자신을 폐허와시킨다. 세상은 아픈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그런 존재들에게 소년은 ‘위로’를 보낼 수 없다. 소년은 “그보다 더 아픈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픈 자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위로가 아닐까?” (산문 <정원을 바라 보는 시간>)하고 반문한다.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내가 우선 아파야 하며, 그 역인 내 아픔이 곧 사물의 아픔이라는, 소년의 시작법의 시발점은 이 지점이다. (114)
이윤학은 꽤 다작의 시인이다. 1992년에 첫 시집을 낸 이후로 2000년까지 4권의 시집을 내었다. 그의 시의 출발은 아픔인데, 첫시집에서는 그것이 김주연의 지적처럼 동물 알레고리의 형태를 띄고 있다. 죽어가는 혹은 고통 받는 작은 짐승이나 벌레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고통과 비극을 상기하고, 그 동물들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윤학의 시가 지니는 힘이다. 그의 이러한 시작의 태도는 네 번째 시집까지 지속되고 있다. 쉬운 구문, 평이한 종결부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들이 단조로움이나 평이함으로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까닭은, 그가 던지는 말들이 뼈저린 체험과 오랜 관찰의 끝에서 나오는 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첫사랑> 전문,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하지만, 이제는 뭔가 변모된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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