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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장석남. 젖은 눈(솔, 1998년) (2000년 10월 27일)

by 길철현 2016. 12. 1.

- 젖은 눈(, 1998) (20001027)


<너그러운, 그러나 유약한>

홍정선과 진형준이 말한 대로 장석남의 첫 시집과 둘째 시집이 각각 돌아갈 수 없는 고향으로의 회귀의 꿈이질적인 것을 맺어주는 화합의 정신을 보여주었다고 한다면, 그의 세 번째 시집에서 주조를 이루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전체 시의 큰 바탕이 그가 나서 자란 덕적도와 인근 바다의 달빛과 물빛 등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으며, 그 바탕은 이 시집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곤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첫 두 시집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말로 하자면 그의 시는 상당히 쉬워지고, 언어도 산문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는 그의 시가 갖고 있던 신비감이 많이 사라지고 밋밋해진 느낌이다. (느낌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의 이러한 견해가 정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약간 옆으로 새는 듯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봐온 바에 의하면 대체로 시를 어렵게 쓰던 시인들은 나중에는 쉽게 쓰고, 쉽게 쓰던 시인들은 어려움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시쓰기에도 변증법이 작용하고 있다고나 할까?) 대체로 쉬운 말과 쉬운 구문으로 씌여진 시들이어서라서 숨빠르게 읽은 탓일까? 시집의 전체적인 구도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두 번째 시집에서 주로 노래하던(그 방식은 약간 다르지만), 우리 삶의 덧없음, 아쉬움, 상처 이런 것들을 잔잔한 목소리로 읊어내었다는 것이다. 이번 시집에 실린 많은 시들이 죽음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감꽃이 피었다 지는 사이엔

이 세상에 와서 울음 없이 하루를 다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는 믿을 수가 없다

 

감꽃이 저렇게 무명빛인 것을 보면

지나가는 누구나

울음을 청하여올 것만 같다

 

감꽃이 피었다 지는 사이는 마당에

무명 차양을 늘인 셈이다

햇빛은 문밖에서 끝까지

숨죽이다 갈 뿐이다

 

햇빛이 오고

햇빛이 또 가고

그 오고 가는 여정이

다는 아니어도 감꽃 아래서는

얼핏 보이는 때가 있다

一切가 다 설움을 건너가는

길이다

--<감꽃> 전문

 

감꽃이 피었다 지는 사이를 통해 우리 삶의 애상 같은 것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3연에 햇빛의 이미지가 끼어들므로서 약간 생각을 하게 한다(1연의 진술은 쉽게 우리의 공감을 자아낸다). 희망이나 밝음으로 생각되는 햇살은 무명 차양때문에 마당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문밖에서 끝까지/숨죽이다간다. 이 말은 감꽃이 피었다 지는 사이엔감꽃을 피우는 동인이 되었던 햇빛조차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일까? 그러한 햇빛의 여정이 감꽃 아래에서 얼핏 보이는데, 그것은 왜 설움을 건너가는/일까? 마지막 행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으로 보이고, 나에게는 구체적으로 실감있게 와닿는 것은 없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또 하나는 시어와 시어 사이의 간격이 너무 넓거나, 아니면 일상적이거나 해서 시적인 감동을 받지 못한 시가 많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독자인 내가 시인의 의도를 좇아가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파꽃이 하얗게 핀

여행이다

벌을 치는 사람 산기슭에서

밥을 끓이고

물을 많이 모은

저녁빛을 무겁게 실었다

--이 근처에 古木이 있었는데

--분명 이 근처였는데

조그만 회오리바람이

지푸라기들을 물고 지나가는

파꽃이 하얗게 핀

여행이다

--<파꽃이 하얗게 핀--母子> 전문

 

부제로 붙은 母子와 이 시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파꽃이 하얗게 핀/여행은 무얼 가리키는 것일까? 파꽃이 하얗게 핀 길을 걸어가는 여행이라는 말일까? 산문적 정황은 알 수 있지만, 시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에는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이 시집에서 장석남은 또 시 중간중간에 말을 집어넣고 있는데, 이 말이 시를 어렵게 한다. 이 시에서도 두 말의 화자는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동일 인물의 것일까? 아니면 두 사람의 것일까? 제목에서 모자라고 하고 있으니까, 두 사람의 목소리라고 본다면, 두 사람은 예전에 찾은 적이 있는 어딘가를 다시 찾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리무중이다. 시인의 의도는 단지 모자의 정황의 제시에만 있는 것일까?

전체적으로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그 시선들이 따스하고, 애잔하고, 쓸쓸하다. 그렇기 때문에 힘이 많이 빠진 듯하다. 더불어 첫 두 시집에서 보여주던 시인의 놀라운 상상력, 이질적인 것을 단박에 결합시키는 그 능력을 더 이상 보여주지도 심화시키지도 못하고 있다. 아마도 첫 번째로 실린 <봉숭아를 심고>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조그만 샛강이 하나 흘러왔다고 하면 될까

바람들이 슬하의 식구들을 데리고

내 속눈썹을 스친다고 하면 될까

봉숭아 씨를 얻어다 화분에 묻고

싹이 돋아 문득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 일이여

돋은 떡잎 위에 어른대는

해와 달에도 겸하여

조심히 물을 뿌리는 일이여

 

후일 꽃이 피고 씨를 터뜨릴 때

무릎 펴고 일어나며

一生을 잘 살았다고 하면 되겠나

그 중 몇은 물빛 손톱에게도 건너간

그러한 작고 간절한 一生이 여기 있었다고

있었다고 하면 되겠나

이 애기를 앞에서

 

앞으로 장석남의 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쉽사리 예단할 수는 없겠지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아름다운 시들도 꽤 있지만, 나로서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그가 매너리즘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억측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