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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장석남.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학과지성사, 1995) (2000년 10월 26일)

by 길철현 2016. 12. 1.

-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학과지성사, 1995) (20001026)


<삶의 힘겨움, 비상>

장석남의 두 번째 시집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시집 뒷편에다 심금을 울리는 데가 있기는 한데, 어딘가 허전하다라고 적었다. 내가 이렇게 적은 이유는 그의 시를 충분히 감득할 수 없다는 자조와, 그의 시적인 상상력이 너무 자유분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동시에 들었기 때문이리라. 진형준은 해설에서 장석남 시들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겉보기에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 이질적인 것들을 맺어주는 화합의 정신이다. 장석남의 시적 자아는, 대상들간의 차이, 인식들간의 차이를 지우고, 그 너머에서 혹은 그 깊이에서 그 대립되는 것들을 맺어준다(107)’라고 말하고 있는데, 진형준의 지적은 내가 자유분방한 상상력이라고 본 그의 시의 난해성을 이질적인 것들을 맺어주는 화합의 정신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진형준의 지적에 우리가 공감을 하면서, 장석남의 시를 읽어나간다고 할 때, 그의 해설 첫머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장석남 시를 풀어나가는 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장석남의 시들은 가스통 바슐라르가 시를 읽을 때 그러했듯이, 시를 읽는 이가 가장 순진한 상태에서 그의 시들이 넋에게 건네는 목소리에 무방비로 놓여야 큰 울림을 주는 시들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일상적 혹은 상식적 차원에서는 한데 묶어 생각하기 어려운 이미지들이 그의 시에서는 자유자재로 결합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 이미지들이 한결같이 시인의 마음 혹은 넋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04)

 

진형준은 이 다음에 <송학동 1>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는데, 이 시를 그의 분석과 함께 나의 생각도 정리를 해보도록 하겠다.

 

계단만으로 한동네가 되다니

 

무릎만 남은 삶의

계단 끝마다 베고니아의 붉은 뜰이 위태롭게

뱃고동들을 받아먹고 있다

 

저 아래는 어디일까 뱃고동이 올라오는 그곳은

어느 황혼이 섭정하는 저녁의 나라일까

 

무엇인가 막 쳐들어와서

꽉차서

사는 것이 쓸쓸함의 만조를 이룰 때

무엇인가 빠져나갈 것 많을 듯

가파름만으로도 한생애가 된다는 것에 대해

돌멩이처럼 생각에 잠긴다

 

진형준: 계단 끝, 뱃고동, 만조 등의 이미지로 보아, 산문적으로 푼다면, 시인은 지금 바닷가로 계단이 나 있는 어느 마을 끝에 서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시가 주는 울림을 고스란히 받으려면 우리의 상상 속에서 그런 사실적인 풍경은 곧 지워버리는 것이 유익하다. 베고니아의 붉은 뜰이 뱃고동들을 받아먹는다니, 무슨 풍경을 묘사한 것일까라고 의아해하기보다는, 위태롭게, 쓸쓸함, 가파름 등의 단어가 주는 분위기에 우선적으로 취()해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 나의 삶 역시 그 얼마나 가파른가, 위태로운가라는 울림이 우리 내면으로 쳐들어올 때, 위의 시는 그 어떤 분석의 필요도 없이 하나의 구체적인 이미지 덩어리가 된다. 그러나 계단의 가파름과 위태로움은, 위의 시를 가만히 보면, 우리가 흔히 상상하기 쉬운 의미, 삶은 어차피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고 죽음은 하나의 추락이라는 상식적 의미 너머에 있다. “계단만으로 한동네가 되다니라는 시행과 가파름만으로도 한생애가 된다는 것에 대해라는 시행은, 생의 이쪽과 저쪽을 구분해놓은 것이 아니라, 이쪽과 저쪽의 연결 통로(상승과 하강의 통로) 자체가 삶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계단이 그렇게 연결 통로의 의미로 읽히니까, 저곳은 이곳의 끝이 아니라, 이곳으로 뱃고동, “사는 것이 쓸쓸함을 가득 채울 그 무언가를 전해주는 곳이고, 이곳은 위태롭게뱃고동들을 받아먹고있으며, 그곳에서 쳐들어온 것으로 꽉찼을 때 무엇인가 빠져나갈 것이 많은 곳이 된다. 이곳과 저곳은 그러니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가깝고도 먼 곳이다. (105-6)

 

장석남의 시들이 어렵다는 것은, 진형준이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고 말하고 있는 이 시에서도 우리는 시인의 생각을 좇기가 쉽지 않고, 진형준의 해설에 대해서도 과연 그럴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기 때문이다. 차근차근 시를 읽어나가보자. 1연은 그래도 쉬운 표현이다. 해안가의 마을들은 대체로 평지가 없어서 계단을 중심으로 한 비탈에 동네를 이루고 있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2연에서 무릎만 남은 삶은 이미지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신체 부위는 모두 사라지고 달랑 무릎만 남은 삶이라니?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다리는 다 닳아 없어지고(과장법적으로 말하자면) 무릎만 남은 힘겨운 삶이라는 의미일까? “베고니아의 붉은 뜰이” “뱃고동들을 받아먹는다는 말은 알겠는데, 왜 하필이면 위태롭게일까? 삶이 힘겨우니까? 삶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3연에서는 동네()와 바다(아래)가 대비되어 제시되고 있다.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사는 것이 쓸쓸함의 만조를 이룰 때/무엇인가 빠져나갈 것 많을 듯이라는 말은, 이윤학의 시 <난로 위의 주전자>에 나오는 구절, “극에 달한 고통만이,/영혼을 건져 올릴 수 있다와 일맥상통한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마지막 두 행에서는 인생이 힘겹기만 한 것이라도 거기에 대해 군말을 하지 않으려는, 혹은 그 앞의 시행과 연결해서 그 힘겨움으로 우리가 인생에서 뭔가를 깨닫는다(혹은 얻는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꼼꼼하게 읽어본 결과 진형준처럼 상징적인 해석을 하지 않더라도 이 시는 나름대로 분석의 그물망에 걸려드는 듯하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의 전체적인 어조가 꼭 이런 식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시인의 의식이 삶의 힘겨움을 초월이나 비상의 조건으로 보고, 대체로 그런 부분에 많이 눈길을 주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듯하다. 진형준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아프게 사는 것, 시름시름 사는 것, 힘겹게 사는 것이 바로 꽃핌, 비상의 조건이라고 노래하는 상상력은, 상식적인 얘기지만 삶의 표면에서 이면까지 꿰뚫어보는 상상력이고, 변화하는 것들 이면에서 순환을 느끼는 상상력이다. 수직적으로, 그리고 수평적으로 가장 이질적인 것을 맺어주는 상상력은, 이질적인 것들 안에서 상동적인 요소를 보는 상상력이다. 그 상상력 앞에서는 만물을 변화시키는 시간도 그 절대적인 힘을 잃어버리게 되고, 과거는 과거인 채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찮은 사물 속에 켜켜이 쌓여 있게 된다. 아니 하찮은 사물을 보고 시인은 긴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다. (113)

 

그의 시의 이러한 특질은 옹색하게 살았던가”(<옛노트에서), “가엾은 목숨”(<연못을 파서--하나>), “시골 여인숙처럼 환한 상흔”(<연못을 파서-->), “()한 세월”(<버스 정류장 옆 송월 전파사>), “무릎만 남은 삶”(<송학동 1>), “삶은 얼마나 누추한 것이냐”(<송학동 2>) 등의 구절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시가 삶의 누추함과 초라함과 힘겨움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러한 조건에서 비상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가 <밤술>이 아닌가 한다.

 

진눈깨비의 짧은 보폭을 따라

골목 어귀를 도는데

누군가 끄지 않은 처마 등불이

쓰다 남은 희망처럼

젖은 눈발에게도 몸을 허락하고 있었다

멀리 혹은 가까이

땅그랑대는 바람들

무릎이 닳는 동안

진눈깨비는 그쳐서

늦게 뜨는 별이, 별이

오래 동거하던 여자처럼

한편, ‘이질적인 것을 화합시키는 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우리가 그의 시에서 받는 또다른 충격은 그가 보여주는 섬세한 시선이다.

 

처마에 매달린 풍경이 자기 육신을 치는 소리

풍경이 자기 육신을 쳐서

소리로라도 가려고 하는 곳

그곳을 나는 지금 보고 있다

--<깊은 밤> 일부

 

단추 떨어져 열린 속도 품이라고

바람든 눈송이들 기웃기웃 찾아들어

가슴을 헐값에 임대 놓고 싶구나

--<배호 5> 일부

 

진눈깨비의 짧은 보폭을 따라

골목 어귀를 도는데

누군가 끄지 않은 처마 등불이

쓰다 남은 희망처럼

젖은 눈발에게도 몸을 허락하고 있었다

--<밤술> 일부

 

눈에 띄는 대로 찾아서 적어본 이 구절들에서 시인이 보여주는 섬세한 시각은 그의 시의 어려움을 넘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대충 살펴본 것이기만 하지만 장석남의 이 두 번째 시집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첫 번째 시집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특유의 섬세한 시각과, 또 삶의 힘겨움과 고달픔과 쓸쓸함 등을 우리 삶의 피할 수 없는 조건으로 보고 거기에서 비상을 꿈꾼다는 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