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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박형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문지(94년) 2001년 2월 8일

by 길철현 2016. 12. 1.

박형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문지(94) 200128

 

 

(다른 시집)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창비(97)

 

박형준의 첫시집에서 받은 가장 강렬한 인상은 언어 구사의 능숙함상상력의 폭이다.

 

달팽이 한 마리가 집을 뒤집어쓰고 잎 뒤에서 나왔다

자기에 대한 연민을 어쩌지 못해

그걸 집으로 만든 사나이

물집 잡힌 구름의 발바닥이 기억하는 숲과 길들

어스름이 남아 있는 동안 물방울로 맺혀가는

잎 하나의 길을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두 개의 뿔로 물으며 끊임없이 나아간다

물을 먹을 때마다 느릿느릿 흐르는 지상의 시간을

등허리에 휘휘 돌아가는 무늬의 딱딱한 껍질로 새기며,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연기에 섞여

저녁 공기가 빠르게 세상을 사라져갈 때

저무는 해에 낮아지는 지붕들이 소용돌이치며

완전히 하늘로 깊이 들어갈 때까지,

 

나는 거기에 내 모습을 떨어뜨리고 묵묵히 푸르스름한,

비애의 꼬리가 얼굴을 탁탁 치며 어두워지는 걸 바라본다

--<달팽이> 전문

 

다소 길긴 하지만 이 시는 시 자체로도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 듯해서 전문을 실어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4행의 물집 잡힌 구름의 발바닥이 기억하는 숲과 길들이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이 이 시에서 지니는 적절함 여부를 떠나, ‘숲과 길이 때때로 구름과 맞닿는 상황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박형준 시가 가지는 큰 힘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아울러 내 자신의 시작에서도 이러한 표현을 개발하도록 채찍질 해야 할 것이다.)

이광호는 박형준의 시에서 기억을 통해서 새롭게 재현되는 시간(정확한 표현은 아니겠지만)’을 읽어내고 있지만, 나는 박형준의 시에서 그런 것을 보지는 못했다. 초반부에는 그의 시적인 표현들에 취해 읽다가, 그러한 것이 되풀이 되면서 약간 흥미를 잃게 되었고, 또 시의 인상이 강렬하지 못하다는 점도 한 가지 약점으로 다가왔다. (물론 내가 시를 꼼꼼하게 읽지 못하고 있다는 반성도 늘 뒤따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