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시 및 감상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문지(01년 6월 5일)

by 길철현 2016. 12. 5.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문지(01년 6월 5일)


<성민엽>

*그러나 내게 황인숙은 80년대의 대표적 시인 중의 하나인 최승자와의 대조로 더 실감있게 다가온다. 최승자가 이 의미없는 세계, 병든 세계, 요컨대 부정적인 세계에 대한 강렬한 부정의 태도와 그녀와 그녀의 시 자체가 이 세계에 대한 부정성이 되는 방법 속에서 시적 독자성을 구축했다면, 황인숙은 이 황막하고 메마른 세계를 윤택하고 탄력 있는 세계로 전도시키는, 말하자면 일종의 긍정적 변형의 방법에 의해 그녀의 시적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다. 엄숙한 현실 원칙과 자동화된 일상에 대해 불온한 전복과 불경스런 일탈을 행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진만, 그 태도와 방법에 있어서 이 두 시인은 퍽이나 상반되는 것이다. (122)

*좀더 확대해보면, 사실상 황인숙의 시는 억압과 해방에 관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엄숙한 현실 원칙과 자동화된 일상은 억압의 양상인 것이며, 그녀의 긍정적 변형은 해방에의 모색인 것이다. (130)


<개별시>

1. 그 여자 (25)
버스에서 잠든 여자를 묘사한 이 시는 일견 별다른 느낌을 주지 않는다. 아가씨가 ‘다리를/한껏 벌리고’ 있는 포즈는 다소 외설적이고, 도전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충격으로까지 다가오지는 않는다. 황인숙이 굳이 버스간의 이 여자를 표제로 삼아 시를 쓴 까닭은 무엇인가? ‘심술궂은 데다가 운전 솜씨도 신통찮은 운전수’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도, ‘입을 벌리고’ 다리를/한껏 벌리고‘ 잠든 여인. 거기다 ’보퉁이를 그러안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이 남녀 관계의 불평등이랄지 그런 것까지 그려내려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거침없이 자신의 수면욕을 추구해 나가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적극적인 삶의 표본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나, 덤으로
이 시는 처음에 읽었을 때는 의미가 잘 다가오지 않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까, 이 시집 전반에 드러나있는 늙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표명한 것이다.


3. 그림자 놀이
이 시는 종잡을 수가 없다.

몇 통의 편지가 햇살에 떠
떨어져, 푸드득거리며
떨어져, 그리고
무언가 잘못됐다.
몇 통의 편지가

뜨락에 그림자를 그리며
푸드득 날아와
아마 떨어져
나는 고개를 돌리고
(고개를 돌린 건 잘못이 아니었다)
일어서, 일어서려고 했다.


‘편지’라는 어휘는 이 시에서는 ‘나뭇잎’의 이미지로 읽힌다. 그렇다면 위 두 연은 ‘죽음’을 연상시키게 한다. 그리고 5연부터는 ‘망령’들이 등장한다. 이 망령들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늙은 딸’을 에워싼다.
이 시는 죽음과, 죽음 저편에 있는 망자들과의 조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세부 사항들이 한 편의 시로서 어떻게 유기적인 종합을 이루는지는 모르겠다.


<감상>
황인숙의 첫 시집은 그 ‘가벼움’으로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녀 시의 가벼움은 생래적이라 할 수 있는 그녀의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번째 시집의 앞부분에 실린 시들은 그녀의 시가 보여주던 생기 발랄함이 빛을 잃고, 무거워지고, 산문화된 느낌을 주었다.


아저씨는 영하 십육 도의
바람 쌩쌩이는 골목 어귀에
나지막이 카바이드 불 밝히시고
영원히 영원히 서 계실 것 같다
영원히 그 앞엔
아무도 서성이지 않고.
                     --<겨울밤> 일부


우리가 속칭 ‘산베이’라고 부르는 과자를 파는 아저씨의 모습에서 <겨울밤>의 추위와 삶의 힘겨움을 읽어내려 하고 있는 이 시는, 시적인 울림을 주지 못한다. 현실 세계의 강퍅함을 적어내는 순간 그녀의 시는 그녀가 갖고 있는 생래적이랄 수 있는 마법이 사라져 버리는 듯하다. <1987년 여름>이나 <그 여자>도 마찬가지로 시적 형상화에는 그다지 성공한 작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이러한 제재에 그다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사실 이번 시집에는 ‘가을’이나, ‘저녁 혹은 밤,’ ‘죽음’ 등을 표제로 삼거나 다룬 시들이 많다. 그것은 성민엽이 지적하고 있듯이, ‘죽음과 늙음에 대한. . . 강박 관념(126)’의 표출인 셈이다.


그의 늙음은 가히 주술적이다. (잿빛
상고머리와 수건이 든 비닐봉지로 위장하고 있지만)
뙤약볕의 개구리처럼
끔찍하게 마른 사지, 오그라든 젖퉁이
눈꺼풀은 돌비늘, 눈알을 덮고
나무 옹이 같은 입.  
                   --<몽환극> 일부


목욕탕에서 본 늙은 노파의 추악한 모습에서 ‘늙는다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은 증폭된다. 늙는다는 것은 생기와 아름다움이 상실된다는 것으로 시인에게 비치고, 자신의 ‘자유로운 상상력’도 이 늙음 앞에서는 무기력하지 않은가 하는 위기감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늙지 않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는데, 그 또한 쉬운 노릇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늙음에 대한 공포가 길항하며 서로를 끈덕지게 끌고 나간다. 무서운 일이다. 늙지 않으려면 죽어야 하고 죽지 않으려면 늙어야 하다니” “하지만 늙는 건 죽음보다 지독하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는 그러한 정신적 위기감이 명료하게 형상화된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시집도 첫 시집과 같이 황인숙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돋보인다. 하지만, 첫 시집을 특징짓던 ‘가벼움’이 다소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그것은 현실 세계의 중압감 앞에서, 자신의 시가 가지는 힘에 대한 의구심이 알게 모르게 끼어든 것은 아닌가 한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 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 . . . .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을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