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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황인숙,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문지[2001년]

by 길철현 2016. 12. 5.

*황인숙,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문지


*진형준, 자기 부정, 밖을 향한 터짐
*위의 시구절들에서 우리가 깊이 느끼게 되는 것은 시인의 자기 부정의 철저함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자기 부정의 모습은 대개 타락한 자아/순수한 자아의 대립 구조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까 그 경우의 자기 부정은 이상*꿈 등을 드높이는 효과를 낳는다. 그러나 황인숙의 자기 부정은 그 반대의 의미를 띠고 있다. 즉 자기 부정을 통해 이상 세계의 드높음을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무의 것도 아니고/아무것도 아니라는/피의 계율을 잊었기 때문에” 자신이 타락했다는,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는 척한 사실 자체가 자신의 타락의 출발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93)
*시인의 고통은 내 삶이 비천한 데서 오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삶이 타락했기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며, 내 안에 순수한 영혼이 있다고 내 영혼은 이 더러운 세상과 만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자신의 허위 의식에서 온다. (93-4)


<개별 시 분석>
*장엄하다
“모든 죽음은 그 장소가 정해져 있어서”라는 말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우리의 죽음은 어떤 장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말과, ‘우리의 죽음이 어떤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은 운명이다’라는 말을 동시에 표현해 보려 한 것일까? 우리 모두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그것은 ‘정해진 장소’에서 일어난다. 즉 피할 수가 없다.
2연은 직접 술취한 사내를 제시하고 있고, 3연은 죽음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이다.


어떤 코믹한 죽음도, 실없는 죽음,
개죽음도, 그가 결국 죽으러
그곳으로 다가가는 걸음을 생각하면.


죽음 앞에서 우리 삶은 <장엄하다>. 죽음이라는 운명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는 <장엄하다>. 다시 2연으로 돌아가서 술취한 사내의 비틀 걸음을 생각해 보자. 그는 아스팔트를 걷고 있다. 지나가는 차가 그를 치고 달아난다. 그는 자신이 치인 사실을 의식하기도 전에 즉사하고 만다. “그곳으로 다가가는” 그의 “걸음을 생각하면” 죽음은 <장엄하다>.
나의 안목으로는 이 시를 높이 평가하기가 힘이 든다.


*밤의 노래
*1연-‘너’는 누구인가? ‘그것이’는? ‘너’는 밤이고, ‘그것이’는 노래인가? 아니면 너는 ‘나’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인가?
*2연-‘나’는 시적 화자.

이 시는 상당히 어렵다. 우선 나와 너의 관계가 모호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시는 너를 향해 뻗는 나를 노래하고 있다. ‘나는 너를 만질 수’는 없지만, ‘보고 또’ 보고, 내 머리를 받치는 베개가 되려 한다.


너를 향해
내 발바닥엔 잔뿌리들 간지러이 뻗치고
너를 만지고 싶어서
내 모든 팔들에
속속 잎새들 돋아난다.


대충 이 정도는 정리가 되지만, 그 이상으로 이 시가 특별한 울림을 주지는 않는다. 내가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採 春
*우선 1연이 나머지 연들과 어떻게 연결되는 지 모르겠다. 나머지 연은 대체로 명료하다. ‘그 둘이 가진 것이라곤/합해야 개와 주인밖에 없다’라는 표현은 참 좋다. ‘그젯밤쯤에 누군가가/이 계단에 피를 쏟았다’라는 표현은 ‘아까부터/중국집 배달원이 사람을 찾으며 두드리는/이웃집 대문을’에 가닿는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피는 노파의 피이고, 혹은 늙음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개와 노파가 바라보는 이웃집에 핀 목련은 젊음을 상징하는 것인가? (제목과 연관지어 볼 때)


*목고리
커피와 책과 전화와 동전은 빚, ‘영혼을 판 것, 같은 기분을 주는 것.’ 화자가 빚이라고 느끼는 건 팔지 않아야 할 영혼을 팔았기 때문에? 커피와 책과 전화와 동전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