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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409

고은 - 섬진강에서 섬진강에서 고 은 저문 강물을 보라. 저문 강물을 보라. 내가 부르면 가까운 산들은 내려와서 더 가까운 산으로 강물 위에 떠오르지만 또한 저 노고단 마루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강물은 저물수록 저 혼자 흐를 따름이다. 저문 강물을 보라. 나는 여기 서서 산이 강물과 함께 저무는 것과 그보다는 강물이 저 혼자서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한 채를 싣고 흐르는 것을 본다. 저문 강물을 보라. 강물 위에 절을 지어서 그곳에 죽은 것들도 돌아와 함께 저무는 강물을 보라. 강물은 흐르면서 깊어진다. 나는 여기 서서 강물이 산을 버리고 또한 커다란 절을 버리기까지 저문 강물을 쉬지 않고 볼 따름이다. 이제 산 것과 죽은 것이 같아서 강물은 구례 곡성 여자들의 소리를 낸다. 그리하여 강기슭의 어둠을 깨우거나 제자리로.. 2022. 12. 5.
김용택 - 섬진강 1 섬 진 강 1 김 용 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휜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 2022. 12. 5.
이동순 - 운문사 비구니 운문사 비구니 이 동 순 운문사 비구니들이 모두 한자리에 둘러앉아 메주를 빚고 있다 입동 무렵 콩더미에선 더운 김이 피어오르고 비구니들은 그저 묵묵히 메주덩이만 빚는다 살아온 날들의 덧없었던 내용처럼 모두 똑같은 메주를 툇마루에 가지런히 널어 말리는 어린 비구니 초겨울 운문사 햇살은 그녀의 두 볼을 발그레 물들이고 서산 낙조로 저물었다 [감상] 운문사 비구니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메주를 빚는 모습을 사실적이고 담담하게 묘사한 시. 우리의 삶이 폭풍우 치는 바다 같은 면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모든 것이 어쩌면 덧없고 부질없는 몸짓일 수도 있다. 하고 싶은 말들을 안으로 밀어두고 묵묵히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삶을 지혜롭게 건너는 방편인가? 2022. 12. 3.
유치환 - 석굴암대불 // 서정주 - 석굴암 관세음의 노래 석굴암대불 유 치 환 목 놓아 터트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 감고 앉았노니 천 년을 차가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 ​ 목숨이란! 목숨이란 - 억만 년을 願(원) 두어도 다시는 못 갖는 것이매 이대로는 못 버릴 것이매 ​ 먼 솔바람 부풀으는 동해 蓮(연)잎 소요로운 까막까치의 우짖음과 뜻 없이 지새는 흰 달도 이마에 느끼노니 ​ 뉘라 알랴! 하마도 터지려는 통곡을 못내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적적히 눈감고 跏趺坐(가부좌)하였노니. 석굴암 관세음의 노래 서 정 주 그리움으로 여기 섰노라 호수와 같은 그리움으로 이 싸늘한 돌과 돌 사이 얼크러지는 칡넝쿨 밑에 푸른 숨결은 내 것이로다 세월이 아주 나를 못 쓰는 티끌로서 허공에, 허공에, 돌리기까지는 부풀어오.. 2022. 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