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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409

함민복 - 긍정적인 밥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2023. 4. 21.
이원 -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잉크 냄새가 밴 조간신문을 펼치는 대신 새벽에 무향의 인터넷을 가볍게 따닥 클릭한다 신문 지면을 인쇄한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PDF 서비스를 클릭한다 코스닥 이젠 날개가 없다 단기 외채 총 500억 달러 클릭을 할 때마다 신문이 한 면씩 넘어간다 나는 세계를 연속 클릭한다 클릭 한 번에 한 세계가 무너지고 한 세계가 일어선다 해가 떠오른다 해에도 칩이 내장되어 있다 미세 전극이 흐르는 유리관을 팔의 신경 조직에 이식 몸에서 나오는 무선 신호를 컴퓨터가 받는다는 12면 기사를 들여다본다 인류 최초의 로봇 인간을 꿈꾼다는 케빈 위윅의 웹 사이트를 클릭한다 나는 28412번째 방문객이다 나도 삽입하고 싶은 유전자가 있다 마우스를 둥글게 감싼 오른손의 검지로 메일을 클릭한다 지난밤에도 메일은 도착해 있다 캐나다.. 2023. 4. 21.
황지우 - 심인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와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2023. 4. 21.
장석남 - 소나기 남천(南天)에서​ 천둥소리 하늘을 깨치는가 싶더니​ 머위밭을 한꺼번에 훑는​ 무수한 초조함들​ 처럼​ 이제 어디에라도​ 닿을 때가 되었는데​ 되었는데​ ​ 소나기 지나가며​ 외딴 어느 집 처마 밑에 품어 준​ 열서넛 남짓​ 나일론 옷 다 젖어 좁은 등허리 뼈 비쳐 나는​ 소년, 처연한 머리카락​ 서 있는 곳​ 그 토란잎 같은 눈빛이 가 닿는 데​ 그 표정 그 눈빛이 자꾸만 가는 데​ 그런 데에 닿을 때 되었는데,......,​ ​ 천둥이 하늘을 깨쳐 보여 준 그곳들을​ 영혼이라고 하면 안 되나​ 가깝고 가까워라​ 그 먼 곳​ ​ 이 땅에 팍팍​ 이마를 두드리다 이내​ 제 흔적 거두어​ 돌아간​ 오후 한때​ 소나기 행자(行者)들​ 쫓아간​ 내 영혼​ ​ 겨울 어느 날​ 눈 오시는 날​ 다시 보리라​ 빈 대.. 2023.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