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 및 감상409 백석 - 수라(修羅)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잰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찌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삭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 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 2023. 4. 24. 고형렬 - 거미의 생에 가 보았는가 천신만고 끝에 우리 네 식구는 문지방을 넘었다 아버지를 잃은 우리는 어떤 방에 들어갔다 아뜩했다 흐린 백열등 하나 천장 가운데 달랑 걸려 있어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간혹 줄이 흔들렸다 우리는 등을 쳐다보면서 삿자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건너편에 뜯어진 벽지의 황토가 보였다 우리는 그리로 건너가고 윙 추억 같은 풍음이 들려왔다 귓속의 머리카락 같은 대롱에서 바람이 슬픈 소리를 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인간들에게 어떤 시절이 지나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에 늙은 학생같이 생긴 한 남자가 검은 책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 남자의 바로 책 표지 밑을 지나가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넘긴 것 같은 조금 수척한 남자가 멈칫했다 앞에 가던 형아가 보였던 모양.. 2023. 4. 24. 장정일 - 쉬인 사람들은 당쉰이 육일 만에 우주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건 틀리는 말입니다요. 그렇습니다요. 당쉰은 일곱째 날 끔찍한 것을 만드셨습니다요. 그렇습니다요 휴쉭의 칠일째 저녁 당쉰은 당쉰이 만든 땅덩이를 바라보셨습니다요. 마치 된장국같이 천천히 끓고 있는 쇄계! 하늘은 구슈한 기포를 뿜어올리며 붉게 끓어올랐습지요. 그랬습니다요. 끔찍한 것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온갖 것들이 쉼히 보기 좋왔고 한없이 화해로왔읍지요. 그 솨실을 나이테에게 물어보쉬지요. 천년을 솰아남은 히말라야 솸나무들과 쉬베리아의 마가목들이 평화로왔던 그때를 기억할 슈 있읍지요. 그러나 당쉰은 그때 쇄솽을 처음 만들어 보았던 쉰출나기 교본도 없는 난처한 요리솨였읍지요. 끓고 있는 된장국을 바라보며 혹쉬 빠뜨린 게 없을까 두 숀 비벼대다가 냅다 마요.. 2023. 4. 24. 장정일 - 시집 시로 덮인 한 권의 책 아무런 쓸모없는, 주식시세나 운동경기에 대하여, 한 줄의 주말방송프로도 소개되지 않은 이따위 엉터리의. 또는, 너무 뻣뻣하여 화장지로조차 쓸 수 없는 재생불능의 종이 뭉치. 무엇보다도, 전혀 달콤하지 않은 그 점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로 덮인 한 권의 책, 이 지상엔 그런 애매모호한 경전이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신을 위해서랄 것도 없는. 하지만 누가 정사에 바쁜 제 무릎 위에 얄팍하게 거만 떠는 무거운 페이지를 올려놓는다는 말인가? 그래, 누가 시집을 펼쳐 들까 이제 막 연애를 배우는 어린 소녀들이, 중동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아니라면 장서를 모으는 수집가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뒷장을 열어 출판년도를 살펴볼까? 양미간을 커텐같이 모으며 이것 굉장하군! 감탄하는.. 2023. 4. 24. 이전 1 ··· 56 57 58 59 60 61 62 ··· 10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