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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409

백석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2023. 4. 24.
이장욱 - 투우 우리 사이에 어떤 기미가 있었다. 우리 사이에 꽃이 피었다. 우리 사이에 물이 얼었다. 적어도 나는 명료하다. 나의 몸은 집중적으로 지속된다. 나는 끝내 외향적이다. 끊임없이 나의 유일한 외부, 당신을 향해 이송 중이다. 단 하나의 소실점이 확장될 때 내가 단 하나의 소실점에 갇힐 때 그것은 확률인가? 볼록 렌즈를 통과한 햇빛이 검은 점을 이루는 순간, 나의 첨단은 나를 떠나 드디어 당신을 통과하였다. 나의 질주는 뜨겁고 결국 완성될 것이다. 나는 타오르는 얼음과 같다. 수많은 발자국들이 허공을 질주 중이다. 2023. 4. 24.
이장욱 - 먼지처럼 나는 코끼리의 귀가 되어 펄럭거리고 너는 개의 코가 되어 먼 곳을 향하고 우리는 공기 중을 부드럽게 이동하였다. 활명수(活命水)를 마시고 있는 약국안의 사내와 함께 머리를 말리고 있는 여자의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배경이 되어 무한히 지나갔다. 오늘 아침의 세계는 역사와 무관하고 어젯밤의 세계는 다만 어젯밤의 세계, 우리는 어지럽고 아름다웠다. 먼지처럼 음악처럼 오늘은 누군가 성수와 뚝섬 사이에서 사라지고 누군가 병든 유태인처럼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누군가 박물관의 입구처럼 조용해지고 아침에는 추리 소설 속의 탐정처럼 깨어났다. 노련한 사서들은 언제나 음악의 비유를 경계했지만 우리는 미래의 음표로 나아가기 위해 현재에 집중해야만 하는 피아니스트와 같이 나는 내일도 기린의 목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너.. 2023. 4. 24.
김수영 - 거미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2023. 4.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