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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409

장정일 - 철강 노동자 받아쓰십시오. 분위기 있는​ 조명 아래 끙끙거리며​ 좋은 시를 못 써 안달이 나신​ 시인 선생님.​ ​ 나의 직업은 철강 노동자​ 계속 받아쓰십시오. 내 이름은​ 철강 노동자. 뜨거운 태양 아래​ 납덩이보다 무거운 땀방울을​ 흘리는 철강 노동자​ ​ 당신은 생각의 남비 속에​ 단어와 상상력을 넣고 끓인다지요​ 눈물방울은 넣었나요 그리고​ 달콤한 향료는?​ 망설이지 말고 당신 이모님과의​ 사랑 이야기도 살짝 섞으십시오.​ ​ 여보세요 시인 선생​ 나는 남비에 시를 끓이지는 않는다오.​ 적어도 내가 시를 쓸 때는​ 거대한 용광로에 끓이지요​ 은유와 재치 따윈 필요도 없다오.​ ​ 내가 시를 만들 때 필요한 것은​ 한 동이의 땀과​ 울퉁불퉁한 근육. 그것만 있으면​ 곡마단의 사자처럼 쉽게​ 온갖 쇠를 다룰 수.. 2023. 4. 24.
최두석 - 한장수 -고온리 앞바다 감배바위에 붙은 굴을 따다가 등줄기에 폭탄을 맞아 죽은 아낙이 있었다. 그 여자의 남편 한장수씨는 그 대가로 쿠니 사격장 경비원으로 취직하여 이제까지 그 일을 하고 있다. 가만있자, 그게 벌써 이십오 년 되얐구만. 그 일만 생각허면 지금도 오싹해. 사격장에서 염해갖구 밤중에 공동묘지에 묻었어. 애미가 죽으니께시리 뱃속에 있는 거는 말할 거이 읎구 두 살백이 기집애두 따러 죽잖우. 나, 당최 정신읎었어. 걔 죽는지두 몰르구 술먹었으니······ 경비 스다 집에 오면 사는 거이 너무 구차스러. 진절머리 넌덜머리가 나. 그러니께 술 먹고 뻗어. 아침에 정신나면 새끼들 낯바닥이 뵈여. 그 낯바닥 보고 또 출근을 허는겨. 그냥저냥 숫제 속아살았어. 요 동네 참새는 아마 귀 먹었을겨. 폭격이 요란해.. 2023. 4. 24.
전봉건 - 춘향 연가(부분) 안으로 들어가 커서 움직이면 글자 보입니다. 나는 텅 빈 달이에요 금간 거울이에요 하지만 당신의 말을 잊지는 않아요 진달래 꺾어 머리에 꽂고 질끈 꺾은 함박꽃은 함숙 입에 물고 버들가지 사이로 오면서 걸어오면서 꾀꼬리를 날리는 여자로구나 하지만 나는 손 묶이고 입 막히고 발도 묶인 몸 진달래 함박꽃 꺾지 못해요 머리에 꽂지 못해요 함숙 입에 물지 못해요 당신에게로 가지 못해요 버들가디 사이로 가지 못해요 가면서 꾀꼬리를 날리지를 못해요 하지만 당신의 말을 잊지는 않아요 계수 자단 목단 벽도에 취한 산은 강물에 들어 질펀한 푸름 풀어내는데 꾀꼬리의 날개는 금빛이로구나 하지만 나는 날개가 없어 그 산 큰 품속 날아들지 못해요 안기지를 못해요 안겨서 질펀한 푸름에 취하지를 못해요 하지만 당신의 말을 잊지는 않.. 2023. 4. 21.
서정주 - 춘향유문 - 춘향의 말(3)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 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兜率天)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불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 2023.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