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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409

황인숙 - 하, 추억치고는! 어둠 상자 속 뿌옇게 빛 절은 필름으로 찍히는 돌아오는 길에 쪼그리고 앉았다. 용접 불꽃처럼 산성비, 뺨을 뚫는 길바닥도 잠시 머물면 체온이 고인다고 마음 한끝이 중얼거린다. 헛발질이야, 헛웃음. 무슨 짓을 해도 추억으로 인화되지 않지. 헛, 헛, 헛, 시간이 헛돌고 있다. 헛, 헛, 헛, 우리가 헛놀고 있다. (헛것인 한에서의 '우리'여) (너는 괜찮아? 난, 모르겠어. 이게, 뭔가? 이글거리는, 멋들어진 스러짐이여, 끈질기게...... 2023. 4. 24.
황인숙 - 산책 플라타너스는 차갑고 맨질맨질하고 까칠까칠하다. 나는 플라타너스를 손바닥으로 텅. 텅. 텅. 두르린다. 가로등을 텅. 텅. 텅. 두드리고 쓰레기통을 텅. 텅. 텅 두르기고 오토바이를 텅. 텅. 텅. 두드린다. 보도블록은 발아래서 텅텅거린다. 달도 공중에서 텅텅거린다. (부분) 2023. 4. 24.
황인숙 - 봄날 ‘전화 받지 말 것’ 이라고 쓴 딱지를 전화기에 붙여놓고 나는 부재중이었다. 나,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갔다 돌아왔을 때 오랜 잠에도 식지 않고 베개의 부드러움에 묻힌 턱뼈로만 존재했다. 어떤 소리도 분간되지 않고 그저 소리로만 공기를 끄적이고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마음은 풀리고 적막했다 적막하게 평화로웠다 나, 아득히 세상과 멀리. 닝닝닝 전화벨이 울렸다. 닝닝닝 전화벨 끊이지 않고 닝닝닝 다 됐니? 넘실거렸다. 나는 꽉 눈을 감았다. 닝닝닝 꽃이 피고 닝닝닝 바람 불고 닝닝닝 닝닝닝 누군가 내 다섯 모가지를 친친 감았다. 아주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2023. 4. 24.
황인숙 - 조깅 후,후,후,후! 하,하,하,하! 후,후,후,후! 하,하,하,하! 후,하! 후,하! 후하! 후하! 후하! 후하! 땅바닥이 뛴다, 나무가 뛴다. 햇빛이 뛴다, 버스가 뛴다, 바람이 뛴다. 창문이 뛴다, 비둘기가 뛴다. 머리가 뛴다. 잎 진 나뭇가지 사이 하늘의 환한 맨몸이 뛴다. 허파가 뛴다. 하,후! 하,후! 하후! 하후! 하후! 하후! 뒤꿈치가 들린 것들아! 밤새 새로 반죽된 공기가 뛴다. 내 생의 드문 아침이 뛴다. 독수리 한 마리를 삼킨 것 같다. 2023. 4.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