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 및 감상409 김기택 - 하품 다 본 스포츠신문을 다시 훑어보는 무료한 얼굴이 잠시 긴장하더니 갑자기 가쁜 숨이 몰아친다. 콧김과 입김이 심상치 않더니 코와 입과 턱에 근육이 돋더니 입이 공기를 크게 베어물며 열린다. 턱뼈에 무게를 싣고 느리지만 힘차게 벌어지는 입. 얼굴의 중앙을 한껏 밀어올린 정점에서 입은 숨을 멈추고 잠시 정지해 있다. 포효하는 지루한 침묵. 나태 속의 짧은 긴장. 수축된 안면근육에 밀려 반쯤 닫혀진 눈에 눈을 치켜뜬 지하철 승객들이 보인다. 치켜뜬 눈 속에 목젖과 목구멍이 비친다. 얼른 입을 닫아야 할 텐데 둥근 공기의 힘에 밀려 닫히지 않는다. 질긴 고기로 단련된 이빨도 공기 한줌의 완력에 밀려 할 일이 없다. 다물려 할수록 커지는 입속으로 무덥고 탁한 것들이 거세게 빨려온다. 입을 찢듯이 벌려 제 일 다 보.. 2023. 4. 27. 김기택 - 사무원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손익관리대장경(損益管理大藏經)과 자금수지심경(資⾦收⽀⼼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2023. 4. 27. 이하석 - 폐차장 폐차장의 여기저기 풀 죽은 쇠들 녹슬어 있고, 마른 풀들 그것들 묻을 듯이 덮여 있다. 몇 그루 잎 떨군 나무들 날카로운 가지로 하늘 할퀴다 녹슨쇠에 닿아 부르르 떤다. 눈비속 녹물들은 흘러내린다, 돌들과 흙들, 풀들을 물들이면서. 한밤에 부딪치는 쇠들을 무마시키며, 녹물들은 숨기지도 않고 구석진 곳에서 드러나며 번져 나간다. 차 속에 몸을 숨기며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의 바지에도 붉게 묻으며. 2023. 4. 27. 최영철 - 일광욕하는 가구 지난 홍수에 젖은 세간들이 골목 양지에 앉아 햇살을 쬐고 있다 그러지 않았으면 햇볕 볼 일 한 번도 없었을 늙은 몸뚱이들이 쭈글쭈글해진 배를 말리고 있다 긁히고 눅눅해진 피부 등이 굽은 문짝 사이로 구멍 뚫린 퇴행성 관절이 삐걱거리며 엎드린다 그 사이 당신도 많이 상했군 진한 햇살 쪽으로 서로 몸을 디밀다가 몰라보게 야윈 어깨를 알아보고 알은체한다 살 델라 조심해, 몸을 뒤집어주며 작년만 해도 팽팽하던 의자의 발목이 절룩거린다 풀죽고 곰팡이 슨 허섭쓰레기, 버리기도 힘들었던 가난들이 아랫도리 털 때마다 먼지로 풀풀 달아난다 여기까지 오게 한 음지의 근육들 탈탈 털어 말린 얼굴들이 햇살에 쨍쨍해진다. [출처] 일광욕하는 가구 / 최영철|작성자 박동진 2023. 4. 27. 이전 1 ··· 51 52 53 54 55 56 57 ··· 10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