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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409

이육사 - 꽃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자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2023. 5. 22.
이성복 - 극지에서 ​ 무언가 안 될 때가 있다​ ​ 끝없는, 끝도없는 얼어붙은 호수를​ 절룩거리며 가는 흰, 흰 북극곰 새끼​ ​ 그저, 녀석이 뜯어먹는 한두 잎​ 푸른 잎새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 소리라도 질러서, 목쉰 소리라도 질러​ 나를, 나만이라도 깨우고 싶을 때가 있다​ ​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을 내리찍을​ 거뭇거뭇한 돌덩어리 하나 없고,​ ​ 그저, 저 웅크린 흰 북극곰 새끼라도 쫓을​ 마른 나무 작대기 하나 없고,​ ​ 얼어붙은 발가락 마디마디가 툭, 툭 부러지는​ 가도 가도 끝없는 빙판 위로​ ​ 아까 지나쳤던 흰, 흰 북극곰 새끼가​ 또다시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 내 몸은,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 가고​ 무언가 안 되고 있다​ ​ 무언가, 무언가 안 되고 있다​ ​ * 나.. 2023. 5. 22.
기형도 -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 .. 2023. 5. 17.
이제하 -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1954)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보랏빛 노을을 가슴에 안았다고 해도 좋아 혹은 하얀 햇빛 깔린 어느 도서관 뒤뜰이라 해도 좋아 당신의 깨끗한 손을 잡고 아늑한 얘기가 하고 싶어 아니 그냥 당신의 그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마구 눈물을 글썽이고 싶어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 피곤하고 피곤한 그리움이여 청솔 그늘에 앉아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 [이영광 시인 해설] 시인은 이 시를 고교생이던 1954년에 썼다고 한다. 이것으로, 당시 청소년 예비 시인들의 등용문이었던, 《학원》지가 주관하던 (1회)를 수상해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역시 시인 지망생이던 유경환 시인의, "친구 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 학교 뒷산에 올라가 시를 썼다는 일화가 여기저기에 보인다... 2023.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