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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409

박형준 - 바닥에 어머니가 주무신다 침대에 앉아, 아들이 물끄러미 바닥에 누워 자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 듬성듬성 머리칼이 빠진 숱 없는 여인의 머리맡, ​ 떨기나무 사이에서 나타난 하느님이 서툴게 밑줄 그어져 있다, 모나미 볼펜이 펼쳐진 성경책에 놓여 있다. ​ 침대 위엔 화투패가 널려 있고 방금 운을 뗀 아들은 패를 손에 쥔다. ​ 비오는 달밤에 님을 만난다. ​ 생활이 되지 않는 것을 찾아 아들은 밤마다 눈을 뜨고, ​ 잠결에 앓는 소리를 하며 어머니가 무릎을 만지고, ​ 무더운 한여름밤 반쯤 열어논 창문에 새앙쥐 꼬리만한 초생달 들어온다, ​ 삶이란 조금씩 무릎이 아파지는 것, ​ 가장 가까운 사람의 무릎을 뻑뻑하게 하는 것이다. ​ 이미 저 여인은 무릎이 비어 있다. 한달에 한번 시골에서 올라와 ​ 밀린 빨래와 밥을 해주고 시골.. 2023. 5. 23.
박형준 - 해당화 어머니는 겨울밤이면 무덤 같은 밥그릇을 아랫목에 파묻어두었습니다 내어린 발은 따뜻한 무덤을 향해 자꾸만 뻗어나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배고픔보다 간절한 것이 기다림이라는 듯이 달그락달그락 하는 밥그릇을 더 아랫목 깊숙이 파묻었습니다 밥그릇은 내 발이 자라는 만큼 아랫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내 발이 아랫목까지 닿자 나는 밥그릇이 내 차지가 될 줄 알았습니다 쫓길데가 없어진 밥 그릇은 그런데 어느날부터 보이지 않았습니다 봄이 되자 나는 밥그릇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습니다 설령 밥그릇이 있다 해도 발이 닿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나는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밥그릇의 따뜻한 온기보다 더한 여름이 내 앞에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쉽게 시골 소년에게 열리지 않았 습니다 사나운 잠에 떠밀리다.. 2023. 5. 23.
이문재 - 농업박문관 소식 - 우리 밀 어린 싹 만일 지금 예수가 오신다면 십자가가 아니라 똥짐을 지실 것이라는 권정생 선생의 글을 읽었다 ​ 점심 먹으러 갈 때마다 지나다니는 농업박물관 앞뜰에는 원두막에 물레방아까지 돌아간다 원두막 아래 채 다섯 평도 안 되는 밭에 무언가 심어져 있어서 파랬다 우리 밀, 원산지 : 소아시아 이란 파키스탄이라고 쓴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 농업박물관 앞뜰 나는 쪼그리고 앉아 우리 밀 어린싹을 하염없이 바라다보았다 농업박물관에 전시된 우리 밀 우리 밀, 내가 지나온 시절 똥짐 지던 그 시절이 미래가 되고 말았다 우리 밀, 아 오래 된 미래 ​ 나는 울었다 [출처] 이문재, 다섯 편의 시|작성자 비 온 후 갬 2023. 5. 23.
기형도 -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있다. ​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짐들로 하여 모든 응시들을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삶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 .. 2023.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