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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409

이윤학 - 째깐한 코스모스들, 피어난 새시 가려운 얼굴을 긁는 남자의 붉은 화상 자국 옆 비지 혹등. 무심코 제3경인고속도로를 바라볼 때, 남자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면 이미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거라 중얼거린다. 미루나무 이파리 망가진 폐를 거친 소음은 증폭되고 미세먼지 농도 짙어진다. 이마를 짚고 중고 VR관(흉관) 야적장 앞을 서성이는 남자. 아가리 하나 달랑 쳐들고 달려드는 공장 앞 한 쌍의 개 이빨을 무시한 남자. 뒤로 쩜매 묶은 앞머리 줄곧 쓸어넘긴다. 지금쯤 일 마치고 술 사 오지 싶은 두 번째 아내. 몇 번 바뀐 중고차 모델을 떠올린다. 젊은 시절 술병을 깨 긁은 왼 팔뚝 늦 모기가 문 자리 침 발라 긁적거린다. 점집 앞 죽은 참대 끝에 날아든 외 까치 짖기를 멈추지 않는다. 2023. 5. 16.
이윤학 - 캠핑 개천 바닥에 텐트를 치고 또 한겨울을 난 남자. 울긋불긋한 옷가지를 꺼내 개천 둑 철사 그물망에 널었다. 개량 한복을 차려입은 남자 홈바 괭이를 들고 텃밭을 일군다. 홀쭉한 사행천 갈대숲 기슭으로 말라붙었다. 조금 남은 곱슬머리 아지랑이로 빨려 나가고 봄바람이 잔설에 묻힌 남자의 콧수염 턱수염을 긁어 비듬을 날린다. 입 다물고 텃밭을 일군다. 홈바 괭이 날에 부딪히는 자갈. 고릿적 헤어진 전처의 잔소리를 이어준다. 아프다고 말해봤자, 엄살이 되어 돌아온다. 꽃 피기 전 아픔은 아무것도 아녔다. 정강이에서 핸드폰 진동이 시작된다. 핸드폰 화면 흰 민들레 압화 옆 잔나비 웃는다. 눈은 까뒤집혔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 입가를 내렸다. 말더듬이 흉내를 낸다. 2023. 5. 16.
박진규 -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 달이 저 많은 사스레피나무 가는 가지마다 마른 솔잎들을 촘촘히 걸어놓았다 달빛인 양 지난 밤 바람에 우수수 쏟아진 그리움들 산책자들은 젖은 내면을 한 장씩 달빛에 태우며 만조처럼 차오른 심연으로 걸어들어간다 그러면 이곳이 너무 단조가락이어서 탈이라는 듯 동해남부선 기차가 한바탕 지나간다 누가 알았으랴, 그 때마다 묵정밭의 무들이 허연 목을 내밀고 실뿌리로 흙을 움켜쥐었다는 것을 해국(海菊)은 왜 가파른 해변 언덕에만 다닥다닥 피었는지 아찔한 각도에서 빚어지는 어떤 황홀을 막 지나온 듯 연보라색 꽃잎들은 성한 것이 없다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청사포 절벽을 떨며 기어갈 때 아슬아슬한 정착지를 떠나지 못한 무화과나무 잎을 몽땅 떨어뜨린 채 마지막 열매를 붙잡고 있다 그렇게 지쳐 다시 꽃 피는 것일까 누구나 문탠.. 2023. 5. 11.
안도현 - 양철 지붕에 대하여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 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 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 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도 녹슬어 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 않겠다, 라든지 그.. 2023. 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