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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409

김지하 - 무화과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섰다 이봐 내겐 꽃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 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2023. 5. 23.
유용주 - 닭 이야기 울 아부지 없는 살림 경영하시느라 늘 스님들 공양 드셨는데요(요즘 말로 하자면 타잔이 정글에서 먹는 거와 비슷한) 무슨 바람이 불었나 어머이 몸 보하신다고 집에서 기르던 씨암탉, 눈 질끈 감고 그만 열반에 들게 하셨는데요 그 시절 귀한 인삼도 한 뿌리, 대추와 마늘과 찹쌀을 넣고 푹 고아서 말이죠 우선 기름 동동 뜨는 국물에 밥 말아 아 어여 먹어 내 걱정일랑 붙들어두고 슬며시 뒷짐지고 외양간 가는 척 넘어가는 산그리메 바라보시고 혹 손님 탈까 큰 돌 하나 묵지근하게 솥뚜껑에 올려놓고 짧은 여름밤 가을 농사 걱정이 많으셨대요 감나무 몇 그루로 경계 삼아 대문 없는 집 가축과 벌레와 함께 초저녁 잠 달게 주무시고 자리끼 찾아 막 일어서는데 어허 이 이 놈의 손・・・・・・솥뚜껑 여는 소리가 ・・・・・・살며시.. 2023. 5. 23.
백석 - 여승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늬 산山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가지취 취나물의 일종 금덤판 금전판 금광 섶벌 재래종 일벌 머리오리 머리카락의 가늘고 긴 가닥 2023. 5. 23.
서정주 - 신부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 2023.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