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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409

이영광 - 떵떵거리는 아버지 세상 뜨시고 몇 달 뒤에 형이 죽었다 천둥 벼락도 불안 우울도 없이 전화벨이 몇 번씩 울었다 아버지가, 캄캄한 형을 데려갔다고들 했다 깊고 맑고 늙은 마을의 까막눈들이 똑똑히 보았다는 듯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손을 빌려서 아버지는 묻고 형은 태웠다 사람이 떠나자 죽음이 생명처럼 찾아왔다 뭍에 끌려나와서도 살아 파닥이는 은빛 생선들 바람 지나간 벚나무 아래 고요히 숨쉬는 흰꽃잎들 나의 죽음은 백주 대낮의 백주 대낮 같은 번뜩이는 그늘이었다 나는 그들이 검은 기억 속으로 파고 들어와 끝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 떵떵거리며 살기 위해 아주 멀리 떠나 버린 것이라 생각한다 2023. 6. 11.
오탁번 - 밤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2023. 6. 8.
한용운 - 복종 남들이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출처] 시삼백276.복종_한용운|작성자 맨달권정무 2023. 6. 5.
심보선 - The Humor of Exclusion 교토의 여관에서 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후손을 만났네 내가 시를 쓴다고 하자 그는 물었네 오늘 교토의 낯선 아침이 그대에게 영감을 주었는가? 그대가 여기서 말도 안 통하고 매 순간 배제되고 나는 배제되었어요,라는 말조차 하지 못할 때 그대는 여전히 유머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바로 나처럼 말이지, 하하! 사실 Mr. Joyce는 술주정뱅이였던 거라네 교토에 술 마시러 왔나 싶을 정도로 나만 보면 술이나 같이 마시자고 모든 작가는 애주가고 모든 위대한 작가는 알코올 중독자라고 내가 마감을 핑계 대면 Fuck deadline! Come on! Let's have a drink! 사실 Mr. Joyce는 심심했던 거라네 같이 담배나 말아 피우면서 자신이 얼마나 옆방의 시끄러운 프랑스인들을 혐오하는지 자신이 .. 2023.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