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두어 달만 지나면 내 나이는 만으로 쉰하나가 된다. 그냥 쉰도 아니고, 쉰하나다. 그것도 만으로 쉰하나라는 것이 잘 믿기진 않지만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문득 문득 서른을 넘긴 뒤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의아한 생각이 든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서른을 좀 넘긴 나이었을 때, 여동생이 자살을 기도하여 일 년 넘게 병원 생활을 한 적이 있었고, 어머니와 내가 번갈아 가면서 동생의 간호를 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일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과 맞닥뜨렸을 때 나는 '내 인생이 드디어 끝장났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 때만 해도 젊었고(단적인 예 하나만 든다면 그 때는 '노안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힘든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삶은 여러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었다고 해도 허언은 아닐 듯하다.
(이렇게 무거운 말로 이 글을 시작하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활자화된 글자들은 이렇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인가?)
이십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가? 대작가가 되겠다는 (허황된) 꿈을 가슴 속에 품고 노력은 개뿔도 하지 않았던가? (작가가 된다는 것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타고난 작가적 역량, 창조력 그런 것과 더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아닌가? 우디 앨런의 영화 [브로드웨이를 쏴라](Bullets over Broadway)는 예술 작품의 창작에 있어서 천재성이나 창조성의 중요성을 코믹하게 설파하지 않았던가?) 거창한 이상은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들어 현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하는 결혼도 못하고 변변한 직장도 갖지 못한 채 집안의 재산이나 야금야금 축내는 기생충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내 삶을 세속적인 잣대로 이런 식으로 자책하는 것은 상처난 가슴에다 소금을 뿌리는 가혹한 짓 아닌가?
아무리 아름답게 윤색을 하려해도 내 삶이 불만족스럽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 복잡하게 뒤엉킨 실타래를 조금이라도 풀어낼 수가 없다.
(정말로 내 자신에게 왜 이렇게 가혹하게 채찍질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내가 쓰고자 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조차도 어려울 듯하다. 그래도 조금 더 밀고 나가보자.)
글에 이끌려 내 영혼의 어두운 부분을 너무 강조하지 말고,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다 하더라도, 지난 시간들이 헛된 허송 세월만은 아니고 한편으로는 내 나름대로 나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파악하려고 암중모색해 온 시간이었다는 점을 망각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10년, 더 나아가 20년 뒤의 나는 오늘의 나를 어떻게 되돌아 볼까? 지난 20년이 언제 지나갔는지 잘 납득이 안 되는 것처럼, 앞으로 20년 후의 내가 오늘의 나를 돌이켜본다면 또 순식간에 지나간 느낌일 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이미 나는 이 세상과는 별개의 존재가 되어 있을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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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 즈음에'(이런 제목의 노래가 있는 듯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그 유명한 김광석의 노래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혹은 그보다 또 20십 년 전, 내 나이 십 대였을 때, 그 때 문학의 위상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작가(그 중에서도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은 내 안에 뭔가 하고 싶은 말을 문학이라는 양식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깊은 욕망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이라는 것이 다수의 꿈이고, 높이 평가되고 있던 시대적인 상황과 무관하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 사이 너무나도 많이 변했고, 그 변화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앞으로의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과연 지속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한 '자기 표현'은 가장 근원적인 욕망 중의 하나라는 위치에는 큰 변동이 없을 듯하다. 아니 그렇다고 믿는다.
젊은 시절 꿈 꾸었던 소설이나 시 쓰기(특히 시는 내가 그렇게 자신이 있는 분야도, 그렇다고 관심이 큰 분야도 아니었는데 분위기에 휩쓸려 오랜 시간 시를 붙들고 있었구나)는 아니더라도, 다른 분야에서 쓸 수 있는 글들이 많이 있고, 지난 몇 년 동안 잘 쓰든 못 쓰든 그런 글들을 써왔다.
(먼 길을 헤매다가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또 알기 힘든 이유로 글 쓰기가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작년(그러니까 2016년) 1월 하순, 쉰 나이에 처음으로 혼자 떠난 외국 여행이었던 [영국 여행]은 늦은 나이긴 했지만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 만큼 이 삶을 새롭게 볼 계기를 마련해 준 그런 여행이었고, 영문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우리와는 다른 문화와 자연과 직접 맞부딪히면서 정말 다양한 경험들을 했기 때문에(모든 경험들이 나에게는 첫 경험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무엇보다도 아찔하면서도 신났던 것은 우리와는 달리 좌측통행을 하는 그곳에서 차를 렌트해서 내비게이션도 없이 잉글랜드 북쪽과 스코틀랜드 지역을 돌아다닌 것이다) 글로 적어보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솟구쳤으나, 그 방대한 규모 때문에 엄두가 잘 나지 않았다(2주간의 여행을 끝마쳤을 때에는 여행 중간중간에 적은 글만 해도 A4 용지로 80페이지나 되었다).
박사 논문이라는 큰 산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 글쓰기가 하나의 도피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닌지 하는 두려움도 없지 않다. 그리고 지난 주 토요일에 논문 자격 시험의 일환으로 독일어 시험을 보고 나서 갑자기 무력감이 오는 그런 느낌도 있었으나, 오늘 불현듯 지금이 이 [영국 여행기]를 쓸 때라는 생각이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의 영국 여행은 구체적인 계획 아래 행해진 것은 아니지만, 알게 모르게 내 전공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서 크게 보면 [문학 기행]이 되고 말았다. 당시 노트북에 기록해 둔 것을 바탕으로 여행 중에 보고 들은 것, 여러 가지 사건들, 생각이나 느낌 등을 내 기억이 미치는 한도로 최대한 밀고 나가 볼 생각이다. 이 글이 우선은 당시의 경험들을 재체험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으로 인해 촉발되는 것이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도 다소간의 즐거움 혹은 생각할 거리를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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