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alter Pater - <Renaissance>Preface, Winckelmann, Conclusion
밀이나 러스킨이 <미의식>과 인간의 <도덕>에 밀접한 연관성을 부여한 것과는 달리, 페이터를 비롯하여 유미주의자로 불리는 사람들은, <미>의 자율성 내지는 독립성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다른 삶의 양식과는 동떨어진 것으로서의 예술만을 강조하고, 그것의 가치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a taste for metaphysics may be one of those things which we must renounce, if we mean to mould our lives to artistic perfection-191).
페이터의 이 책은, 물론 부분만을 발췌해서 읽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면모를 섣불리 이야기하기는 어렵겠지만, 인간의 예술적인 추구가 빛을 발한 세기로서의 고대 그리스(로마), 또 그러한 고전 시기의 부흥인 르네상스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특히 [빈켈만] 장에서는 그러한 시대의 연구에 일생을 바친 인물로서의 빈켈만과, 그러한 삶이 ‘미를 추구한 삶’이라는 주장과 함께, 고대 그리스 예술의 특징을 살펴보고 있다.
결론 부분에서 그가 주장하는, 거칠게 말해 순간순간을 예술에 헌신하는 삶이라는 것은, 보다 고양된 인간의 생활양식이라는 점은 분명하나, 그것 또한 인간의 물적인 토대가 어느 정도 보장된 위에 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예술 지상주의>는 그 토대 자체가 탄탄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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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와일드의 경우에는 예술가와 일반 대중과의 불화가 심하게 드러나는데, 일반 대중의 물욕성 또한 어느 정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의 원시적인 ‘생명 보존의 욕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이 말은 우리의 이성적인 생각에 반하는 현상이나 흐름 등에 대해서 성급한 비판보다는 그것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이 더욱 절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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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한 것처럼, 또한 예술이 우리의 삶에서 어떠한 초월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다거나, 따로 떨어진 어떤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어리석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반 대중이 삶에 있어서 <예술>의 가치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이해되나, 그들을 예술적인 삶을 억누르는 집단으로 매도하기 전에, 그들의 삶이 갖는 강퍅함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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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서도 그 장르에 따라(문학도 예술의 일종인가) 그 독자성이라든가, 자율성이라든가 하는 면에서, 분명 차이가 크다. 같은 문학 내에서도 시와 소설의 차이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