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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문학작품

존 파울즈 - 프랑스 중위의 여자(John Fowles. The French Lieutenant's Woman. Signet. 1969.) (030717)

by 길철현 2017. 9. 9.

* John Fowles. The French Lieutenant's Woman. Signet. 1969. (030717)

(콘래드 읽기가 고역이었던 것에 비해서, 나보코프의 [롤리타]와 이 작품은 우리가 문학 작품, 그 중에서도 소설을 읽는 이유 중의 하나가 재미혹은 즐거움때문이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그것은 물론 최근에 내 기분이 좋아지면서, 규칙적인 생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작품을 접할 때의 태도에 변화가 왔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그와 동시에 영어의 부족,’ 어휘나 문장 이해 능력의 부족은 아직도 난제로 남아 있다. 일단은 어휘 능력을 확장하고, 또 영어 문장을 더욱 많이 읽는 것을 통해서, 이해 능력도 좀 더 늘여야 한다.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다.)

 

파울즈의 이 작품의 특이성은 “I”로 표현되는 현대의 화자, 혹은 작가 자신이 백 년 전의 영국, 즉 전성기에 다다른 빅토리아 조의 모습을 그려내는 가운데, 끊임없이 자신을 노정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전능한 신의 위치에서 내려와, 때로는 독자와 마찬가지로 등장인물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고심하고, 결국에는 두 가지의 결말을 내놓고 만다.

 

그러나, 작가의 이런 시도와는 별도로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진부할 수도 있는 사랑이야기이다. 찰스라는 상당히 좋은 집안 출신의 남자가 약혼녀인 어니스티나를 버리고, 사회적 추방자(outcast)라고도 할 수 있는 사라라는 여인을 선택한다는 단순한 이야기이다. 찰스와 사라의 관계가 금지된 관계라는 점에서 오이디푸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당시의 관습으로 볼 때, 사회적인 추방을 감수해야 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물론 그 정도로 극단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으나--이 두 사람의 사랑은 어느 정도 [주홍 글자]의 헤스터와 딤즈데일의 사랑을 떠올리게도 한다. (두 사람이 만나는 장소인 “Ware Commons"[주홍 글자]에서 딤즈데일과 헤스터가 미국을 떠나기로 결심하는 그 숲을 상기시킨다. 문명의 억압에서 벗어난 곳, 인간의 억눌린 욕망이 숨을 쉬는 곳.)

 

파울즈는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빅토리아 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살려내었고, 그러면서 그 사회의 관습이 얼마나 사람을 (정신) 분열적으로 만드는지를 지적하고 있다.(정확한 부분을 찾아낼 수는 없지만 285페이지도 중요하다) 다시 말해 그 사회의 추방자인 사라와 찰스는 그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중압감을 감지하고, 사회적으로 추방당하더라도 자기 안의 욕망을 쫓아가는 인물로 제시되고 있다. 선구자격인 사라를 통해 찰스도 사회의 그런 억압과 기만을 감지해 낸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라캉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추구해나간 인물들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이 점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좀 힘이 떨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특히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를 등장시키고, 또 거기다가 찰스와 사라 사이의 아이까지 등장시킨 것은 멜로드라마틱하다는 생각도 든다. 두 사람의 관계를 너무 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닌가? 삶이라는 것은 소설에서 그렇듯 하나의 생각에 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가운데에서 모두 과거로 흘러가고 새로운 사건에 접하게 되는 것 아닌가? 사라에 사로잡힌 찰스의 모습, 그 모습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역시나 쉽지 않은 노릇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야 할 것이다.)

계급 갈등. 사회의 변화. 샘과 메리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