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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컴퓨터 앞에 앉아

by 길철현 2016. 4. 15.


컴퓨터 앞에 앉아 명상을 하고 있는데


문득

발 아래로

늘씬한 갈색 빛의

중급 크기의 바퀴벌레 한 마리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지

혹은

바퀴벌레도 갑자기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인지

잠시 정거해 있다

오, 나의 철천지원수

내 아파트의 암 세포

책상 위의 두루마리 휴지를 좀 뜯어

조심스럽게 기습 공격을 감행하려는

찰라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검은 손길을 눈치 챈

바퀴벌레가

복잡하게 엉킨 전선줄 사이로

사용하지 않는 스캐너 밑으로

나의 찍기 공격을 피하며

요리조리 잘도 도망을 간다

무위로 돌아간 몇 번의 공격

그리고

오디오 받침대 밑에 안착한 바퀴벌레

이번 전투는 나의 패배로 끝이 났구나

그런데 이 바퀴벌레는

더욱 깊숙한 자신의 보금자리로 들어가지 않고

그 입구에서

나를 조롱하고 있다

그래 마음껏 승리를 만끽하거라

언젠가 네가 다시 나와 방 한 가운데서 대면하는 날

그 날이 너의 제삿날이리라

밑져야 본전의 심정으로

집게손가락으로 그 놈의 더듬이라도 눌러야 분이 풀릴 듯한데

어찌된 영문인지

높이 이 센티미터가 될까 말까한 공간 아래에서

그 놈은 나의 누르기 공격을 정통으로 받고는

정신을 못 차리고 헤롱헤롱

죄인을 밖으로 끌어낸 다음

휴지로 말고 정말이지 아작을 낸 다음

쓰레기통에다 투하


바퀴벌레 역사서에서는

너의 죽음을

까불다가 개죽음을 당했다고 기록할 것인가

몇 년 째 계속 되고 있는

바퀴벌레 군단과 나와의 전투

눈도 못 떴을 아기부터

날기도 하는 성충까지

일 밀리미터의 자비심도 없이

학살하고 학살하고 또 학살했건만

백방으로 독약을 살포하고

끈끈이 덫을 설치했건만

오 놀라워라

몇 억 년을 이어온 바퀴벌레의 강인한 생명력

나는 늘상 전투에서 승리하면서도

결국 이 바퀴벌레와의 전쟁에서

완전격퇴는 있을 수 없음을

나의 일생이

바퀴벌레와의 처절한 전투로 점철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꼭지가 돌면 정말 아파트를 불 사지를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바퀴벌레에 대한 나의 분노를 기록한 유서 한 장 남기고

못 다 푼 원한을 후세에서 풀어주길 요청하며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나의 패배를 솔직히 자인하고

이 아파트를 떠나

바퀴벌레 청정지역으로 이사를 가버릴까

(이사 비용을 바퀴벌레들이 지불해 준다면

그럴 용의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 그때 나는 또

바퀴벌레가 사무치게 보고 싶을까?

무료한 시간에는

바퀴벌레와의 전투의 순간들을

잊지 못하고 아쉬워 할 것인가?

난 바퀴벌레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12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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