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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 이야기

기쁜 우리 젊은 날 - 홍천 전국대학 대회를 마치고

by 길철현 2016. 4. 18.

<기쁜 우리 젊은 날--홍천 전국대학 대회를 마치고> (100128)


간략한 후기와 경기 결과는 이지웅(99)이가 올려놓았으니까, 나는 이번 대회를 치룬 개인적인 소감을 중점적으로 적어보려고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긴 한데, 또 읽는 사람을 지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고 있네요. 그래서 절충안으로 <쇼트 버전>과 <풀 버전> 두 가지를 마련해 보았습니다.



<쇼트 버전> (평어체가 글을 전개하기가 편해서 그렇게 썼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한 달 전쯤인가, 아랫부분이 많이 파손된 이전의 라켓을 새 것으로 바꾸고 나서부터인 듯한데, 그 동안 계속 레슨을 받으면서 해왔던 드라이브 풋워크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공도 예전보다 회전을 더 많이 먹는 것이 느껴졌다. 지난 7년 동안 나를 가르쳐왔던(중간 중간에 쉰 적도 많았지만) 백성찬 코치도 요즘 들어 볼이 강해졌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내심 그 동안 연습을 해 온 것이 이제 좀 성과가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가시적인, 그리고 기대를 뛰어넘는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이번 홍천 대회는 대진운이나 그 밖의 여건들이 우리 학교에, 또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특히 이번 대회의 최강팀인 경희대 사람들이 새벽 다섯 시까지 술을 마신 것이 우리에겐 큰 플러스가 되었다.


1. 단식

예선전에서는 우리 조에 두 명밖에 없어서 1,2위 결정을 하는 시합이라 부담이 크지 않았는데, 이번에 OB로 올라온 경희대의 남주현을 3대 0으로 가볍게 이기고 조 1위로 본선에 진출했다. 본선에서는 14명 중 2명밖에 주지 않는 부전승을 받아, 곧바로 8강. 8강전에서는 평소 껄끄러운 상대였던 역시 경희대의 이용주를 3대 0으로 제치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준결승전 상대는 강릉대의 이섭이었는데, 이섭은 오목대를 참 잘 구사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면서 시소게임을 벌였지만, 마지막 뒷심부족으로 2대 3으로 패하고 말았다. (이섭은 이번 대회 개인전에서 우승을 했다.)


2. 단체전

요번 우리 팀이 최강 전력이 아니라 다소 걱정을 했는데도, 참가 학교도 적고 대진운도 좋아서 준우승을 했다. 강릉대와의 결승에서는 다섯 명이 모두 한꺼번에 들어갔는데, 나는 최수용을 맞아 2대 0으로 이기고 있었지만, 다른 후배들이 모두 지는 바람에 게임 결과는 0:3이었다. 김기덕이 강릉대의 최규철에게 0대 3으로 진 것이 아쉽긴 하지만, 최규철이 이섭과 늘 쳐서 기덕이의 오목대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불운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3. 개인복식

이번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고광순과 한 조가 되어서 펼친 복식 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선전에서는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지 않아 약체인 방통대 팀에게도 질 뻔 했는데, 차츰 광순이의 실력이 올라오고, 강공으로 득점을 올리려는 욕심을 버리고 연결 위주로 범실을 줄이는 방식으로 경기를 펼쳐 나감으로써 승리를 이어나갔다. 용인대와의 8강에서는 풀세트 접전 끝에 듀스까지 가서 기사회생했고, 4강전(강릉대)에서도 2대 1로 뒤진 상황에서 듀스까지 가서 2대 2를 만든 다음에 5세트는 다소 쉽게 이겼다. 경희대 남주현, 안우성과 붙은 결승전에서도 먼저 2세트를 내 주는 바람에 패색이 짙었으나, 2대 2를 만들어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았고, 5세트는 8대 2로 앞서 나갔으나, 이 후 상대방의 적극적인 공격에 밀려 듀스를 허용했다가 13대 11로 정말 짜릿하고 극적인 승리를 낚아챘다.  

  

개인전과 단체전, 개인복식 3개 부분에서 모두 성적을 낸 것은 정말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지금까지 탁구를 쳐 오면서 이렇게 큰 선물을 받은 적은 없는 것 같다. 특히 복식에서의 우승은 값진 것이다. 평소 복식이 약하다는 징크스를 날려버린 시합이자, 누군가와 호흡을 맞춰 우승이라는 값진 타이틀을 얻어냈다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이번 대회의 마지막 시합을 고대의 승리로 장식하고, 그리고 시합 내내 이어지던 후배들의 응원, 그리고 우승이 확정된 뒤의 후배들의 엘리제. 정말 이 날은 <기쁜 우리 젊은 날>이었다.






<풀 버전>



간략한 후기와 경기 결과는 이지웅(99)이가 올려놓았으니까, 나는 이번 대회를 치룬 개인적인 소감을 중점적으로 적어보려고 합니다. 오휘찬(03)이가 이번 대회를 치루고 난 뒤의 소감을 적어나간 방식이 지금 이 글을 적어나가는데 적절할 듯하여 그 방식을 차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합을 마친 뒤 탁사 분위기가 이상하게도 멜랑콜리한 방향으로 흐르고, 나도 자꾸 감상적으로 흐르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한 나 자신을 추스르면서 소회를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들어가기 전에--몇 가지 기억들

홍익대에서 열린 96년도 [전국대학 탁구 대회]에서 우리 학교가 단체전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우승을 하여, 고대 탁사를 만나면 환호성을 올리던 다른 대학 탁구 동아리들에게 무서운 호랑이로 변신한 뒤, 우리 학교는 약체에서 강호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이제 탁사 OB도 탁사에 뭔가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름대로 탁구에 몰두하고 있던 나는 97년도에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그리고 대전환이라는 모험수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마련하고자 20년 가까이 쳐온 펜홀더 라켓을 버리고, 셰이커 라켓을 선택했다. 그리고 악전고투. 그러다가, 2000년 후반기부터 3년 가까이 탁구에 몰두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2003년 코리아에서 열린 [경인지역 대학 탁구 대회]에서 개인전에서 8강이라는 목표를 훌쩍 뛰어 넘어 단번에 우승을 하는 쾌거를 얻어냄으로서 약간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나도 탁사에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이 시합에서의 우승 이후 나는 또 한 번의 변신을 시도했는데, 그것은 스매싱 전형에서 드라이브 전형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전환은 펜홀더에서 셰이커로의 전환보다 더욱 힘겨운 그런 것이었다. 이후 7년 동안(중간 중간에 부상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탁구를 못 친 적도 있지만) 나는 큰 대회 개인전에서 한 번도 성적을 내지 못했다. 작년부터 드라이브 임팩트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해서, 여타 다른 단체전에서는 여러 번 성적을 내었고, [대학 탁구] 대회에서도 두 번 연속 준우승을 차지하고 거기에 내가 일조를 하기도 했으나(OB 참가팀의 수가 준 것이 성적을 낼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된 것도 사실이다), 개인전 2부 오픈 대회에서는 본선 1, 2회전에서 주로 패배의 고배를 마셔야 했고(최고로 많이 올라간 것이 3회전이었다), 대학 시합에서도 8강에서 번번이 탈락하고 말았다.

한 달 전쯤인가, 아랫부분이 많이 파손된 이전의 라켓을 새 것으로 바꾸고 나서부터인 듯한데, 그 동안 계속 레슨을 받으면서 해왔던 드라이브 풋워크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공도 예전보다 회전을 더 많이 먹는 것이 느껴졌다. 지난 7년 동안 나를 가르쳐왔던(중간 중간에 쉰 적도 많았지만) 백성찬 코치도 요즘 들어 볼이 강해졌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내심 그 동안 연습을 해 온 것이 이제 좀 성과가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가시적인, 그리고 기대를 뛰어넘는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특히 복식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2대 2, 12대 11로 앞선 상황에서, 내가 상대편 백사이드로 살짝 놓으면서 리시브 한 공을 경희대의 안우성이가 미스를 함으로써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그 순간의 환희는 정말 말로 뭐라 표현하기는 힘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굳이 표현을 해보자면 나를 막고 있던 보이지 않는 장벽 하나가 허물어지는 소리를 들었다고나 할까?


2. 토요일(23일) 오전--황남숙 탁구 교실     

시합에 참가하기로 한 OB들은 [황남숙 탁구교실]에 일단 모여서 몸을 좀 풀고 1시경에 출발하기로 했다. 이지웅과 연습을 하는데, 지웅이가 ‘형, 드라이브 회전량이 많아 졌어요. 예전에는 때리는 느낌이 많았는데.’라고 해 내 기분을 좋게 했다. 지웅이와의 첫 게임은 3대 0으로 쉽게 이겼으나, 두 번째 게임에서는 0대 2로 지다가, 3대 2로 겨우 뒤집었다. 지웅이가 근래 탁구를 안 쳤다고 하지만, 지웅이의 탁구가 많이 올라와 있는 상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고광순(94)은 김기덕(99)과의 연습 경기에서 0대 3으로 완패함으로써, 시합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그게 아니라면 기덕이의 실력이 일취월장 했거나).

독일에서 들어온 이지희(94)도 자리를 같이 하여, 늦게 온 서효기(03)를 마지막으로 하여, 우리는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시합 장소인 홍천으로 향했다.


3. 토요일 오후--홍천 종합 체육관

세 시 20분쯤에 홍천에 도착하여 늦은 식사를 하고 체육관으로 들어서니, YB들은 한참 시합에 여념이 없었다. 탁사의 에이스인 김영우(04)가 8강에서 강남대의 여우인 원세연에게 1대 3으로 아깝게 졌으나, 단체전에서는 남자 A, B, C 및 여자 팀이 모두 본선에 진출했다. OB도 개인 단식부터 진행이 되었는데, 우리 팀은 2부 2명(이지웅, 서효기), 1부 3명(나, 고광순, 김기덕--김기덕은 2부를 신청했으나, 예전에 입상을 했기 때문에 1부로 전격 승격되었다)이었다. 이지웅과 서효기는 이날 승승장구하며 준결승전에서 맞붙기로 되었고, 우리 조와 김기덕 조에는 2명밖에 없어서 자동으로 본선 진출이 확정된 반면, 이한선(경희대), 최수용(강릉대)과 한 조가 된 고광순은 2패를 함으로써 다시 한 번 예선 탈락의 수모를 맛보아야 했다. 나는 남주현(경희대)을 3대 0으로 이겨 조1위로 본선에 진출했고, 김기덕은 배상식(경희대)에게 짐으로서 조2위로 본선에 진출했다.


4. 김성인 교수님

이 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우리 탁사의 지도교수님인 김성인 교수님이 먼길을 마다 않고 직접 시합장까지 오셔서, 우리들을 격려하고 가셨다는 사실이다.

 

5. 남주현 1)승(7) 2)승(14대 12) 3)승(6) (점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음)

경희대 YB에서 올해에 OB로 올라온 남주현은 YB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후배였다. 안우성이 연타에 능하다면, 남주현은 서브에 이은 3구가 일품이었다. 사실 시합 전주 토요일(16일)에 내가 속한 [탁신] 동우회에 경희대 후배들이 놀러왔고, 그 때 나는 안우성과 시합을 해서, 다소 어렵긴 했으나 3대 0으로 이겼고, 또 사람들 말이 안우성이 1장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남주현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이때 남주현은 [탁신] 동우회의 서충신(국민대), 김석태(인하대) 등과 시합을 했는데, 2대 3으로 지긴 했어도, 나 역시 서충신과 김석태에게 지기 때문에 장담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두 사람밖에 없어서 본선 진출은 확정되었기 때문에 조1, 2위만 결정짓는 것이어서 큰 부담은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남주현의 첫 서브를 일단 한 번 안정적인 커트로 받았는데 3구 공격이 완전 대포였다. 주고 지키는 작전을 쓰기에는 그의 공이 너무 강했다. 그래서 나는 2구부터 부지런히 공격을 하는 작전을 썼다. 다행히 주현이의 서브가 그렇게 까다롭지도, 또 아주 짧지도 않아 걸기에 좋았고, 맞드라이브로 갔을 때에는 나에게 부가 더 있었다. 1세트를 어렵지 않게 따내고, 2세트도 10대 6으로 앞서 나가면서 순항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 안정적인 플레이를 지향했기 때문인지, 듀스를 허용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또 두 사람은 박이 터지게 쳤는데, 결국 이 세트도 나에게로 가져오면서 승운은 나에게로 기울었다. 3세트도 수월하게 따내었던 듯하다.

주현이는 공이 좋긴 하지만, 플레이가 고단수는 아니었다. 볼도 깨끗했기 때문에, 스타일 상 내가 그렇게 밀릴 것은 없었다.



5. 토요일 저녁--파레스 모텔과 가든

대절한 버스 운전기사분이 모텔의 위치를 몰라 모텔을 찾는데 다소 애를 먹었다. 하지만 모텔의 방은 널찍하고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시끄럽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OB들은 천천히 샤워를 하고(서효기는 아직도 OB들보다는 YB들과 더 가까운지 그 쪽에 어울렸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맛있는 삼겹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침부터 음식물을 씹을 때 조금씩 아프던 왼쪽 아래 어금니의 통증이 고기 씹는 것을 매우 힘들게 했다. 오른쪽으로만 씹으려니 제대로 씹을 수가 없어서 대충 몇 번 씹고 넘겨야 했다.

내일 시합이 있긴 했지만, 시합이 일찍 정리가 되어 시간도 넉넉했고, 그래서 그런지 후배들의 분위기가 차츰 달아오르고 있었다. 서효기에게 술을 먹이려는 박정주(00)와, 여섯 잔인지 일곱 잔까지만 마시겠다는 서효기. 나는 내일 시합을 위해서는 효기가 술을 덜 마시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효기를 내 옆으로 불렀는데, 아뿔사, 효기 앞자리에는 고광순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신입생부에서 우승을 한 이찬형(09)과 2부 8강에 오른 김수원(05)의 축하 인사가 있었고, 그 다음엔 나를 필두로 OB들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했다. 나는 ‘요 십년 이상  선후배가 합심하여 우리 탁사를 잘 이끌어가고 있는데, 이 전통이 앞으로도 이어지면 좋겠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그러자 요즈음 유행인지, 후배들이 ‘사랑해요, 철현이 형, 철현이 형 없으면 못 살아’라는 말을 율동과 함께 해주었는데, 그게 나를 흐뭇하고 약간 코끝이 찡하게 했다.

후배들을 쭉 둘러보니, 내가 사람들의 이름을 잘 외우는 편은 아닌데도, 성까지는 몰라도 후배들의 이름이 그 순간에는 다 생각이 난 것도 흐뭇했다(사실 한 명은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아서 다른 후배에게 물어 보았다). 그리고, 광순이와 나는 술을 마시면 잘 우는 버릇이 있는 박재영(08)이 오늘 ‘울 것인가 안 울 것인가’를 놓고 내기를 벌였는데, 술이 한 잔 들어간 재영이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으나 울지는 않고 그냥 잠이 든 듯했다.


6. 더 깊은 밤--파레스 모텔 302호

몸도 피곤하고, 술 생각도 많이 나지 않고 해서 1차가 정리된 10시 경에 나는 먼저 방으로 들어왔다. 잠시 들고 간 책을 보다가 일찍 자려고 눈을 감았으나, 이가 자꾸만 쑤시고 방도 덥고, 또 잠자리가 바뀌어서 인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12시가 좀 넘었을까, 술에 취한 광순이가 들어와, 오바이트를 한 판 했고. 그 다음 2시가 다 되어서 김기덕과 이지웅이 들어왔다. 자다가 화장실에 갔다 온 누군가가 누구를 밟고, 으레 있기 마련인 한 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난 다음. 언제인지 모르게 잠이 들었고, 후배들이 8시쯤 깨울 때에는, 좀 더 잤으면 하는 아쉬움에서 이불 속에서 밍기적 거렸다.


7. 일요일(24일) 아침--개인 단식

조 1위로 본선에 올라간 것이 나에게는 좋은 기회를 주었다. 모두 14명이 본선에 진출해 그 중 2명에게 부전승을 주는데, 내가 그 중 한 명이 된 것이었다. 자동으로 8강에 진출해서 한 명만 이기면 4강이었다.


가)8강전--이용주(경희대) 3대 0 1)7 2)8 3)6

이용주는 예선전에서 내가 이긴 남주현과 본선 1회전을 치뤘다. 나는 내심 남주현이 올라오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두 사람이 경기 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며 어떻게 시합을 꾸려나갈까를 구상했다. 첫 세트는 남주현이 따냈으나, 이후 3세트를 이용주가 가볍게 따내 역시나 남주현이 이용주의 노련함에 밀린다는 생각을 했다. 나로서도 이용주는 사실 버거운 상대였다. 같은 [탁신] 동우회 회원인 이용주와는 최근 두 달 사이에 한 번 만날 때 두 번씩 두 번, 도합 네 번 시합을 했는데, 첫 번째 게임에서는 두 번 다 0대 3, 1대 3으로 많이 밀렸고, 두 번째 게임에서는 두 번 다 3대 2로 간신히 이긴 형국이었다. 이 날 시합도 첫 시합이기 때문에 어려울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용주의 연습량이 많지 않고, 길고 빠른 서브에 이은 강력한 3구 스매싱이 주 무기인데, 이 때 리시브를 그의 오른쪽 깊은 곳으로 밀어주면 공격에 미스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공격에서 그의 범실을 최대한으로 유도해 내는 작전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무턱대고 공격적으로 탁구를 치다가는 리시브나 디펜스가 좋은 그의 플레이에 말리기 십상이기 때문에, 최대한 침착성을 유지하자, 이런 정도가 나의 구상이었다.

첫 세트에서 0대 3 정도로 밀리는 상황이 되자 나는 이 시합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어찌된 셈인지, 이후로 내가 점수를 앞서고 있었고, 이용주는 힘겹게 따라오고 있었다. 아마도 이용주의 디펜스가 좋긴 하지만 내 강해진 드라이브 연타를 계속 받아내진 못하고 미스를 범한 것이 내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세트를 다소 수월하게 따내고, 2세트마저도 내가 따내자, 이용주는 3세트에 들어서서는 다소 포기한 기색을 보였다. 이때가 조심해야 할 때였다. 이용주는 포기한 듯이 하면서 상대의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드는 그런 노련함이 있었다. 승리를 어느 정도 확신하면서도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점수 차이를 유지하면서 계속 내 플레이를 펼쳐나갔다.

나의 승리가 확정 되는 순간, 그 동안의 개인전 성적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면서, 내 입가엔 미소가 흘렀다.


나)4강전--이섭(강릉대) 2대 3 1)승(14대 12) 2)패(5) 3)승(9) 4)패(7) 5)패(6)

강릉대의 이섭은 오목대 전형으로, 플레이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워낙 볼을 잘 다루고 스매싱이나 디펜스가 좋아 아주 튼실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나는 그 동안 드라이브의 회전력이 약해서 오목대를 만나면 쥐약이었다. 그래서, 나는 얼마 전에는 오목대 전형으로 국가대표 출신인 지용옥 코치님에게 몇 달간 오목대에 대비해 레슨을 받기까지 했다.

첫 세트를 10대 6으론가 앞서다가 듀스를 허용하긴 했으나 그 세트를 잡아내면서 나는 그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것이 큰 오산이었던 듯하다. 2세트는 가볍게 내주고, 3세트를 또 좀 어렵게 따내면서, 승기가 내 쪽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했다. 그런데, 이섭은 세트를 이어나가면서 나의 플레이 패턴을 좀 더 잘 읽어내고, 또 공도 더 강하게 치고, 서브도 조금씩 날카로워 진 반면, 나는 더 내놓을 카드가 별로 없었다. 기왕지사 밀릴 것이면 좀 더 과감하게 플레이를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내 포핸드 드라이브가 그의 스매싱에 두어 번 역습을 당하고서는 기가 꺾인 것이 사실이었다. 마지막 세트 6대 10으로 뒤진 상황에서 나의 너클 서브를 그는 교묘하게 오른쪽으로 뺐고, 공은 내 라켓에 빗맞으며 게임은 끝을 맺었다. (치통이 이날 내내 나를 괴롭혔지만, 막상 시합을 하는 동안에는 그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인지, 통증을 잊고 시합을 했다.)

아쉬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3위라는 성적에 만족해야 했다. 그 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


   

8. 일요일 오후--단체전

OB 단체전은 4개 대학에서 다섯 팀이 참가하여, A, B 두 조로 나눈 다음 각조 1, 2위가, 크로스로 토너먼트를 하는 방식을 취했다. 우리 학교와 경희대 A가 한 조였고, 강릉대, 경희대 B, 방통대가 또 한 조를 이루었다. 용인대는 OB가 세 명밖에 없어서 YB를 한 명 차출하여 시합을 뛰게 해달라고 했는데, 우리가 원칙대로 안 된다고 했다가, 주최측에서 참가 학교가 적으니까 대승적인 차원에서 뛰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오케이를 했다. 그런데, 용인대 자체에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결국 참가를 하지 않았다.


가)예선전--경희대 A

경희대 A는 경희대 B가 강릉대에게 패해 조2위가 되자, 준결승전에서 자기 학교와 맞붙기가 싫다며, 우리 학교에 져주는 작전을 썼다. 우리로서야 반대할 수도 반대할 것도 없는데다,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터라 그냥 경희대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그만큼 자신의 전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나온 작전이었지만, 결국 경희대 A는 준결승전에서 강릉대에게 2대 3으로 패하고 말았다.

3번으로 나간 나는 김병규와 붙었는데, 그가 최선을 다했는지는 모르겠지만, 3대 1로 이겨서, 지난 [유승민 배]에서의 패배를 설욕을 하기는 했다. 김기덕도 이용주를 이기고, 이날 시합장에 온 유호상(86) 씨가 단체전 멤버로 뛰어서 이한선을 이겼다.

어쨌거나 우리는 경희대를 3대 2로 이겨서, 조 1위로 준결승전을 하게 되었다.


나)준결승전--경희대 B

(대진-김기덕 : 안우성/ 고광순 : 김양현/ 길철현 : 이강래/ 이지웅:박우현/ 서효기 : 남주현) 

경희대 B에도 안우성과 남주현이 포진하고 있어서 그렇게 쉽지는 않은 상대였으나, 우리로서 다행스러운 것은 탁구를 꽤 치는 김현이 어제 개인전만 하고 돌아간 것이었다. 안우성과 남주현에게 2점을 내준다고 해도, 나머지 3점은 우리가 따낼 수 있을 듯했다.

오더는 경희대에 다소 유리하게 나왔다. 안우성과 남주현이 1번과 5번으로 나와 나와의 정면 대결을 피한 다음, 각각 김기덕과 서효기를 이겨 2점을 따냈다.

반면에, 3번으로 나간 나는 제일 약체인 이강래와 맞붙게 되었다(이용주가 내가 3번을 나갈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내가 예선전 그대로 나가는 바람에 그 예측이 맞게 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합 진행 상황을 보면서, 또 강래의 회전이 많이 들어간 서브에 약간은 고전을 하면서, 3대 1로 이겼다. 4번 단식에서는 이지웅과 박우현이 만났는데, 개인전에서 지웅이가 이긴 상대였기 때문에 어렵지 않을 듯했다. 예상대로 이지웅은 상대를 3대 1로 이겼다.

관건은 2번 단식이었다. 고광순이 맞붙게 된 상대는 잘 보지 못한 후배(김양현)였는데, 그렇게 쉽지는 않을 듯했다. 하지만 광순이가 그의 스매싱을 몇 개 막아내고, 게임을 침착하게 이끌고 나가 역시 3대 1로 승리를 거두었다. (광순이가 복식을 하면서 실력이 차츰 올라와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3대 2로 우리 팀이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다)결승전--강릉대

(이지웅 : 박태순/ 고광순 : 이섭/ 서효기 : 이봉섭/ 길철현 : 최수용/ 김기덕 : 최규철)

강릉대는 개인전에서 배상식을 꺾고 우승을 한 이섭, 그리고 3위를 한 이봉섭 등이 강이라고 할 수 있고, 예선전에서 고광순을 꺾은 최수용도 만만치 않은 상대이고, 그리고 2부에서 준우승을 한 최규철도 무시할 수 없었다. 박태순만 좀 약체라고나 해야 할까? 지금 이렇게 상대방의 전력을 다시 분석해 보니 우리가 좀 밀린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도 오더를 잘 짰더라면 어떻게 이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4번으로 나간 나는 최수용을 2대 0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예상 했던대로 고광순과 서효기가 각각 이섭과 이봉섭에게 져 버리고, 믿었던 김기덕마저 최규철에게 0대 3으로 지는 바람에 우리는 0대 3으로 결승전을 내 주어야 했다. 나중에 들은 바에 따르면 김기덕의 오목대가 최규철에게 통하지 않은 것은, 최규철이 역시 오목대인 이섭과 늘 훈련을 같이 해서라고 했다. 이때 이지웅마저 약체인 박태순에게 1대 2로 밀리고 있었다.

만일 이지웅과 김기덕이 오더를 바꿔 나갔더라면, 그리고 내가 뒤로 빠지지 않고, 이섭이든 이봉섭이든 맞붙었더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이미 지난 일을 이러쿵저러쿵 해봐야 무슨 큰 소득이 있을까?


9. 일요일 오후-개인복식

고광순과 한 조가 되어 치른 개인 복식에서의 우승은 전혀 예상치 않은 성적이라 더욱 기쁘다. 그리고, 우승을 향한 향해가 지속적인 난파 위기를 거듭 이겨낸 것이라 더욱 더 기억에 생생하다.


가) 예선전

A. 신준기, 무명 씨(방통대) 3대 1 1)패 2)승 3)승(9) 4)승

신준기 관장은 나정도 탁구를 치지만, 그의 파트너는 그다지 잘 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이길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신준기의 파트너는 시합에 들어와서 몇 번이나 인사를 하는 바람에 우리를 웃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시합이 시작되자 광순이가 신준기의 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계속 실수를 하고 나도 몇 번 범실을 하는 바람에 첫 세트를 내주고 말았다. 둘째 세트는 광순이와 나의 호흡이 맞아 어렵지 않게 따냈다. 셋째 세트에서는 두 사람이 힘이 들어간 채로 각자 플레이를 하느라고 3대 8로 밀리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약체인 방통대에게도 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를 감쌌다. 광순이와 나는 힘을 빼고 랠리 위주의 플레이를 하기로 했다. (무명 씨의 서브는 분명 커트가 많이 들어간 것 같은데 받아보면 완전 너클이라 미스가 나고 말았다. 그가 고도의 서브를 구사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실력이 강한 커트를 넣지 못해서 그런 것인데, 힘이 들어가서 계속 미스를 범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는 한 점도 주지 않고 8대 8 동점을 만든 뒤, 11대 9로 이 세트를 끝내고, 그 다음 세트도 어렵지 않게 따냈다. 무리를 할 필요 없이 이 무명 씨의 미스를 유도해 내면 되는데, 왜 그렇게 쳤는지 모르겠다.


B. 김병규, 이한선(경희대) 3대 1 1)패 2)승 3)승 4)승

이 시합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김병규와 이한선 조는 대학 시합에서 복식 2연패를 한 강팀이었기 때문에, 이긴다는 생각보다는 편안하게 치자는 기분으로 임했던 듯하다. 그런데, 두 사람은 새벽 다섯 시까지 술을 마신데다가, 이한선은 팔이 아픈 증상이 재발해서 제대로 게임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게임을 편하게 이끌어 나간데 반해 두 사람은 서로 범실이 많았다. 김병규는 자신의 주득점원인 백핸드에서, 이한선은 원래 미스가 많은 드라이브에서 범실을 많이 해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승리를 얻어냈다.

예선전은 이렇게 쉽게 통과했지만, 본선은 모두 가시밭길이었다.


나. 8강전 장태진, 길병욱(용인대) 3대 2 1)패(16) 2)패 3)승 4)승 5)승(14)

조1위로 본선에 진출해, 1회전은 부전승이었고, 곧바로 8강이었다.

용인대는 장태진이 요즈음 떠오르는 샛별인 반면 파트너인 길병욱은 그저 그만한 실력이었다. 10대 6으로 앞설 때만 해도 첫 세트를 쉽게 따는가 했다. 고광순이 그 고질적인 서브 미스를 하더니만, 점수는 어느 결에 듀스가 되고 말았다. 이 뒤로 한 없이 이어진 듀스 게임, 결국 우리 팀의 범실로 16대 18로 내어주고 말았다. (이와 똑같은 상황이 결승에서도 연출되었다. 8강전은 진행 상황이 여러모로 결승과 닮음꼴이다.)

장태진의 서브는 포핸드 역회전 긴 서브였는데, 공격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첫 세트에서는 광순이가 이 서브를 탔고, 두 번째 세트에서 나는 이 서브를 더 타, 2세트도 내어주고 나니 패색이 짙었다. 세 번째 세트는 우리가 좀 쉽게 따낸 듯하고(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네 번째 세트에서 나는 장태진의 서브를 드라이브로 공격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커트 먹은 것은 쳐올리고, 오시 공은 눌러서 받아 주었다. 장태진의 파트너가 썩 잘 치지는 못했기 때문에 3구를 강하게 공격하지 못했고, 랠리에 들어가서는 우리가 다소 유리했다. 왼손잡이인 장태진은 자신의 몸 쪽으로 오는 공을 전광석화처럼 돌면서 드라이브 공격하는 능력이 탁월해, 리시브를 조금만 밋밋하게 했다가는 그대로 두들겨 맞는 그런 격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 팀에서는 광순이의 랠리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데 반해, 길병욱은 게임이 진행될수록 범실이 많아졌다. 그래도 마지막 세트에서는 또 접전을 벌여, 듀스를 몇 번 왔다 갔다 한 끝에 승리가 우리 쪽으로 왔다. 


다. 준결승전 이섭, 최수용(강릉대) 3대 2  1)승 2)패 3)패 4)승(12) 5)승

이상하게도 이 시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흐릿한 대로, 또 부정확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글을 전개해 나가도록 하겠다. 이섭과 최수용, 두 사람 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기 때문에, 이 게임은 더욱 어렵게 전개될 양상이었다.

첫 세트는 우리가 다소 쉽게 따낸 듯하다. 이섭은 단식에서와 마찬가지로 게임을 쉽게 쉽게 만들어나갔고, 최수용은 백핸드에서 만들어 내는 능력은 뛰어났으나, 포핸드가 그다지 위력이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예상과는 달리 게임이 쉽게 풀릴 듯했다. 그러나, 2세트부터 게임의 무게중심은 강릉대 쪽으로 넘어갔다. 우리 두 사람의 호흡이 맞지 않고, 또 광순이가 범실을 몇 개 하자 나도 힘이 들어가면서 공을 세게 치려고 하다가 덩달아 범실을 했다. 2세트와 3세트를 내주고 4세트도 1대 5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이 부분의 기억이 제일 불확실하다. 사실은 3세트에 그랬던 듯한데). 우리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연타로 게임을 이끌어 나가기로 서로를 격려하였고, 그래서 10대 9까지 따라 잡았다. 연습량이 많은 내가 이 순간에 뭔가 하나를 해주어야 할 듯했고, 그래서 내 몸 쪽으로 온 공을 다소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는데, 네트를 스치면서 상대 코트에 꽂혀 듀스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듀스 상황에서는 최수용의 범실을 유도해 이 힘겨운 세트를 따냈다. 5세트는 어렵지 않게 따낸 듯하다. 드디어 결승 진출이었다.


라. 결승전 안우성, 남주현(경희대) 3대 2 1)패(16대 18) 2)패(6) 3)승(8) 4)승 5)승(13대 11) 

경희대 쪽에서는 복식을 먼저 하자고 했으나, 우리는 먼저 강릉대와의 단체전을 하고 복식을 하겠다고 했다. (떨어지지 않고 남아서 이 시합도 뛰고 저 시합도 뛰어야 하는 상황도 예전에는 경험하기 힘들었던 그런 것이었다.) 다른 모든 시합이 끝나고 대회의 마지막 시합이라, 다른 테이블은 다 치우고, 한 대만 두고 또 그 둘레에 펜스를 쳐서, 정말 결승을 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정말 예상치 않게, 그러면서도 힘겹게 힘겹게 결승에 올랐다. 하지만 기왕지사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나아가보고 싶었다.

남주현과 안우성(둘 다 셰이커 전형)은 YB 때부터 복식조를 맞춰 온 터라 호흡이 잘 맞는 듯했다. 그렇게 따지면 광순이와 나도 오래 호흡을 맞춰왔다. 광순이의 탁구가 줄기 전인 97년도 전국 대회에서는 복식에서 3위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우리가 복식에서 이긴 것보다 진 것이 더 많았다. 광순이가 그 동안 탁구를 치지 않아 지속적으로 실력이 줄었지만, 이 날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광순이가 점점 더 자신감을 회복해 나가고 그래서 범실이 줄고, 강타의 성공 확률도 높아가고 있었다. 어쨌거나, 남주현과 안우성이 객관적으로 우리보다 실력이 낫다고 할 근거도 없었다.

첫 세트는 순조롭게 나아갔다. 남주현의 공격이 들어오면 강하긴 했지만, 대신에 미스도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10대 6으로 앞섰다. 그런데, 이 때 우리 서브에서 고광순이 또 서비스 미스를 하고 그러면서 다시 듀스가 되고, 8강전과 마찬가지로 또 끝없이 이어지는 시소 끝에 랠리에서 이번에는 내가 범실을 하는 바람에(그랬나?) 첫 세트를 내주고 말았다. 결과론적으로 8강전처럼 첫 세트를 내어 준 것이 우리에게 더 짜릿한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쉽게 풀어갈 수 있는 게임을 어렵게 몰고 간 면이 더 컸다. 2세트에서는 별로 힘을 못 쓰고 내주는 바람에 한 순간 ‘여기까지가 나의 혹은 우리의 한계이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후배들의 응원하는 목소리도 차츰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3세트 초반까지 계속 되었다. 경희대의 이용주가 자기 후배들을 가리키며 ‘잘 한다 잘 한다 하니까, 정말 잘 하네’라고 하면서 우리의 사기를 더욱 꺾었다.

그러나, 그대로 무너질 순 없었다. 질 때 지더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했다. 이때 방통대의 신준기가 ‘3세트와 같은 조합에서는 두 사람이 무리를 하지 않고 침착하게 치면 부가 있는데, 지금 두 사람이 서로 무리를 하고 있다’라는 지적을 해주었고, 나한테도 ‘내가 무리하게 포핸드로 돌아서서 공격을 한다고 해도 남주현이나 안우성의 디펜스를 뚫을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일단 내 백핸드 드라이브가 약하긴 하지만, 좌우로 갈라준 다음 랠리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묘안이 떠올랐다. 이 두 작전은 시합이 끝날 때까지 먹혀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3세트와 4세트를 비교적 쉽게 따내고, 5세트에서도 우리는 원 사이드하게 앞서 나갔다. 한 점 한 점 우리가 앞서 나가자, 급해진 남주현이 무리하게 공격을 하다가 계속 범실을 했다. 8대 2. 승운은 우리 쪽으로 정말 8대 2정도로 넘어 온 듯했다. 나는 이때 다른 모든 것은 잊고 오직 볼에만 집중을 했다. 광순이는 이때 특유의 재치를 발휘하여 박자를 뺏는 리시브로 남주현의 범실을 많이 유도해 내고, 공격도 멋있는 것을 몇 개 성공시켰다.

하지만, 게임은 그대로 쉽게 끝나지 않았다. 막판에 몰린 안우성과 남주현은 악착 같이 공격을 하고, 공을 살려냈으며, 우리 플레이는 다소 소극적으로 되었다. 그래서 점수 차는 점점 좁혀져 10대 8이 되었다. 남주현이 넣은 서브를 내가 상대방 백핸드로 넘기자, 안우성이 미스 없이 그대로 3구 공격. 10대 9. 남주현은 마지막 서브를 그때까지보다 훨씬 강한 커트 서브를 넣었고, 그 커트의 강도를 이겨내지 못한 내 리시브는 네트에 걸리고 말았다. 10대 10 듀스. 이후 한 점씩 사이좋게 나눠가져서 11대 11. 그 다음 우리가 다시 한 포인트를 더 따냈는데, 이때는 내 드라이브가 약간 꺾이면서 안우성이가 다소 밋밋하게 넘긴 것을 고광순이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자, 남주현이 미스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맞나?). 12대 11. 마지막 남주현의 서브를 나는 이번에도 안우성의 백핸드 사이드로 넘겼는데, 최대한 공을 죽여서 깔려가도록 리시브를 했다. 이 공을 안우성이 미스를 했다.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기쁨이 내 몸을 타고 흘렀다. 나는 몸을 돌려 광순이를 포옹했다. 정말 맛보기 힘든 희열의 순간이었다.

길영주(05)인가가 와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라는 말을 했다. 보는 사람에게도 멋진 한판이었던 듯하다.

후배들은 엘리제를 부르고, 나는 옷을 입으면서 그 기쁨을 함께 만끽했다.


10. 일요일 저녁--돌아오는 길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차가 막혀서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광순이와 나는 입에 웃음을 흘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함께 탄 유호상 씨는 자주 OB 모임을 갖자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안암 로터리에 있는 [박가부대]에서 부대찌개를 먹고, 우리는 헤어졌다. 기분 같아서는 더 술을 마실 것도 같았는데, 모두들 이틀간의 장정에 지쳤는지, 분위기가 대체로 차분했다.


11. 나가는 말

요번 시합의 성과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종합적으로 합쳐져서 나타난 것이긴 하나, 그 동안의 탁구에 대한 나의 열정이 가시적으로 보답을 준 듯해서 흐뭇하다. 지나치게 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 내지는 자기 비난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그냥 기뻐하고 싶고, 탁사 선후배님들도 이 기쁨을 같이 나누어 가졌으면 하고 바란다. 탁사 활동을 한 지도 벌써 20년이 되었다. 20년을 함께 해 온 동아리라면, 기쁨을 함께 하고, 허물은 감싸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그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더욱 절감한다. 탁구를 잘 치고 싶다, 열심히 치고 싶다, 는 20대 때의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시합을 앞두고 훈련에 여념이 없던 YB 후배들이 사랑스럽다. 또, 졸업을 하고 직장 및 가정생활로 바쁜 와중에도 탁사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우리 고대 탁사 OB들이 자랑스럽다.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다 같이 합심해서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 그것이 아름답다.


(여기까지 다 읽은 사람은 그 인내력에 칭찬을 보내드리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