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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 이야기

나의 탁구 이력 1

by 길철현 2016. 4. 8.

 

이 글을 쓴 것이 벌써 22년 전이다. 그 뒤로 나의 탁구 이력을 정리해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자료의 정리나 그 동안의 긴 시간 등으로 인해 일관성 있게 글을 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만간에 재도전 해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어쨌거나 지금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몸만 어느 정도 따라준다면, 탁구는 나의 동반자이자 제일의 취미 생활이라는 것.

(첫 번째)나의 탁구 이력.hwp

 

 

 

나의 탁구 이력

 

(이 글은 946월경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삽입>이라고 쓴 뒤 부가 설명을 한 것은 이 글을 쓸 당시의 것이고, <보충>이라고 쓴 것은 이번에 이 글을 다시 작성하면서 덧붙인 것이다. 될 수 있으면 원래 문장을 그대로 살리려고 애썼으며, 다만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손을 보았다.)

 

 

 

 

(자연의 모든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서정적이요,

그 운명에 있어서는 비극적이고, 그 존재에 있어서는 희극적이다

                                      조지 산타야나)                      

 

Everything in nature is lyrical in its essence:

tragic in its fate, and comic in its existence.

--George Santayana

 

죽고 싶었다. 그러나, 용기가 없었다. H에 대한 나의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한 여인을 사랑함으로써, 비록 그것이 보답 받지 못할 지라도, 보편적인 사랑에 이를 수 있다는 거대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나의 순진함이었고, 한편으로는 어리석음이었다. 나는 무참히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죽을 수 없다면 도피처가 필요했다. 나의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할 곳이 필요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탁구가 나의 도피처였다.

 

탁구는 농구와 함께 내가 제일 좋아하던 운동이었다. 국민학교 오 학년 때인가 처음으로 라켓을 잡은 이래 탁구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중학교 때에는 방효준, 이종찬과 주로 탁구를 쳤다. 효준이는 중학교 삼 년 내내 같은 반이어서 쉽게 어울릴 수가 있었다. 그는 나와 실력이 비슷했다. 내 기억으로는 내가 게임에서 약간 앞섰던 것 같은데, 그는 또 자기가 앞섰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종찬이는 우리보다 실력이 좀 떨어져 5점을 접어주고 시합했다(보충: 이 당시는 11점 게임인 지금과는 달리 21점 게임이었고, 서브도 2개씩이 아니라, 5개씩 넣었다). 종찬이는 카운트를 제대로 못해 우리에게 타박을 많이 받았고, 또 우리랑 탁구 치러 가느라고 청소를 빼먹은 적이 많아 이 학년 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도망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윤인섭이라는 애가 나의 탁구 파트너였다. 그는 드라이브 전형이었고, 나는 어설픈 수비수였다. 실력은 그가 한 수 위였으나 게임 전적은 내가 앞섰다. 우리는 학교 뒤에 있는 허름한 탁구장에서 주로 시합을 했는데, 이 때 게임비는 한 시간에 육백 원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에는 손님이 없으면 우리가 치고 싶은 만큼, 때로는 두 시간 넘게 치고도 한 시간 값만 내면 되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탁구만큼은 누구에게도 잘 지지 않는다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생각을 머릿속에 넣어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내가 탁구를 친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고, 내가 다닌 탁구장이라는 것도 동네의 탁구장들이었기 때문에 탁구를 잘 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이러한 나의 어리석음에 최초의 일침을 놓아 준 사람이 고등학교 동문선배인 정순교 형이었다. 1학년 2학기 때 나는 형이 있는 하숙집으로 옮겨 갔다. 자만심에 가득 차 있던 나는 탁구를 치러가기 전에 오만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결과는 어처구니없는 패배였다. 10점을 넘기가 힘들었다. 최초의 개안이었다.

군대에 갈 때까지는 탁구와 관련해 별달리 이야기 할 게 없다. 그 동안에도 탁구를 치긴 했지만, 친구들과 재미로 치는 수준을 벗어나진 못했다. 부대에서 나는 여러 명의 적수를 만났는데, 그렇게 적수가 많았던 것은 나의 실력이 별 볼일 없는 수준이었다는 것의 반증이었다. 특히 나와 같이 약국에서 일했던 고참 박경운 병장(그는 국민학교 때 선수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은 드라이브가 일품이었다. 처음 몇 번의 시합에서는 내가 이기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박병장이 3개를 접어주고 쳤다. 그의 강한 드라이브를 어떻게 받아내야 할 지 몰라서, 다시 말해 쇼트로 수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렇게 강하게 걸면 어떻게 받아요?”하고 신경질 비슷한 반응을 보인 기억도 난다.

그리고 부대에 있는 동안 공식적인 시합(부대 내 시합)에 처음으로 출전했다. 원래 박병장이 나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시합 날 약속이 있어서 내가 대신 나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 탁구는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있다면 스매싱이 좀 강했다고나 할까). 다시 말해 나의 미스를 줄이고, 상대방의 미스를 유도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강한 공격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이 날 나는 일회전에서 12로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무채색이었던 부대 생활에 하나의 활력소가 된 일이었다.

졸병 중에서는 외대 다니다가 온 오용근이 나보다 기량이 나았다. 셰이크 전형인 그는 나의 강 스매싱(?)을 기막히게 막아냈다.

89년도에 제대를 한 뒤, 동문선배인 순교 형과 다시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순교 형은 나에게 7개를 접어주고 시합을 했다.

 

이즈음에 나는 (과 후배인) H에게 어쭙잖은 사랑을 고백하였고, 그녀에겐 벌써 사귀는 사람이 있었다(없었다 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주변을 살필 눈이 있었더라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길로 세상은 빛을 잃어버렸다.

수렁 속에서 허우적대던 나날. 탁구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탁구를 치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다. 2학기(90) 때 휴학을 하고부터는 탁구를 치는 것이 중요한 하루 일과가 되었다. 하지만 이때도 게임의 범위를 벗어나진 못했다. 순교 형이 명목상이긴 했으나 취직 준비로 바빴기 때문에, 상대는 주로 과 친구인 김대중, 과 선배이자 대학원에 다니던 정상화 형이었다. 또 당시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었고 상화 형과 자주 탁구를 치던 최영식 형과도 가끔씩 시합을 했다. 영식 형은 실력이 순교 형과 비슷했다.

이때의 나의 구장은 안암동 로터리에 있는 [참피온 탁구장]이었다. 실력이 조금씩 늘어감에 따라 상대로 점점 다양해 졌다. 우선 주인아저씨(문병권)와도 시합을 하게 되었다. 이 당시 주인아저씨는 학교 주변에서 최고수였다. 지금 와서 보면 아저씨의 탁구는 아무런 특색이 없는 구력에 밑바탕을 둔 것에 불과하지만(백 푸시가 일품이긴 했다. 그러나 이것도 파워가 없어서 실력이 있는 사람에겐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게임 운영 능력은 대단했다. 아저씨는 나에게 열 개 정도 잡아주고 시합을 했다. 이 알수를 줄여내려 온 것이 내 탁구 이력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이 시합 방식에 좀 설명을 덧붙이자면 매시합의 결과에 따라 접어주는 점수를 조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0점을 접고 시합을 할 경우 내가 이기면 다음 판에는 9점을 접고, 지면 11점을 접는다. 일종의 핸디라고 할 수 있는데, 아저씨는 이것을 고무줄 시합이라 했다.

이 형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원래부터 악착같은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주변에서 탁구에 대한 열정이 나를 능가했던 사람이 있다면, 바로 강신욱 형이다. 탁구 라켓을 잡은 지가 일 년도 채 안 된다고 했는데 실력이 나와 비슷했다. 이 밖에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83학번 형들, 황병국 형과 또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마른 형도 실력이 괜찮았다. 그런데 병국 형이 몸집이 좋았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별명은 뚱뚱이와 홀쭉이였다.

겨울방학 때는 카운터를 보던 박광석 씨와 많이 쳤다. 그는 나보다 5알정도 위였는데, 특히 수비하다가 안 되면 공격을 맞받아치는 재주가 있었다.

91년도부터는 경기 결과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주로 승패만 적은 것이었지만, 때로는 패인이나 경기 운영에 대한 짤막한 코멘트를 덧붙이기도 했다. (흥미롭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 글 끝부분에 정리해 보았다.)

이런 가운데 나의 탁구 발전에 큰 계기가 된 일이 일어났다. 바로 신용훈 선생님과의 만남이었다. 신 선생님은 914월부터 [참피온 탁구장]에서 카운터를 맡았다. 탁구를 많이 치긴 했어도, 게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 기본기가 엉망이었다. 탁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포핸드마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신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해, 훈련의 중요성과 자신이 전형을 갖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먼저 포핸드 랠리부터 연습했다. 미스를 하지 않고 계속 넘기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기본기가 엉망이긴 했지만 그 중 좀 나았던 것이 스매싱이어서 신 선생님은 나를, 스매싱을 주무기로 한 전진 속공수로 만들려 했다.

주로 탁구를 치던 [참피온 탁구장] 옆에는 [아테네 탁구장]이 있는데, 주인은 같았다. 이 탁구장에도 신 선생님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새로 카운터가 왔다. 한일 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온 미스 민 아줌마(결혼을 한 분인데도 주인아저씨는 미스 민이라고만 불렀고, 나는 적당한 호칭이 생각이 안 나 아줌마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런 이상한 명칭을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보충 - 이 분의 정확한 이름은 민인자이다)였는데, 이 분과의 시합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신 선생님과 연습을 계속하면서, 나는 학교에서 제일 고수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과도 시합을 하게 되었다. 정외과인지 신방과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75학번 유박사, 법대 88학번 윤재현 형(이 형은 학번은 나보다 3학번 아래지만, 나이는 세 살이나 많았다). 영교과 86학번 채우철 등이었는데 이들의 실력은 나보다 5알정도 위였다. 식품공학과 86학번 김영훈은 나보다 실력은 조금 나았지만, 게임은 별 차이가 없었다. 재현 형과의 만남은 나를 학교 내 탁구 동아리인 <탁구 사랑회>로 이끈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하나씩은 다 자기 특기가 있었고, 특히 드라이브는 어느 정도 구사하는 실력이었다(나는 이때까지 드라이브를 거의 걸지 못했다). 유박사는 오시성(전진회전성) 서브를 이용한 3구 공격이 뛰어났고, 윤재현 형은 드라이브가 위력적이었다. 채우철은 백을 좌우로 잘 갈랐다.

91년 여름방학 동안 매일 한 시간 이상씩, 신 선생님으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포핸드와 백핸드 연타 연습을 주로 했고, 스매싱 연습에 조금씩 중점을 두어 나갔다. 그 무더운 여름 날 아저씨는 무엇 때문에 아무 보수도 생기지 않는 일을 했을까? 카운터를 보려면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나같이 속 좁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이때 나의 목표는 총장배 교내경기에 출전하여 4강안에 드는 것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윤재현 형이 탁구를 좋아하고 또 어느 정도 치는 사람들끼리 정기적으로 모여 칠 수 있는 소규모 모임을 제안했는데, 강신욱 형은 이 모임의 규모를 확대해서 학교의 탁구 동아리인 <탁구 사랑회>와 연계시켰다. 모임의 명칭은 <OB 탁구 사랑회>로 정했는데, 그것은 구성원 대부분이 졸업을 했거나 졸업을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졸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OB 탁구 사랑회>에 가입을 함과 동시에 <탁구 사랑회>의 일원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어떤 모임에서든 모임의 정식 일원이 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특히 나처럼 위치가 어중간한 사람에게는 그런 어려움이 배가 된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탁구에 대한 열정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었다.

어쨌거나 <OB 탁구 사랑회>의 결성이 진행되는 가운데(전적으로 강신욱 형이 애쓴 덕택이지만) 나는 <탁구 사랑회>의 후배들과 <아테네 탁구장>(<탁구 사랑회> 후배들은 여기서 훈련을 했다)에서 몇 번 탁구를 쳤다. 첫 번째 시합에서, 당시 <탁구 사랑회>에서 실력이 제일 좋았던 87학번의 채홍남과 90학번의 손창섭을 이긴 것이 기억에 남는다.

드디어 총장배 교내대회였다. 그 동안의 훈련 성과를 점검할 최초의 기회였다. 선생님은 무리한 공격을 자제하고, 특히 백은 커트로 처리하라고 주문했다. 사실 이 당시의 나의 탁구는 3구 공격보다는 서브와 강한 커트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공격력이 좋은 상대(예를 들면 윤재현 형)를 만나면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4강 진입이 나의 목표였으나, 대진운이 억세게 나빴다. 1학기에 우승했을 뿐만 아니라 소년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박진석이 나와 같은 예선조였다. 작년 2학기에 우승한 김영훈도, 박진석과의 시합에서는 10점도 못 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를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었다. 김영훈은 출전 신청은 해 놓았지만, 시험 때문에 못 나올 거라고 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예선을 어떻게 통과하는가가 문제였다. 시합 시간이 다 되어도 박진석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시계만 쳐다보았다.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일이 순조로왔다(물론 실력을 전혀 알 수 없는 낯선 상대와의 첫 게임. 그 때의 긴장감을 잊을 순 없다). 본선에서도 다소 거북한 상대인 강신욱 형, 채홍남, 손창섭이 나와는 반대편이어서, 결승전까지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올라왔다. 이날 있었던 이변이라면, 손창섭이 강신욱 형을 꺾고, 평소에 지던 상대인 채홍남마저 이겨버린 일이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두 번째 세트(손창섭이 첫 세트는 졌다)에서 1219로 뒤지고 있던 손창섭이 순전히 공격으로 그 세트를 다시 뒤집은 일이다. 셋째 세트는 쉽게 손창섭이 땄다. 이때 나는 과감하게 공격하는 것이 전체적인 탁구 발전을 놓고 볼 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걸 직감했다(보충: 지금 생각은 또 그렇지도 않다). 그렇긴 하지만 위의 세 명 중에는 손창섭이 나에겐 제일 손쉬운 상대였다. 왜냐하면 그의 공격력이 나의 안정된 플레이를 무너뜨릴 수준은 아니었고, 홍남이가 수비에 비해 공격이 뒷받침이 되지 않은 반면, 나에게는 스매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승전에서 나는 별 어려움 없이 20으로 손창섭을 꺾었다.

우승했을 때의 기쁨은 바로 성취감 그것이었다. 물론 미스 민 아줌마가 나중에 잘 치는 사람은 아무도 안 나와서 우승한 것이라고 일침을 놓긴 했지만. 사실 우승은 나의 실력을 생각해 보면 시기상조였는지도 모른다. 애당초 목표인 4강을 뛰어넘어 곧바로 우승이란 고지에 도달하고 말았으니까.

총장배 교내 경기가 있고 난 직후에, <OB 탁구 사랑회>가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회장은 강신욱 형이, 부회장은 김영훈이 맡았다. 이 모임은 애초의 윤재현 형의 의도와는 달리 규모가 너무 컸고,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에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강신욱 형의 의도는 좋았으나, 그것을 뒷받침해 줄 지지기반이 약했다. 또 정기모임을 새로 생긴 <엘리트 탁구장>(강신욱 형은 정기 모임 시 탁구비를 할인해 주겠다는 언질을 받아낸 모양이었다)에서 갖기로 해 생긴, 탁구장 주인아저씨와 강신욱 형과의 불화는 단순한 다툼의 도를 넘어섰었다.

그렇긴 하지만 강신욱 형의 노력으로 국민대 탁구부원들과 시합을 가진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51복으로 시합을 했는데, 모두 지고 단식 1게임만 땄다. 당시 일장이었던 윤재현 형도 국민대의 일장인 서충신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그는 제2회 경인지구 대학탁구 동호인 대회에서 2위를 한 경력이 있는 고수였다. 1세트는 재현 형이 겨우 8점인가를 땄을 뿐이었다. 나는 3장으로 나갔는데, 변변한 공격 한 번 못해보고 국민대의 3장인 이명덕에게 깨어지고 말았다. 이 시합은 나의 실력이 대학 동아리에서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선생님은 나를 전진속공형으로 만들기 위해 계속 스매싱 연습을 시켰다. 선생님의 독특한 주장은 공을 굴려서 치라는 것이었는데, 지금까지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타법상 드라이브와 보통 스매싱의 중간 형태인데, 커트된 공은 받쳐서 친다는 기본적인 면이 무시된 점이 없지 않다. 선생님의 주장은 그 분의 타구에 대한 이해의 한계였거나, 아니면 독창적인 이론 둘 중의 하나인데, 아직 미제로 남아있다(보충: 일명 드매싱이라고 해야 할 이 타법은 많이 깎이지 않은 공에서는 위력적일 수가 있으나, 많이 깎인 공은 역시 받쳐서 치는 것이 안정적이라는 것이 지금의 생각이다).

선생님과의 훈련, 주인아저씨, 윤재현 형, 유박사, 김영훈 등과의 시합, <탁구 사랑회> 부원들과의 연습을 하는 가운데, 겨울방학은 슬그머니 지나가고 있었고, 나에게 있어서 최초의 무대 출연(?)과도 같았던 제3회 경인지역 대학생 탁구 동우회 시합(92124)이 서강대에서 열렸다.

선생님은 미숙한 나를 끌어올리려고 무던히 애를 썼고, 나도 첫 출전인 만큼 좋은 성적을 올리자는 생각에 하루 2시간의 강행군을 이를 악물고 받아냈다. 겨우 2시간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2시간 중에서 1시간가량을 스매싱만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 선생님은 쇼트를 귀신같이 대었다. 언젠가 하루는 훈련을 마치고 나오는데, 하늘이 팽 도는 게 쓰러질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우물에서 숭늉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모든 일에는 거쳐야 할 필수적인 단계가 있었다. 이 당시 나에겐 너무나 부족한 게 많았기 때문에, 애당초 좋은 성적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시합은 끝없는 기다림이었다. 9시 좀 넘어서 도착했는데, 오후 4시가 다 되도록 내 시합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상대는 회장까지 맡았던 유언종. 최선을 다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패하고 말았지만, 실력부족이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배운 대로 하려고 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단체전 복식에서는(윤재현 형이 단식 시합이 끝나자 가버렸기 때문에 손창섭과 한 조를 이뤘다) 다 지고 말았지만, 단식에서는 21패를 거두었다. 단국대, 서울대 선수에게는 이기고 경희대의 이한선에게는 두 세트 다 겨우 10점을 넘었을 뿐이었다. 이한선은 개인 단식 2차전에서 윤재현 형과 시합을 했는데, 재현이 형이 15점 정도까지 올라갔던 것 같다. 이한선은 이 시합에서 4강까지 올라간 드라이브 전형의 고수였다(보충: 이한선은 드라이브 주전이 아니라 전형적인 쇼트잡이이다).

시합에서 서브의 부족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탁구 사랑회> 동아리 방에서 서브연습을 서너 차례 했다(<참피온 탁구장>이나 <아테네 탁구장>이나 서브 연습할 시설, 즉 볼박스가 없는 게 아쉬웠지만, 주인아저씨는 영업상이라는 핑계로 볼박스의 설치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이때 한 서브 연습은 주로 서브를 길게 짧게 포핸드 또는 백핸드로 갈라 넣는 연습이었다. 회전 서브가 뭔지를 아직 알지 못했다.

정규시합에서 2회전(1회전은 부전승이었다)에 나가떨어지긴 했지만, 실력이 꽤 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주인아저씨와의 알수를 다섯 개 정도로 내렸고, 오랜만에 만난 정순교 형과의 시합에서는 맞잡고 쳤는데 첫 두 세트를 져서 순간적으로 당황하기도 했으나, 그 다음 일곱 여덟 세트를 내리 이겨 그 동안의 연습이 효과가 있었음을 증명했다.

경인 지역 시합은 <탁구 사랑회> 부원들과 더 가까워지고 탁구에 좀 더 눈뜨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탁구를 좀 돌이켜 보게 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앞의 단락에서 한 말과는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질 지도 모르지만 나의 탁구의 발전 가능성 내지는 한계에 대한 회의가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6월에 있을 대학원 시험이 나를 압박하고 있어서 탁구를 하루에 한 시간 정도로 못 박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와중에 한 가지 언급할 만한 일은 송파구에 있는 <참피온 탁구장>(이 이름은 너무나 흔하다) 회원들과의 시합이다. 과외를 하던 곳 근처에 있어서, 과외를 마치고는 몇 번 가서 친 적이 있었는데, 실력은 내가 나은 것 같은 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꼭 21로 졌다(물론 코치나 주인아저씨는 나보다 대여섯 알 위였지만). 이 중에는 오목대로 치는 사람도 있었고, 셰이크도 있었다. 러버나 라켓의 종류에 따라 탁구만큼 변화가 심한 운동도 없다는 걸 상기할 때, 다양한 상대와의 시합은 적응력을 높이는데 필수적이라는 걸 이때 깨달았다.

4월 말에 방통대의 주관 하에 <서울여상>에서 열린 시합에는 훈련도 거의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이 때를 전후하여 나는 탁구를 시험이 끝날 때까지 중단하기로 했다) 단체전에만 참가했다. 채홍남이는 뜻밖에도 개인전에서 16강까지 올라가는 선전을 했다. 우리 학교의 상대는 단대 천안, 경희대, 아주대(?)였다. 단대 천안 선수와의 시합은 지금 돌이켜봐도 무지 아쉬움이 남는 한판이다. 상대방의 회전성 서브를 커트로 받아댔으니, 이긴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손창섭과 91학번의 진성수가 쇼트로 받으라고 외치는 걸 들었고 나도 쇼트로 받아야 한다는 걸 알긴 알았지만, 자신이 없었다. 라켓 각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 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1세트는 정신없이 지고, 2세트는 악착같이 수비를 해 겨우 따냈다. 쉽게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가 안 되어서 그런지 상대방도 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3세트 초반에 나는 무리한 공격을 하다가 실점을 많이 했다. 3구 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 2구를 쳐보았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작전을 바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많이 따라 붙었다. 상대방의 서브는 2개밖에 남지 않았다. 점수는 1815. 내가 지고 있긴 했지만 둘 중에 하나만 따면 승산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점수판을 보았는데 웬걸 점수가 1915가 아닌가? 어디서 카운트를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온 몸에서 기운이 쭉 빠졌다. 어필을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당황한 나머지 내가 카운트를 잘못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고 결론지어버렸다. 상대방 선수가 서브를 넣었다. 나는 또 커트로 받았다. 그의 3구 스매싱. 나는 뒤로 물러나면서 리시브를 했다. 그러나 그의 5구 공격까지 받아낼 순 없었다. “졌다라는 소리가 머리를 두드렸다. 그런데 점수판을 보니 웬걸 1915가 아닌가? 심판이 그제야 자신의 카운트 미스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물론 중간에 그 일이 없었더라도, 내가 이길 확률은 높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얼마나 큰 타격을 입히는지. 나는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경희대와의 시합에서 나의 상대는 이번에도 이한선이었다. 승산이 거의 없는 게임이었기 때문에 나는 철저히 수비를 했다. 의외로 1세트를 따냈다. 몸이 덜 풀린 모양인지 이한선은 자기 범실이 많았다. 2세트도 팽팽한 접전이었으나, 막판에 가서 그의 공격력을 이겨낼 순 없었다. 아주대와의 시합은 상대방 선수의 실력이 한수 아래여서 쉽게 따냈다.

손창섭은 아주대와의 시합 때, 2회 경인지역 탁구대회 우승자인 김석태와 붙었다(보충: 2회 경인지역 탁구대회 우승자가 김석태인 것은 맞는 듯하지만, 김석태는 인하대이고, 또 전형도 펜홀더이기 때문에 이날 창섭이와 시합한 선수는 다른 선수다). 셰이크 전형에다가, 한쪽 면은 페인트(Feint)였다. 드라이브가 꽤 좋은 창섭이었지만 이질 러버, 그것도 페인트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나도 그때까지 페인트가 뭔지를 알지 못했다. 페인트가 오목대에 비해 돌출 부분 하나하나가 작고 부드러워서 공의 흔들림이 아주 심한 러버라는 걸 안 것은 시간이 훨씬 경과한 다음이었다.

대학원 시험까지 한 달 정도의 공백이 있고 난 뒤, 선생님과의 훈련을 재개했다. 쉬는 기간 동안에 까먹어 버린 실력을 다시 쌓아야 했다. 나의 실력에 대한 나의 생각과 실제의 실력(몸이 따라 주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 데서 오는 괴리감의 극복이 급선무였다.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았는데, 여러 악재들이 겹치고 겹쳐 나를 거의 탁구에서 떼어놓을 뻔 했다. 시험이 끝난 뒤 유희에 탐닉하다가 그만 병이 나고 말았다. 아픈 몸을 참고 훈련을 받는데, 제대로 치질 못하니까 선생님이 나에게 충격적인 말을 했다. 스매싱은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새로 드라이브를 배우라고 말했다. 여태까지의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끝없이 재질에 대해서 말했다. 재질이 있어야 한다. 너는 재질이 없어서 안 돼. 해도 안 되니까 일찌감치 포기해라. 하지만 이런 말을 뱉는 사람들 중에서 몇 명이나 자신의 말에 책임질 수 있으며, 또 사실 재질이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가? 이 문제는 나를 끝없이 괴롭혀온(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나 자신 재질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문제이긴 하지만, 나의 일관된 주장은 재질 따위는 무시하자는 것이었다. 개인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체에서 순수한 기쁨을 느낄 때 다른 측면, 즉 재질 따위가 무슨 중요성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우리가 타인과의 교류 내지는 경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것은 많은 경우 자명한 사실이다. 모두 승자가 되기를 원하지 패자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생존 본능,’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비극적인)의 의미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그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삶의 의미를 승패보다는 과정에서 찾을 것이다. (나의 생각을 너무 개괄적으로 말해버려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재질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펼친다는 것은 이글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핵심적인 부분을 기술해 보았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나의 말은 유희와 생존의 측면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고찰해 나가야 할 것이지만, 나는 내 주장이 정당한 것임을 믿고 싶다.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새로 탁구를 출발해야 할 시기였는데, 몸도 안 좋았고, 선생님마저 나의 기운을 꺾어 놓았다. 그러나, 이 정도였다면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 센 펀치가 나를 완전히 녹다운시켜 버렸다. 대학원 시험에는 합격했으나, 한 과목을 F 맞았다. 졸업을 못하게 된 것은 물론 대학원 합격도 취소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거의 일 년 동안은 탁구에 관한한 침체기였다. 한 동안은 탁구를 쉬고 볼링을 치기도 했다. <탁구 사랑회> 후배들과도 거의 단절된 상태였다. 그리곤 또 다시 대학원 시험 준비. 시험이 끝나고 나서는 번역을 한 권 맡았다. 물론 이 와중에 탁구를 전혀 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예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에 급급했다.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선생님마저 탁구장을 그만 두고 말았다. 졸지에 나는 외기러기가 되고 말았다. <아테네 탁구장>의 미스 민 아줌마와 치기도 했지만,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 해 볼 만한 상대였던 채우철과 윤재현 형에게도 판판이 지고 말았고, 주인아저씨와의 시합은 나 자신의 범실 때문에 화만 났다.

하지만 4*18기념 대학원 체육대회(93)는 꺼져가던 나의 탁구에 대한 정열에 기름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내 실력이 뛰어났다기보다는 출전 선수들의 실력이 그만저만해서, 쉽게 우승했다. 결승전에서 만난 체교과의 선수만이 약간 껄끄러웠을 뿐이었다.

번역 원고의 독촉 때문에 5월 한 달은 탁구 라켓을 손에 쥘 시간이 없었다. (대학원 시험에 재합격한 뒤, 나는 휴학을 했다.) 번역을 끝마치고 오랜만에 가진 윤재현 형과의 시합에서 대패하고 난 다음 나는 드라이브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스매싱이 좋은 득점원이긴 했지만, 내 미스가 너무 많았다. 연습량이 많지 않으면 스매싱은 미스가 날 확률이 너무 높았다. 다시 말해 정확한 타점을 잡기가 드라이브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웠다.

뭔가 계기가 필요했다. 힘들었던 시기는 지나가고 있었지만, 나 스스로 뛰어다닐 정도로 성장하진 못했다. 누군가 뛰는 법을 가르쳐 줄 사람이 필요했다. 시기도 7월 중순에 있을 <전국 대학 탁구 동호인 대회>에 대비해 열심히 훈련해야 할 때였다. 오 년 반 이상의 학교 앞 하숙과 자취 생활이 지겹기도 했다. 6월에 나는 상계동으로 이사했다. 거기에 내가 바라던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병규 탁구클럽>은 레슨을 위주로 하는 곳이다. 한병규 선생님은 <종암 국민학교>에서 코치를 맡았었고, 또 중동의 오만에서 감독생활도 거친 분이었다. 레슨을 하는 분은 모두 네 명이었는데, 한 선생님의 제자들로 학교에서 코치 생활을 한 경험이 있었다. 한 선생님은 테스트를 하고 난 후, 그립의 문제점과 포핸드를 칠 때 손목을 흔드는 것, 또 드라이브가 엉망인 것, 상체가 뒤로 젖혀지는 것 등을 지적해 주었다. 진작부터 알고 있는 것이긴 했으나, 그렇게 명료하게 지적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담당한 코치는 하대중 선생님이었다. 포핸드나 쇼트가 어느 정도 된 상태에서는 가장 기본적이라 할 수 있는, 풋워크, 포핸드쇼트(화쇼트), 포핸드쇼트포핸드(화쇼트화) 등의 연결 연습과, 2구를 커트로 받고 3구를 드라이브로 처리하는 연습을 많이 했다. 하 선생님에게 이때까지 스매싱을 위주로 해왔음을 밝히고, 그렇게 연습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으나,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선 과거와의 단절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우선적으로 치중해야 할 부분은 드라이브와 쇼트였다. 나의 드라이브는 공을 들어올리기만 할 뿐 회전력이 없었고, 쇼트도 앞으로 나가면서 대 주는 게 아니라 자꾸 들어 올리는 식이었다. 시합 날짜는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이 한 달 동안 나는 어느 때보다도 탁구를 많이 쳤고, 실력도 많이 늘었다고 자부한다. 하 선생님에게 코치를 받고 난 다음에는, 서브 연습을 하고 또 자동 머신을 이용해서 드라이브와 쇼트 연습도 했다. 그 다음엔 학교에 와 미스 민 아줌마로부터 레슨을 받고, 후배들과 훈련을 했다. 평균해서 하루에 네 시간 정도 탁구를 쳤던 것 같다.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메카 탁구장>이 있어서, 이 탁구장의 주인인 백명해 씨와도 가끔씩 시합을 했는데, 내 실력이 좀 딸렸다. 왼손 셰이크인데 몸이 어찌나 빠른지 내가 제대로 공격할 기회가 없었다. 자신의 서브 때는 3구부터, 상대방의 서브 때는 2구부터 공격을 해 버리기 때문에 수비하기에 급급했다.

지난번과는 달리 OB로 출전한 전국 대회(OB들이 대체로 YB보다 실력이 좋다)에서는 또 한 번 패배를 맞보지 않을 수 없었다. 1회전은 기권승으로 통과했으나, 2회전에서 서울대의 김상욱에게 패하고 말았다. 전체적으로 실력이 밀린 것도 사실이지만, 특히 서비스 리시브가 불안했다. 지난번 단대 천안 선수와의 시합에서 패인으로 작용했던 회전성 서브에 대한 리시브가 요번에도 취약점으로 드러났다. 더욱이 서울대 선수의 서브는 회전(횡회전)과 하회전이 섞여 있어서 리시브하기가 더욱 까다로웠다(보충: 이 말은 횡회전 서브와 복합서브(즉 횡회전과 하회전(커트)이 섞인 서브)를 섞어서 넣었다는 말이다. 내가 이 당시에 하회전이라고 쓴 것은 복합서브를 잘못 쓴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하회전이라는 말을 내 식으로 계속 잘못 쓰고 있다). 코치 선생님한테 받은 몇 번의 레슨으로 상대방의 서브를 파악한다는 건 무리였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때까지 내가 회전(횡회전) 서브를 넣을 줄 몰랐다는 사실이다. 윤재현 형도 서울대 사람에게 패하고 말았고, 후배들도 별반 이렇다 할 기록을 내지 못했다. 신입생 중에서 실력이 가장 좋고, 서브가 까다로워 좋은 성적을 낼 것으로 기대했던 손경수도 강적을 만났는지 지고 말았다. 이날 거둔 유일한 성과라면 단체전 강원대(단체전은 52복이었다)와의 시합에서 3게임을 따낸 것이었다. 우리가 이길 수도 있었는데, 오더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세상살이의 벽은 언제나 높았다. 내 나름대로는 한다고 애썼는데, 딴 사람들은 한 단계 더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눈을 항상 위로만 향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패배가 기분 좋은 일이 될 수는 없지만, 많은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시합은 하나의 고비였고, 이 고비를 넘은 다음엔 정리가 필요했다. 탁구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쳐야겠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탁구를 좋아하고 탁구가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던 것, 탁구를 통해 이 세상 이치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탁구는 유희지 결코 직업은 아니었다. 나의 전부를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대중 선생님에게 레슨을 계속 받는 가운데, 새로 회원으로 들어온 이상구 씨를 만났다. 이상구 씨는 볼 컨트롤이 좋았다. <참피온 탁구장>의 주인아저씨와 같이 수비에 의존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상대하기가 더욱 까다로웠던 것은 서브 때문이었다.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회전 서브와 하회전 서브를 한 동작에서 구사했기 때문에 공을 보는 눈이 부족했던 나는 번번이 리시브를 미스했다. 상대방의 공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다는 것이 탁구를 치면 칠수록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첫 세트에서 1619로 뒤진 상황에서 그를 꺾을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 나의 서브에서 그 동안 배운 대로 커트 서브를 넣고 3구를 공격하는 수법이 먹혀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세트도 고전하긴 했지만 어떻게 이겼다. 이날 게임과 그 다음의 몇 게임에서는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이겼지만, 그 다음부터는 주로 서브 때문에 번번이 지고 말았다.

8월 한 달 동안은 백명해 씨의 요청으로 <메카 탁구장>에서 오전 중에 주부 회원들을 가르쳤다. 이 덕분에 쇼트가 많이 좋아졌다. 시합 때 훈련을 많이 한 덕분으로 백명해 씨와의 시합에서도 이기는 때가 많았다. 윤재현 형과는 금요일마다 <아테네 탁구장>에서 만나서 게임을 했다. 그 동안 나의 실력이 늘어서, 3세트 중 2세트 꼴로 내가 이겼다.

서울에서 고향인 대구에 내려가서 탁구 친 이야기도 시간의 흐름과는 맞지 않지만 특별히 삽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먼저 기억에 남는 것은 순교 형과의 시합이다(순교 형은 직장에 취직해서 대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형과의 시합에서 예전과는 반대로 내가 7점을 잡아주고 시합을 해서 이겼다. 실력이 는 좋은 본보기였다. 다음에는 경북 대학교 <북문 탁구장>의 예순이 넘으신 할아버지라고 해도 좋을 아저씨. 이 분은 옛날에 선수 생활을 하셨는데, 옛날 탁구가 흔히 그렇듯 연타 위주로 게임을 이끌었다. 처음에 이 분과 시합을 했을 때는 나에게 10점을 접어주셨는데, 그 이후 시합을 해 보진 않았지만 이제는 내가 이길 수 있을 듯하다. 또 예전에 국가 대표를 하신 양승석 씨도 기억에 남는다. 나의 강스매싱을 다 받아내고 좌우 드라이브를 탁구대의 라인을 따라 걸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 분은 탁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임팩트, 즉 맞는 순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나의 경우에 있어서는 임팩트가 너무 길다고 지적했다. 그 다음에는 집 근처의 <대명 탁구장>의 박종찬 씨. 이 분은 선수 생활을 한 것도 아닌데, 자기 혼자서 언제 그렇게 탁구를 많이 쳤는지 선수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양승석 씨도 이 사람에겐 안 되는 모양이었다. 집에서 가깝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분의 실력이 워낙 좋아(비용이 비싸긴 했으나) 집에 들를 적에는 꼭 가서 치곤했다.

애초에 휴학을 한 것은 1년 동안의 시험 준비 기간이 힘들었기 때문에 휴식을 취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글쓰기라는 내 본래의 관심사에 몰두해보고 싶어서였는데, 창작의 문은 열리지 않고 시간만 자꾸 흘러가고 있었다. 10월 달에 또 번역 의뢰가 들어와 이 놈을 기한에 맞춰 해주느라고 탁구를 좀 게을리 했다.

이 당시 나의 주요 관심사는 회전 서브를 넣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 않았다. 회전이 아니라 하회전 서브를 넣고서 나는 회전 서브를 넣을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하면서, <사물의 신비는 오묘하다. 그 신비에 접근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인내이다>라고 일기에 쓰기도 했다. 내가 회전 서브를 넣지 못하니까 상대방의 회전 서브와 하회전 서브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훈련을 열심히 할 때는 나의 서브에서 포인트를 따 리시브 미스로 까먹은 점수를 보충했으나, 시간에 쫓겨 탁구를 별로 치지 못하다 보니 이상구 씨와의 시합에서 꼭 21로 졌다. 이건 <5회 경인지구 대학 탁구 동호인 대회>까지 계속 되었다.

바빠서 후배들하고 연락도 제대로 못하고 지내다가, 시합이 코앞에 닥친 걸 알게 되었다. 경인 지구 탁구 대회가 219, 20(94) 양일간 국민대에서 열린다는 것이었다. 연습할 시간이 2주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93학번의 손경수와 김시훈은 방학 동안에 연습을 엄청 많이 한 모양이었다. 경수와의 3세트 게임에서 1세트는 꼭 뺏겼다. 예전에도 서비스 리시브가 안 돼 까다로운 상대이긴 했으나, 세트를 내 준 적은 거의 없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경수가 연습을 많이 해 는 것도 있지만, 내가 연습을 게을리 한 게 더 큰 요인이었다.

요번 시합은 의외로 대진운이 좋았다. 하지만 몸이 별로 좋질 못했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게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첫 번째 상대인 서강대 OB는 정말 손쉬운 상대였는데도, 내 드라이브의 회전력이 문제였다. 나의 드라이브 3구 공격을 상대편 선수는 잘도 받아냈다. 5구 처리는 또 왜 그렇게 안 되는지. 스매싱도 엉망인 게 나 자신에 화가 났고, 시합을 관전하는 후배들에게도 부끄러웠다. 21로 이기긴 했으나, 화만 나는 한 판이었다. 2회전의 상대는 방통대의 이상충. 포핸드를 쳐보고 해볼 만한 상대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막상 시합은 그게 아니었다. 3구 드라이브 공격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1세트를 12점밖에 못 내고 져버렸다. 나보다 한수 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91학번의 진성수에게 상대방 선수의 실력이 뛰어나지 않느냐고 했더니, 성수는 그게 아니라 내가 못 쳐서 그렇다고 했다. 공격만 좀 되었으면 하는 생각. 안 되는 것에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 연타보다는 강타 연습에 치중할 걸 하는 생각. ‘나는 해도 안 돼하는 자괴감. 온갖 생각이 머리를 휘저었다. 최종적인 결론은 일단 공격이 안 되니까 공격으로 밀고 나가려고 한다면 게임의 승패는 자명하므로 한 공 한 공 침착하게 처리해 나가자는 쪽으로 낙찰되었다. 나의 이 작전은 적중했다. 2세트도 출발은 불안했다. 점수 차이가 크게 벌어지지는 않았으나, 끌려가는 형편이었다. 그런 가운데 상대방 선수의 약점을 알아냈다. 3구 공격만 막아내면 5구 이후부터는 공격의 위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2세트를 2118로 이겼다.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2세트에서 패하자 상대 선수는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나의 승부수는 이미 던져진 상태였다. 이기고 지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선수에게 달려있었다. 게임의 주도권을 그에게 넘겨줘 버린 것이다. 공격이 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택해야만 했던(사실 나의 공격력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컨디션이 좋을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공이 내 뜻대로 움직여 주었다) 차선책이었다. 3세트는 2세트의 연장이었다. 초반에서 중반까지 나는 점수를 리드당한 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줄 점수는 줘버리고, 지킬 수 있는 점수를 확실히 지켰다. 상대방 백핸드 쪽으로 공을 띄워 올려 공격 미스를 유도했다. 1718로 한 점 뒤진 상황에서 내 서브를 가지고 왔던 것 같다. 승산이 있었다. 먼저 나는 한 점을 따기 위해, 나의 전체 작전과는 달리 3구를 공격했다. 이게 주효했다. 그 다음에 다시 상대방의 공격으로 한 포인트를 뺏겼다. 1819 상황에서 나는 연거푸 2점을 따냈고, 마지막 1점은 상대방 선수의 공격 미스로 따냈다(기억이 이 정도 세세한 데까지 미치진 않지만, 그랬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16강 진출이었다. 이겼다는 사실은 중간의 과정은 어쨌든 간에 일단은 기쁘게 했다. 어딘가에 씁쓸함--‘실력으로 이긴 게 아니야하는--이 없진 않았지만, 세 번의 대학 탁구 동우회 출전 중에서 제일 좋은 기록이었다. 16강전은 다음 날 있었다. 이날 <탁구 사랑회> 후배들도 좋은 기록을 내었다. 개인전에선 93학번의 손경수가 3회전(32)까지 진출했고, 단체전에선 내가 <탁구 사랑회>에 들어와서는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단국대를 43으로 꺾은 것이었다. 마지막 단식에 출전한 91학번의 이종환이 단국대의 에이스를 마지막 세트에서 듀스까지 가는 접전을 펼친 끝에 21로 이긴 것이었다.

16강전의 상대인 국민대의 정석우와의 시합은 서브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이번 게임에서도 1세트를 쉽게 내주었다. 2세트는 억지로 따냈으나, 3세트에서 상대방의 서브에 완전히 농락당하고 말았다. 맨 공(무회전 공)처럼 보여 라켓을 가볍게 갖다 됐는데, 그대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상대방의 공을 읽을 수 없다는 게 나를 화나게 했다. 실력차는 없는 상대였는데 서브 리시브의 불안 때문에 지고 말았다. 한 동작에서 다른 구질의 서브를 구사하는 능력, 내가 그 능력을 갖추게 될 날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대진 운이 좋았기 때문이긴 하지만 16강까지 올랐다는 건 하나의 성과였다. 다음 시합을 위한 발판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대회는 뭔가 하나씩은 꼭꼭 자극을 주었다. 요번 시합에서는 시합 때마다 제기되었던 서비스 리시브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함께 한 동작에서 다른 구질의 서브를 구사하는 능력이 꼭 필요함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이 능력은 아무리 해도 나는 가질 수 없는 한계처럼 느껴졌는데, 어느 날 갑자기 회전 서브를 넣을 수 있게 되었고, 이게 되니까 같은 동작에서 하회전 서브를 넣는 것은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얼마나 정교하게, 다시 말해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다른 종류의 서브를 섞어서 넣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숙제였다. 갑자기라고 했지만, 사실은 이 과정이 서서히 진행되어 온 것이다. 임계질량이라는 말이 있듯이,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어느 순간이지만 그 결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을 밟아야 하는 것이었다. 서브를 알게 되니까 내 실력이 단박에 5,6점은 뛰어 올랐다. 왜냐하면 내가 어설프긴 하지만 한 동작에서 다른 구질의 서브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 선수의 공도 약간은 짐작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를 괴롭혀 왔던 두 가지 숙제를 동시에 해결한 셈이었다. 물론 아직도 실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의 서브를 구별하지는 못하지만, 서브를 좀 알게 되니까 탁구공을 제대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도 동시에 깨닫게 되었다.

서브를 익힌 과정을 좀 더 상술하자면 이렇다. 탁구를 좀 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한 동작에서 여러 다른 구질의 서비스를 넣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병규 탁구 클럽>에 오기 전까지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92년 서강대에서 열린 경인지역 시합이 끝나고 난 뒤 공을 열 타 정도 사 동아리 방에서 서너 차례 연습한 게 고작이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서브 연습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서브 연습은 936<한병규 탁구클럽>에 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브 연습을 하던 내 모습을 보고 한병규 선생님은 나에게 서브를 무의미하게 반복해서 넣을 게 아니라,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넣으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공을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 말의 뜻을 알 수가 없어서, 내가 원래 넣던 서브들을 연습할 수밖에 없었다. 손경수의 강한 회전 서브와 이상구 씨의 회전과 하회전이 섞인 서브가 나에게 자극을 주었기 때문에, 회전서브를 어떻게 하면 구사할 수 있는지 미스 민 아줌마와 <한병규 탁구클럽>의 선생님들에게 물어보았는데, 대답은 한결같이 회전서브 넣는 게 뭐가 어렵냐는 것이었다. 그냥 라켓을 세워서 넣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알고 나면 정말 쉬웠다. 회전서브 넣기가 나에게 있어서 그렇게 어려웠던 것은, 탁구를 커트에 많이 의존했던 나의 습성 때문이었다. 라켓을 세우게 되면 커트 서브나 하회전 서브와는 달리 공을 맞추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자꾸만 하회전 서브를 넣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걸 깨닫는데 칠팔 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이걸 깨닫고 나니까 서브 연습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한 동작에서 여러 구질의 공을 구사하는 게 가능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더 배울 것은 어떻게 손목 스냅을 좀 더 잘 사용하는가 하는 것과, 오시성 서브, 그 다음 커트와 거의 흡사한 무시성 서브다.

 

시합이 끝나고 나자 임상일 선생님이 나를 가르치겠다고 했다. 임 선생님은 인하대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대광고등학교에서 코치를 한 경력이 있는 분이었다. 하 선생님과의 레슨이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이 좀 있었고, 내 드라이브의 파워와 회전력을 기르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은근히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임 선생님의 실력이 하 선생님보다 나았다). 이 교체시기에 나는 서브를 깨달았다. 임 선생님은 하 선생님이 해왔던 연결 연습보다는 내 드라이브의 파워를 기르는 데 중점을 두었다. 나의 드라이브의 문제점은 라켓이 세워진 상태가 아니라 앞으로 숙여진 상태에서 걸어 올리기 때문에, 공이 얇게 맞는다는 것이었다. 공을 두텁게 맞추어야 공에 파워가 실린다는 것이었다.

임 선생님과의 연습을 시작한 후 실력이 갑자기 는 듯했다. 내 드라이브가 갑자기 좋아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시기에 그 동안에 나를 괴롭혀 왔던 공을 보는 눈이 어느 정도 뜨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상구 씨를 비롯, 엄진선 씨, 이충석 씨 등 다른 회원들과의 시합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하 선생님과의 시합에서는 8점만 접고 이겼다. 처음에 왔을 때는 10점을 접고도 게임이 안 됐다. 임 선생님과의 시합에서도 10점을 접고, 두 게임은 이기고, 한 게임은 졌다. 임 선생님은 전형적인 공격형이었다. 미스 따윈 개의치 않고 자신의 서브 때는 3구에서, 상대방의 서브는 2구 처리해 버렸다. 물론 나와는 실력차가 많이 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대의 탁구에 있어서 선수들이 보편적으로 택하고 있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신당동에 있는 <동화 탁구장> 주인과의 만남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과외를 갔다가 오던 길에 우연히 발견한 이 탁구장엔 고수가 많았다. 주인인 이종석 씨는 전체적인 플레이가 깨끗했다. 드라이브도 그런대로 괜찮고, 백핸드도 유연했다. 그 다음에 왼손잡이인 건대 학생, 김국현, 또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선수를 한 사람 등 모두 나보다 실력이 한 수 위였다. 특히 김국현은 무시 서브(그는 오시 서브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무시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와 커트 서브를 구분할 수 없게 넣어서 시합하기에 아주 까다로웠다. 이들과의 시합이 나의 탁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탁구는 나에게 있어서 도피처, 위안처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사람마다 다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있고, 자신의 독특한 취향이 있는데, 탁구는 나에게 딱 맞는 운동이었던 것 같다. 또 한편으로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이 세상 모든 일에 있어서의 기술의 습득은 노력과 지식을 필요로 하고, 그 노력과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은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도 사실이다(어느 정도의 고통도 동시에 수반한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다).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나는 내가 애쓴 만큼 탁구가 늘었다고 자부한다(늘지 않았다 해도 상관이 없다). 아직도 모색의 과정이긴 하다. 상대방의 공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의 공조차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백은 말할 것도 없고, 주공격원인 드라이브도 엉성하다. 하지만 부족한 부분은 더 열심히 연습하는 외에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겠는가?

요번 7월에 있을 <전국대학(보충: 한국 대학) 탁구 동호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도록 꾸준히 연습해 나갈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어떻게 하면 좀 더 탁구를 잘 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내 자신이 아직 부족하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건방진 일일 수도 있지만, 나보다 실력이 못한 사람들, 열정은 있으나 탁구 구력이 짧아서 미로를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 한 마디 한다면), 첫째로는 꾸준한 연습이라는 보편적인 명제를 내세우고 싶고, 그 다음에는 자기보다 실력이 나은 사람들, 즉 고수의 말에 귀 기울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반추해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기록에서 발췌한 부분

*91314(강신욱 형과의 시합 뒤)

탁구대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은 다음 공의 처리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315(주인아저씨와의 알수를 7개에서 4개로 내리고)

공격력이 시합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리고 적극적인 공격과 경솔한 공격의 차이점은? 또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상대가 약하더라도 항상 이길 수는 없다는 것. 탐색을 하고 상황에 유연히 대처할 것.

 

*317(정상화 형과의 시합에서 32, 강신욱 형과의 시합에서 30으로 이기고)

아직도 익혀야 할 기술이 너무나 많다. 먼저 드라이브를 익히도록 해야 한다. 시합에서 3점 이상 이기고 있을 때는 시험적으로 드라이브를 걸어보자. 푸시도 연습해야 한다.

게임을 분석해보면 상화 형과의 시합에서 너무 여유를 가지고 쳤기 때문에 막판 두 판에 몰렸던 것 같다. 세 번째 판은 봐준 것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지만, 자신을 과신한다는 것은 결코 좋지 않다. 신욱이 형과의 시합은 참 좋았다. 무리 없는 공격과 수비가 조화를 이루었다.

져줘야 할 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려면 나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318

기초적인 기술 연마에 정신을 집중할 것. “달리기연습도 게을리 말 것.

 

*319(주인아저씨와의 시합. 알수가 4개에서 8개로 올라감.)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도 최선을 다할 것을 잊지 말자.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따위의 핑계는 필요 없다. 그런 핑계를 대기보다는 아예 시합을 하지 말자. 복학도 했고 하니까 탁구를 좀 절제할 필요성도 느낀다. 드라이브 연습에 치중하고 스매싱의 정확도를 높일 것.

 

*321(주인아저씨와의 시합. 알수가 11개로 올라감.)

마음을 한 가닥으로 먹는 게 필요하다. 진지한 태도를 버리고, 성급하고 경솔한 마음, 남에게 보이려는 알량한 허영심으로 시합에 임하는 것, 또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 과거나 미래의 자기에 집착하는 것, 그런 것이 패인이다. 아니 그것은 시합의 승패 이전에 시합에 임하는 태도에 있어서의 패배이다.

 

*322(최영식 형과의 시합에서 41로 이기고)

공격이 되살아났던 게임, 가벼운 마음가짐이 역설적으로 위력 있는 공격을 수반한다는 걸 명심하도록. 두려움은 현재의 자신을 거부하려하기 때문에 생겨난다는 크리스티나무르티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323(문영 여중 선수와 7개 잡고 시합)

문영 여중 3학년 선수와의 시합은 나에게 많은 걸 가르쳐 주었다. 첫째는 훈련의 중요성이다. 진지한 노력이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해 본다는 것, 즉 나를 완전히 던져본다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둘째, 내 폼이 얼마나 엉성한가 하는 점이다. 셋째는 시합의 승리가 결코 시합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 나의 실력을 쌓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 말과 승리가 어떻게 다른가는 직관으로 밖에 설명되지 않지만.

 

*325(주인아저씨와의 알수를 5개로 내리고)

컨디션 조절의 필요성, 연습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커트는 좋은 것일까?

 

*327(김대중과의 시합에서 35로 지고)

기록을 정리한 뒤론 처음으로 전체 세트에서 대중이한테 졌다. 나의 태도가 위축된 반면 대중이가 좋은 컨디션으로 적극적으로 공격에 임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승패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자, 아니 보다 중요한 것은 리시브의 불안함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것이다.

 

*424(최영식 형과의 시합에서 34로 지고)

컨디션이 시합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상대방이 나의 컨디션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할 때, 내가 취해야 할 방도는 두 가지다. (나는 상대방의 컨디션을 고려했는가?) 첫째는 시합을 안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패배를 감수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점을 모르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만 판단하려 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몸의 상태, 기분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한다는 측면도 있다. 모든 것 하나하나가 실력이다. 비록 우리는 전체로서 판단을 해야 하긴 하지만, 그것(전체)은 캐치하기 어려운 만큼 때로는 현상이 판단의 근거이다.

그렇다. 결론은 내려졌다. 무리하게 시합을 강행할 필요는 없다. 실력에 의한 패배가 아니더라도 패배는 실력에 영향을 미친다. 이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때나 이길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실력이므로 순간의 패배를 감수하고라도 한 게임 한 게임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이다.

 

*425(신용훈 선생님)

아직도 랠리가 많이 부족하다. 선생님과 랠리 연습(한 번에 100개 이상)이 현재 가장 치중해야 할 부분이다.

 

*426(신용훈 선생님)

랠리가 조금은 정확해진 것일까? 오늘의 최고 기록은 97개이다.

 

*58(신용훈 선생님)

스매싱을 할 때 라켓이 좀 더 앞쪽으로 기울여져야 한다는 것이 아저씨(선생님) 지적이다. (삽입: 이 당시 스매싱의 문제점은 공이 쭉 뻗어나가지 않고 왼쪽으로 휘어버리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라켓 각을 안쪽으로 잡아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랠리는 그런대로 좋은 편이었다. 106개와 100. 첫 번째는 아저씨가 실수했다.

 

*510(미스 민 아줌마와의 첫 시합 후. 첫 번째 게임에서 8. 두 번째 게임에서 14점을 냄.)

선수 생활을 한 사람이라 역시 다르다. 서브는 별로 어려운 게 없었지만(일부러 안 넣었는지도 모르겠다) 허점이 보이지 않았다.

백은 확실한 것만 치고 자제해야겠다. 랠리에 치중하자. 미스를 하지 않고 계속 쳐 넘긴다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도록.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탁구를 가장 잘 치는 사람이다.

 

*515(윤재현 형과 5점 접고 시합, 김영훈과의 시합에서는 40으로 이김)

실력이 준 게 아니라, 법대 88학번(삽입: 이때는 이름을 몰랐다)이 잘 치는 모양이다. 김영훈이도 이긴 걸 보면. 공을 까다롭게 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스매싱을 비롯한 공격의 중요성만 여태까지 강조되었는데, 공을 얼마나 상대방이 치기 어렵게 주는가 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함을 깨닫는다. (삽입: 윤재현 형과의 시합에서 이 문제가 제기된 것은 3구 공격을 제대로 하는 사람을 그 동안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529(주인아저씨와의 알수를 9개에서 2개로 내림)

탁구를 본격적으로 치기 시작한 후, 기록 정리를 한 이래 최대의 성과를 올린 날이었다. 인내의 결과가 언젠가는 찾아옴을 단적으로 보여준 날. 물론 아저씨와의 이 알수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가능성(특히 리시브에 있어서의)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한 두 시간 치고 난 뒤, 다시 말해 몸이 풀린 상태의 컨디션이 훨씬 좋을 수 있음도 깨달았다.

꾸준히 노력해서 요번 여름 방학 때는 아저씨를 이기도록 하자.

 

*530(최영식 형에게 36으로 지고)

승리 다음엔 패배. 돌고 도는 것이 승부다. 시합엔 최선을 다할 것이지만, 결과를 가볍게 여길 필요가 있다. 패배뿐만 아니라 승리도.

 

*610(신용훈 선생님)

서브 리시브를 익히는 것이 당면 과제. 그리고 백도 계속 익혀야 할 것.

 

*615(박광석 씨와의 시합)

진짜 시합에서 강해지는 것. 그것도 중요하다. 현재 가장 문제점으로 떠오른 것은 백 리시브다. 커트로 짧게 받는 연습을 많이 해야할 것이다.

광석 씨와의 내기 시합에서의 패배는 나의 실력의 부족을 여실히 나타낸 것이다.

 

*75(채우철과의 시합, 43으로 이김)

우철이가 지적한 나의 단점은 첫째 서브가 단조롭다. 둘째 드라이브가 없다. 셋째 백 칠 때 공이 반대로 휜다. 넷째 백 리시브가 커트밖에 없다.

서브와 리시브의 연습, 혼자서 할 수 있는 연습은 서브 연습이니까 그것을 많이 하고, 선생님과의 연습 때는 스매싱에 치중할 것. 공을 굴려야 하는 이유와 필요성을 이제 좀 알 것 같다. (삽입: 신용훈 선생님이 나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드라이브성 스매싱인데, 누군가는 이것을 드매싱이라고 하던데,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들은 적인 없는 좀 독특한 기술이었다.)

뭔가 하나를 익힌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듯 하나를 반복해서 익혀라.

 

*710(주인아저씨와의 알수가 3개에서 9개로 올라감)

승부는 돌고 도는 것일까? 그리고 시합에서 심리적 요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제, 오늘 영 좋지 못한 경기 내용을 보여주었다. 공격이 뜻대로 되지 않은 게 주요인이겠지만, 아저씨의 수비가 철저했음도 무시할 수 없다.

승부를 떠나서 오늘의 시합 태도는 정말 좋지 못했다. 반성해야 할 점은 바로 이것이다. 겸허한 태도로 시합에 임하지 않고,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다시 말해 게임을 하나하나 만들어나가는 게 아니고 신처럼 내 의지대로 이끌려는 태도는 질타 받아 마땅하다. 신욱이 형이 나의 신경을 건드린 점도 있다.

결론적으로 시합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둘이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므로, 항상 상대방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게임을 나의 페이스대로 이끌어 가는 게 최선의 방책이지만 그것이 잘 안 될 때는 차선책의 강구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713

공격이 최선의 태도라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공격이 항상 잘 되는 것은 아니다. 몸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또는 상대방의 공이 까다로울 때, 그럴 때는 차선책을 택하라. 실력이 있으면 두려울 게 없다.

법대 88이 나의 첫 목표다.

 

*715(강신욱 형과의 시합에서 14로 지고)

질 수도 있는 일이다. 겸허한 자세로 시합에 임하라. 확실한 실력자가 되라.

 

*9211(주인아저씨와의 시합 알수가 3개에서 5개로 올라감)

주인아저씨는 철저한 수비형이며, 코너워크가 주 무기다. 백푸시가 좋기는 하나 날카로운 맛은 없다. 성급한 공격은 오히려 낭패를 부르기 수비다. 하지만 적극적인 공격은 필요하다.

보다 낮은 곳으로 내려앉을 줄 아는 새만이 보다 높이 활개칠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격언을 되새긴 한 판이었다. 아직도 내 공격으로 아저씨의 수비를 허물긴 힘이 든다.

 

*14(주인아저씨와 5점 접고 한 시합에서 03으로 지고)

진 이유를 알 순 없지만 완패당하고 말았다.

(탁구의 길이 아직도 멀고 먼 길임을, 아니 차라리 끝은 없고 달려 나가기만 해야 하는 길임을 여실히 깨달은 날이었다. ‘시간의 문제라는 걸 잊지 말고 계속 연마해 나갈 지어다.)

 

*15(처음 보는 세이크 핸드와의 시합에서 32로 이기고)

가까스로 이긴 한 판. 전형에 따라 나의 대응도 철저히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걸 명심할 것. 자만하지 말 것.

 

*18(미스 민 아줌마와의 시합 후)

10점을 모두 넘겼다는 건 실력의 성장을 의미한다. 발을 움직여야 한다. 쇼트의 보강이 필요하다.

 

*110(박광석 씨와 게토레이 내기 시합에서 32로 이기고)

전진 속공형으로 전환하고 나서 한 광석 씨와의 시합에서는 처음으로 이긴 것이다.

시합은 부지런하게 움직일 수 있는가 없는가가 승패를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0(윤재현 형과의 시합에서 16으로 지고)

재현이 형의 실력은 역시 뛰어나다. 2구에서 공격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서브 개발이 시급하다.

 

*110(유박사와의 시합에서 03으로 지고)

오시성 서브는 눌러주면 된다.’ 서브 리시브만 되면 유박사는 의외로 무서울 것이 없는 존재로 생각된다.

 

*120(주인아저씨와 시합, 오점 접고 43, 41, 맞잡고 20, 02)

주인아저씨에 대해서 자신감을 갖게 해 준 시합이었다. 이제는 주인아저씨와 맞잡고 쳐도 될 것 같다.

 

*121(손창섭과의 시합에서 30으로 이기고)

창섭이의 강점은 언제나 적극적인 공격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만, 약점은 바로 그 강점의 이면이다. 공격을 뒷받침해 줄 최소한의 수비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또 볼을 조급히 처리하는 버릇도 고쳐야 할 것이다.

 

*121(중학교 때까지 선수한 사람과의 시합에서 02로 지고)

선수의 벽은 높다. 중학교 때까지 선수생활을 하고 그만 둔 사람인데도 내가 쉽게 무너지고 만 걸 보면, 이 사람과의 시합에서 드러난 나의 문제점은 리시브다. 리시브가 아직도 미숙하다.

 

*121(미스 민 아줌마와의 시합)

두 게임 다 10점도 못 넘고 져 버렸다. 내 서브의 폭이 좁아져서인가? (삽입: 이 당시 나는 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 짧은 서브를 주로 넣었다. 그런데, 그게 역효과를 불러 일으켰던 것 같다.)

 

*124(경인지구 대학 탁구 동호인 대회, 유언종과의 시합에서 02로 지고)

역부족이었다. 3구 공격이 생각대로 먹혀주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 공격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더욱 훈련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롱 전(삽입: 유언종의 플레이는 중진에서 드라이브를 길게 거는 방식이었는데,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여본 것이다)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한다.)

2세트에서 1718로 한 점 지고 있긴 했지만, 서브가 내게로 넘어왔기 때문에 이길 수도 있었는데 성급한 공격이 화를 불러들인 것 같다. 아니 공격의 미스가 패인이었다.

 

*222(송파 <참피온 탁구장> 코치와의 시합에서 13으로 지고)

이질 러버(오목대)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나가야 한다. 그리고 강타보다도 연타가 지금 단계에서는 훨씬 효과적임을 깨달아야 한다.

실력의 부족과 이질 러버에 대한 경험 미숙이 드러난 한 판이었다.

 

*93628(<탁구 사랑회>의 후배인 김준상과의 시합)

준상이와의 시합의 목표는 10점 이하로 잡는 것이다.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일(삽입: 파쇼트, 풋워크, 파쇼트파 등 움직임을 이때 제대로 배웠다)을 계속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점수에 여유가 많이 있을 때는 많이 깎지 않은 커트를 넣고 3구를 드라이브로 처리하는 연습을 하도록 하자. 준상이가 실력이 많이 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 실력을 더 늘여야 한다. 무리한 볼 처리는 금물.

 

*628(윤재현 형과의 시합에서 34로 지고)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고 적극적인 태도로 시합에 임한 것이 도움이 된 듯하다. 물론 전체적인 승률에서는 뒤졌지만 다음번에 만날 때는 충분히 뒤집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재현이 형이 당분간 탁구를 치지 않을 것이므로. 이번 게임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역시 성급하고 무리한 볼 처리.

지난 일 주일 동안의 훈련으로 백을 되살릴 수 있었던 것은 큰 성과이지만 아직도 볼에 대한 여유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상대방이 꼭 공격을 하러 나선다면, 그것을 무리하게 역공격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직 나의 실력이 미치지 못하니까.)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게 쉬운 공격을 주지 않는 것이다. 쇼트로 받아야 할 공을 커트로 받는 약점(공을 보는 능력의 결여)의 극복도 이번 시합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너무 장황하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데 요약을 해보면

1) 무리한 볼 처리를 하지 말 것. 서비스 리시브의 경우이든 혹은 스매싱이든. 내가 포인트를 따면서 빨리 끝낼 수 있다면, 그것이 최상이겠지만, 그게 되지 않으니까(탁구장에서 시합할 때는 좁아서 돌아서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는 걸 한 번 상기해보라) 연결 플레이와 득점 플레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서비스 리시브의 경우 커트로 받을 것인지 쇼트로 받을 것인지를 명확하게 판단해서 리시브할 것. 쇼트의 부족이 리시브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여기에 대해서는 군말이 필요 없다. 연습과 과감한 시도뿐.

풋워크와 라켓 전환이 좋아진 게 훈련의 성과다. 목표는 미스 민 아줌마를 이기는 것. 거기까진 안 되더라도 최소한 게임 당 15점을 넘기는 것.

백도 살아나고 있다. 부지런히 훈련할 따름이다.

 

*629(백명해 씨와의 시합에서 14로 지고)

내 실력이 이 사람에겐 좀 딸리는 모양이다. 공을 끝까지 쫓아다니는 그 마음가짐을 진짜 본받아야 한다. 왼손잡이. 셰이크. 올라운드 플레이어.

 

*71(윤재현 형과의 시합에서 63으로 이기고)

이겼다. 훈련의 성과가 나타나서 기쁘다. 아직 우열을 가릴 정도는 아니지만. 얼마만인가? 재현이 형을 누른 것이.

시합을 분석해 보면, 먼저 재현이 형의 공격에 좀 무딘 구석이 있었다는 게 승리의 가장 큰 원인이다. 물론 나의 리시브가 나아졌다는 이야기도 되겠지만. 포핸드 커트에 특히 신경을 써야겠다. (삽입: 포핸드 쪽 짧은 서브에 대한 리시브의 불안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루프 드라이브에 비해 전진 드라이브가 약한 점도 커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무리한 볼 처리는 많이 줄었으나, 랠리가 길어질 때 마음의 여유를 갖는 버릇을 길러야겠다. 이 공이 아니더라도 다음 공이 있다. 다만 상대방이 공격하기 쉽게 안겨 주어선 안 된다는 점이다. 그래도, 상대가 공격할 때는 어쩔 수 없다.

 

*72(김영관과의 시합에서 30으로 이기고(보충: 김영관은 <탁구 사랑회> 후배인데, 고등학교 때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이때는 몰랐으나, 원래 영관이는 셰이크 전형인데, 이 날은 펜홀더로 쳤다.)

기쁘다. 탁구 친 보람을 비로소 느끼는 것 같다. 이때까지의 노력, 이때까지의 훈련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듯하다. 더욱 즐거운 것은 허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역시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 그것만이 잘못된 것을 똑바로 잡아줄 수 있는 길이다. 단 십일 간의 훈련으로 이렇게 변하지 않았는가? 앞으로 남은 기간(삽입: 서울대에서 개최한 <전국 대학 탁구 동호인 대회>717일 있을 예정이었다), 자만하지 말고 열심히 훈련하자. 목표는 미스 민 아줌마를 이기는 것이다.

한 가지 지적할 점은 절대로 무리한 승부수를 띄우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순리를 따라 치는 것. 승부수는 항상 마지막에 그래도 뒤는 조심할 것.

 

*75(미스 민 아줌마와의 시합)

아줌마를 이긴다는 것은 아직은 무리다. 요번 시합까지의 목표는 전 세트에서 15점 이상을 따는 것으로 해야겠다.

훈련의 가장 큰 성과는 쇼트가 좋아졌다는 것이다. 드라이브는 아직 실전에서 큰 효과를 거둘 정도는 아니다. 하수하고의 시합에서나 유리할까? 전형이 지금 어중간한 상태인데, 일단은 올라운드 플레이를 하도록 하고, 점차적으로 드라이브 전형으로 바꾸도록 해야겠다.

드라이브를 걸고 난 뒤의 상대방 쇼트 공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관건이다.

 

*75(주인아저씨와의 시합에서 알수를 2개에서 0개로 내림. 그러나 맞잡고 쳐서는 12로 짐)

주인아저씨는 공격력이 약한 대신 볼 컨트롤이 좋다. 특히 백푸시가 일품이다.

나의 파워를 살리지 못하고 볼 컨트롤과 파백의 전환으로 아저씨와 맞붙으려고 했다는 점이 패인이다.

그러나, 오늘 시합에서 하나 배운 게 있다면(경수와의 시합에서 배운 것이기도 하지만), 오시성 서브(삽입: 회전 서브라고 하는 것이 적당하겠다)는 한 포인트 늦춰서 약하게 받으라는 것이다. 드라이브 연결 연습이 더욱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1019(현역 고등학교 탁구 선수인 은정이와 시합을 하고 나서, 일기에서)

나에게 깨달음을 가져다주었다. 중요한 체험이었다. 나의 탁구가 줄었다는 신 선생님의 말씀(보충: 신 선생님은 은평구 구산동의 탁구장에서 레슨을 하고 있어서, 세 번 찾아가 뵈었다)을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브, 리시브, 쇼트, 드라이브가 모두 늘었고(스매싱이 다소 줄긴 했지만), 윤재현 형이나, 채우철과의 시합 결과는 게임 운영도 많이 나아졌음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은정이와의 시합은 강한 공격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강공이 둔화되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신 선생님의 견해는 타당성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아저씨와의 시합에서 별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게 그 예일 것이다. 그러나, 은정과의 시합을 통해 얻은 교훈은 단지 탁구에 그치는 게 아니다. 보다 더 중요한 측면에 대한 깨달음이다. 능력에 대한 회의는 열과 성을 다해 본격적으로 뭔가에 몰두해 본 사람이 아니라면 무의미한 것이라는 점이다.

 

*94323(미스 민 아줌마와의 시합(14), 아줌마의 남편 되는 분과의 시합(32) , 일기에서)

아줌마와의 시합에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아줌마가 한 때는 프로였다는 점이다. 여자이고, 더군다나 몸이 좋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공격적으로 탁구를 치진 않지만, 아줌마의 공을 무턱대고 공격하려다가는 미스를 범하거나, 역공을 당할 위험이 크다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선제를 잡으려는(먼저 공격하려는) 시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탁구는 공격이 유리한 스포츠라는 걸 명심해라.

아직 아줌마를 이기기는 힘들다. 무엇보다도 드라이브의 파워가 약하다는 게 최대의 약점이다. 아줌마와의 시합 뒤에 있었던 아저씨(남편 되는 분)와의 시합에서 나의 드라이브는 거의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그대로 맞받아 쳐버리기가 일쑤였으니까. 회전(루프) 드라이브보다 전진 드라이브를 거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부단한 연습만이 해답이다.

아줌마의 말대로 드라이브가 나의 전공은 아니었다는 점, 드라이브 전형으로 스타일을 바꾸어 나가는 중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스매싱이 강하다는 나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게임을 풀어나가는 작전도 필요하다.

 

*514(총장배 교내 경기에서 박진석에게 20(2115, 2321)으로 패하고 난 후)

정말로 실패는, 아니 패배는 언젠가의 승리를 위한 밑거름일까? 나의 4년간의 노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라고 말하는 건 나의 어리석음이다. 2번째 세트에서 듀스까지 간 것이 노력의 대가라고 말하는 게 더 타당할 것 같다. 공격력에 있어서 진석이에게 밀린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진석이의 공격은, 혹은 스텝은 탁구 교본에 나오는 그대로였다. 2세트에서 1218로 뒤지다가, 2120으로 역전시킨 것만 해도 대단한 투지였다. 결정적인 실수는, 그 상황에서, 진석이의 공을 커트로 수비한 것이다. 상대방의 미스를 유도해 낼 수 있다면 요번 세트는 내가 따낼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이 게임을 망쳐 버렸다. 상대방의 파 사이드인(진석이는 왼손 셰이크였다) 백 쪽으로, 짧지도 아주 길지도 않은 어중간한 커트를 준 것이다.

이번 시합에서 얻은 교훈은 자신에 대한 100%의 믿음이다. 그것 없이 시합을 이끌어 나갈 순 없는 노릇이고,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끈질긴 연습이 필요하다.

기분이 정말 나쁘다. 졌다는 사실이. 그러나, 너무 위로만 보지 말 것이다. 추락할 수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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