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콘래드, 조지프/콘래드아프리카제국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 전체주의의 기원. 박미애. 한길사 (1973) [1951] 4

by 길철현 2019. 1. 9.

제6장 인종주의 이전의 인종사상


(319) 히틀러주의가 1930년대 국제 사회와 유럽 사회에서 강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인종주의가 비록 독일에서만 국가의 원리였음에도 이미 곳곳의 여론에서 강력한 추세가 되기 때문이다.

(320) 문제의 역사적 진실은 인종사상의 기원이 18세기에 있지만 19세기에 모든 서구 국가에서 동시에 출현했다는 것이다. 인종주의는 세기 전환기에 제국주의 정책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 인종주의가 옛 유형의 인종 견해들을 모두 흡수하고 다시 활성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과거의 인종사상들은 하나의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로서의 인종주의를 창조하거나 그것으로 전환할 수는 없었다.

(토크빌 - 고비노: 그것들은 십중팔구 틀렸으며 분명 유해하다.)

(321) 강력한 이데올로기

1. 역사를 계급의 경제적 투쟁으로 해석

2. 인종의 자연적 싸움으로 해석

(321) 오늘 날 그 범주 체계 안에 인종사상이 깊이 침투되어 있지 않은 학문이 하나도 없는 것은 과학적 발견 때문이 아니라 이 '과학적 설교자 때문이다.

today no single science is left into whose categorical system race-thinking has not deeply penetrated 160


(323) 인종주의가 제국주의 정치의 주된 이데올로기적 무기


1. 시민의 '민족'에 대항하는 귀족의 '인종'

(329) 프랑스 귀족이 부르주아 계급과의 투쟁에서 자신들은 다른 민족에 속하고 다른 계보학적 기원을 가지며 프랑스보다는 국제적 신분계급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초창기부터 프랑스의 모든 인종은 게르만주의를 옹호하거나 아니면 프랑스인과 비교해서 적어도 북유럽인의 우월성을 지지했다.


2. 국가 해방의 대체물로서의 인종의 단일성

(330) 시민전쟁의 무기이자 국민을 분열시킨 프랑스의 인종사상과는 대조적으로 독일의 인종사상은 외국의 지배에 대항하여 국민을 통합시키려는 노력에서 고안되었다.

(334) 근대의 독일 학자들은 현실이 위험에 처할 경우, 다시 말해 그들의 지위라는 현실이 위험에 처할 경우 그들이 기꺼이 제시하지 않을 이데올로기는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때보다 잘 입증했다.

(335) 낭만주의의 무정한 개인주의는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낼 자유가 있다"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모든 이데올로기의 이면에는 "자신의 이익이 궁극적으로 깔려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가?]


3.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결의 열쇠

(338) 1853년 아르투르 드 고비노(Arthur de Gobineau) 백작 - [인종 불평등론]

- 이 책은 50년도 채 안 된 19세기의 전환기에 역사적으로 인종 이론의 기본서가 됨.

(341) 죽음과 무역의 명랑한 춤

[흥미로운 제목]

(341) 그는 프랑스 신분 제도의 몰락을 처음에는 프랑스의 몰락, 다음에는 서구 문명의 몰락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 인류의 몰락과 차례차례 동일시했다. 그렇게 하여 그는 후대의 작가들과 전기 작가들이 그토록 칭송한 발견, 즉 문명의 몰락은 인종의 퇴화에 기인하며 인종의 몰락은 혈통의 혼합에 기인한다는 발견을 했던 것이다.

(343) 프랑스는 당시 흑인조차 시민권을 누리는 유일한 국가.

[19세기 중반 정도]

(344) 에른스트 르낭: 비록 지역적 독창성과 인종 간의 원천적 차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대한 힘이 바로 문명이라고 주장했지만, 단호한 "인간 종의 구분"을 통해 '셈족'을 '아리안족'에 대립시킨 최초의 인물

(주39 - 고비노: 셈족은 흑인과 섞여 질이 떨어진 백인 잡종 인종)


4. '영국인의 권리' 대 인간의 권리

(346) 에드먼드 버크 - 영국 국민을 전체 국가 가운데 일종의 귀족계급으로 설정.

(347) 귀족적 기준의 수용으로 말미암아 영국식의 인종사상은 상속 이론과 근대적 등가물인 우생학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인류 개념에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을 포함시키려는 실질적인 시도를 한 이후 자신들과 다른 대륙에서 발견한 사람들 사이의 상당한 신체적 차이 때문에 화가 나 있었다.

(주44. 볼테르 [철학사전] 인간 - "게다가 우리는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인종들이 얼마나 서로 다른지 그리고 서로 만났던 최초의 흑인과 백인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을지를 보았다.")

(348) 토크빌 - 18세기에는 "인종의 다양성을 믿었지만 인류의 화합을 믿었다."

헤르더(독일) - 인종이라는 "천박한 단어"를 인간에게 적용하기를 거부.

(349) 다원설(polygenism) - 혼혈인은 참된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인종에도 속하지 않고 "모든 세포가 내란의 무대"인 일종의 괴물이다.

(350) 다윈주의는 상속(유전inheritance)을 토대로 인종과 계급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무기를 제공한 까닭에 다른 모든 교리를 압도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고 인종차별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양쪽 모두에게 이용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말한다면 다윈주의 자체는 중립적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가장 첨예한 형태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평화주의와 세계주의를 낳았다.  

[하지만 사회 진화론, 사회 다윈주의는 인종차별 정책,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봉사.] [이 부분의 언급들 중요]

- 1870년~80년대 영국에서 다윈주의는 공리주의와 반식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의 손아귀에 있었다. 사회학을 생물학의 일부로 취급한 최초의 진화론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는 자연도태가 인류의 진화에 유익하며 영구 평화를 가져오리라 믿었다.

- 적자생존/ 우생학

(351) 허버트 스펜서뿐만 아니라 초기의 모든 진화론자와 다윈주의자들은 "인간의 유인원적 기원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천사 같은 인간의 미래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선택된 유전은 "유전적인 천재"로 귀결된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귀족제는 정치의 산물이 아니라 자연 도태의 결과이자 순수한 혈통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라는 주장이 다시 제기.

(358) 인종사상은 여러 가지 정치적 갈등을 위한 편리한 논증을 대주는 원천이기는 하지만 그 나라의 정치적 삶에 어떤 독점적 권리도 소유하지 않았다. . . . 인종주의는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고비노나 디즈레일리와 같은 '인종'의 열렬한 옹호자들에게조차 전적으로 낯선 경험과 정치적 정황에서 발생했다. . . . '아프리카 쟁탈'과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로 인해 서구인들이 새롭고 놀라운 경험에 노출되지 않았더라면, 인종적 관점의 사유는 분명 19세기의 다른 무책임한 견해들과 더불어 사라졌을 것이다. 설령 인종사상이 문명세계에 그때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국주의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유일하게 가능한 '설명'과 변명으로 인종주의를 고안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