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대륙의 제국주의: 범민족 운동
(419) 나치즘과 볼셰비즘은 어떤 다른 이데올로기나 정치 운동보다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에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421) 주8 - 범게르만 동맹의 에른스트 하세(Ernst Hasse)는 특정한 민족들(폴란드인, 체코인, 유대인, 이탈리아인 등)을 해외 제국주의가 비유럽 대륙에서 원주민들을 다루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다룰 것을 제안했다.
423) 해외 제국주의가 모든 계급의 쓰레기들에게 실제로 충분한 만병통치약을 제공한 반면, 대륙 제국주의는 이데올로기와 운동 외에는 제공할 것이 없었다.
1. 종족 민족주의
430) 범민족 운동의 반유대주의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유대인 증오가 처음으로 유대 민족과 관련된 실질적인 경험들,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경험들과 분리되어 오로지 이데올로기의 고유한 논리를 따른다는 것이었다.
435) 상대적인 우월성, 민족 사명이나 백인의 체험으로 만족했던 해외 제국주의와는 대조적으로 범민족 운동은 선민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 주장으로 출발했다.
436) 자칭 쇠너러의 사제였던 히틀러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이렇게 진술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우리 민족을 창조하셨다. 우리 민족을 수호함으로써 우리는 신의 창조물을 수호하는 것이다." 다른 편, 즉 범슬라브주의의 지지자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답변도 마찬가지로 그 유형에 충실한 것이다. "독일의 야수들은 우리의 적일 뿐만 아니라 신의 적이다."
440) 가장 탁월한 반민족주의적 교의인 마르크스주의를 광신적으로 수용한 볼셰비즘도 범슬라브주의 선전이 다시 소비에트 러시아에 도입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 이론들이 한 민족을 다른 모든 민족들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447) 유대인다운 태도, 이 유대인의 종족 민족주의는 근대 국가 내에서 유대인이 차지하고 있던 비정상적인 위치, 즉 사회와 국가의 경계 밖의 위치로 빚어진 결과였다. 단지 다른 서구 국가들의 사례를 통해 자신들의 민족성을 의식하게 된 소수민족 집단의 불안정한 위치와 나중에 인종주의가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뿌리 뽑힌 대도시 대중의 위치는 여러 면에서 유사점이 많았다. 이들은 모두 사회의 경계 밖에 존재했고, 국민의 정치 조직으로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조직처럼 보였던 국민국가의 정치 체제 외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449) 그[히틀러]는 '가장 나쁜' 민족이 존재한다는 반유대주의 주장을 이용하여 '가장 훌륭한' 민족과 '가장 나쁜 민족' 사이에 피정복, 피지배 민족들을 조직할 줄 알았고, 범민족 운동의 우월 콤플렉스를 일반화하여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민족이 자신들보다 더 나쁜 한 민족을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450) 볼테르에서 르낭과 텐에 이르는 '계몽주의자'들의 주장, 즉 유대인의 선민 개념 그리고 종교와 민족을 동일시하는 경향과 역사에서 절대적인 점유하고 있으며 신과 유일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유대인의 주장이 서구 문명에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광신적 요소를 (진리의 배타적인 소유를 주장하는 기독교에 의해 전해 내려온) 들여왔으며, 다른 한편으로 위험스럽게 인종적 왜곡에 가까운 민족적 자부심이라는 요소를 들여왔다는 그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451) 인종주의자들의 유대인 증오는 신이 선택한 민족, 신의 섭리로 성공을 보장받은 민족이 자신들이 아니라 유대인일지도 모른다는 미신적 우려에서 나왔다.
2. 무법의 유산
459) 무정부적 권력을 이렇게 신비화함으로써 범슬라브주의는 모든 권력의 초월적인 성격과 내재적인 선함이라는 가장 유해한 이론을 탄생시켰다.
461) 볼셰비즘이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것만큼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가 헤겔의 영향을 받은 것은 물론 우연이 아니다.
3. 정당과 운동
464) 작고 비교적 무해한 제국주의 단체들과 전체주의 운동 사이에 위치해 있던 범민족 운동은 모든 제국주의 동맹에서 볼 수 있던 속물근성--부나 출생을 중시하는 영국의 속물근성이든, 교육을 숭배하는 독일의 속물근성이든--을 너무나 확실하게 떨쳐버렸다는 점에서, 또 국민을 대표한다고 간주되는 제도들에 대한 대중의 증오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의 선구자였다.
472) "정당을 초월한 정당"의 진정한 목표는 자신들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관철하여 다른 이해관계들을 모두 파괴하는 것이며, 하나의 특별한 집단이 국가 기구의 지배자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결국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에서 일어났다.
473) 파시즘 정당은 결코 운동이 아니었고, 단지 대중을 유혹하기 위해 '운동'이라는 표어를 찬탈했을 뿐이라는 사실은, 나치가 국가 기관을 장악하면서 나라의 권력 구조를 과감하게 개혁하지 않았고, 모든 정부 요직을 당원들로 채우는 것에 만족했을 때 곧 명확해진다. 정당이 '온동'이기를 그치고 근본적으로 안정된 국가 구조의 구속을 받게 되었던 것은 정당과 국가를 동일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치나 볼셰비즘은 항상 이런 동일시 현상을 조심스럽게벡 피하고자 했다.
481) 유럽의 정당 제도는 히틀러의 권력 장악과 함께 극적인 방식으로 붕괴되었다. 지금에 와서 종종 쉽게 잊어버리는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독재 형태를 수용하고 있었고, 통치에 이런 혁명적 변화가 대부분의 국가에서 혁명적 대변동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485) 유럽 국가에서 정당 결성 -1848년 이후
[영국은 정당 정치가 일찍부터 발달하지 않았던가?]
제9장 국민국가의 몰락과 인권의 종말
492) 나치 친위대(SS)의 공식 신문인 [검은 군단]은 1938년 세계가 유대인이 지구의 쓰레기라는 사실을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면, 국적도 없고 돈도 없으며 여권도 없는 정체불명의 거지들이 자신들의 국경을 통과할 때면 곧 알게 될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
1) '소수민족 국가'와 국적 없는 민족
(503) 현대사에서 가장 최근에 등장한 대중 현상인 이 무국적 문제는 현실적으로 너무나 확고부동한 사실이고 그 결과가 미치는 파장이 길었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현대 정치의 징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무국적자들에 속하게 되었다.
506)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양차 세계 대전 사이에 많은 수의 주민들을 적절한 때에 제거할 수 있는 새로운 법령을, 설령 이 권리를 포괄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통과시키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517) 점점 더 많은 수의 거주자들이 법의 관할권 밖에서 법적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고 살아야 할 때 그 국가의 법 제도의 구조 자체가 없는 손상.
521) 나치가 한 사람을 강제 수용소로 보내고 그가 예컨대 네덜란드로 성공적으로 탈출하게 된다면,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를 포로 수용소로 보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많은 서구 국가에서 경찰은 '국가 안전'을 구실로 독자적으로 계슈타포 및 GPU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
522) 히틀러가 유대인 문제를 해결한 방식, 즉 먼저 독일 유대인들을 독일에 사는 비공인 소수민족으로 만든 다음 이들을 무국적 민족으로서 국경 밖으로 쫓아내고 마지막으로 이들을 각지에서 다시 모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는 방식은, 소수민족이나 무국적자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일시에 '청산'할 수 있다는 것을 나머지 세상에 과시하는 것이었음을 알아차린 정치인은 아무도 없었다.
2) 인권의 난제들
524) 18세기 인권 선언은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인권 선언이 의미하는 바는 그때부터 신의 명령이나 역사적인 관습이 아니라 인간이 법의 근원이 된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역사가 특정한 계층의 사회나 특정한 국가에 부여한 특권과는 무관하게 인권 선언은 인간이 모든 후견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했고 그가 이제 성년이 되었다고 공언했다.
529) 제2차세계대전 동안 무국적자들은 항상 적국 출신 외국인들보다 나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후자는 여전히 간접적으로 국제 협정을 통해 자국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533) 노예제가 인권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은 자유를 빼앗아서가 아니라(자유의 박탈은 많은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다) 특정한 범주의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가능성--참주정치 심지어 현대의 공포정치의 절망적인 조건 아래서도(그러나 수용소 생활의 조건 아래서는 그렇지 않다) 가능한 싸움--을 배제했다는 데 있다.
535) 18세기의 인간이 역사로부터 해방되었듯이 20세기의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역사와 자연은 똑같이 우리에게 낯설게 되었다. 즉 인간의 본질은 어느 범주를 가지고도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537) 버크에 따르면, 우리가 누리는 권리는 "국가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에 자연법이나 신의 명령도, 또 "지구의 주권자로서 인류"라는 로베스피에르의 인류 개념을 비롯한 어떤 인류 개념도 법의 근원으로 필요하지 않다.
539) 야만인 부족의 비극은 그들이 지배할 수 없는 불변의 자연 속에 살면서 생계를 위해 자연의 풍부함과 검소함에 의존하고 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으며, 공동의 세계에 어떤 기여도 하지 않고 살다가 죽는 데 있다면, 이 무국적자들은 실제로 자연의 고유한 상태로 다시 던져진 셈이다. 물론 그들은 야만인이 아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출신 국가에서 가장 교육받은 사회계층에 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만 상태를 거의 제거한 세상에서 그들은 문명의 퇴보가 가능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징후였다.
[아렌트의 이런 언급 또한 인종주의적인 것이고,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을 따른 결과이다.]
-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면 할수록, 문명이 산출한 세상이 더욱 완성되면 될수록, 인간이 자신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생산물에서 편안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자신들이 만들지 않은 모든 것, 수수께끼처럼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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