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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래드, 조지프/콘래드아프리카제국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 전체주의의 기원. 한길사 (1973) [1951] 10

by 길철현 2019. 1. 9.

[감상] 


이 책 또한 논문 작업에 필요해서 집어든 책이다. 어떤 평론가가 콘래드의 [진보의 전초기지]에 나오는 두 인물, 카이어츠와 칼리에를 '폭민의 일종'으로 본 내용이 있었고, 그게 논문을 쓰는데 도움이 될 듯했기 때문이다(아렌트 자신은 [어둠의 심연]에 나오는 커츠를 폭민과 연결시키고 있다). 책이 워낙 방대하여 일부만 읽을까하다가, 3부로 된 이 책 중 2부가 제국주의 편이라, 논문과의 관련성이 더욱 커 보였고, 그래서 과감하게? 처음부터 읽어나갔는데, 40일 정도만에(18년 12월 17일에 시작) 읽고, 정리하는 걸 마쳤고(읽고 난 뒤에 몇 달이 지나서야 겨우 정리를 하는 악습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듯),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감상을 적고 있다. (중간중간에 따분하고 다소 난해하고, 세부적인 사항의 나열 등으로 인내심이 필요한 때가 많았는데, 또 중간에는 수면 부족으로 머리가 멍해서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지나간 부분도 상당 부분이다. 그렇지만 이 방대한 저작을 영어로 읽지 못하고 한글 번역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 읽어냈다는 것이 뿌듯하다. 영어 실력의 부족이 뼈저리다.)


유대인인 한나 아렌트는 그 때문에 나치의 집권과 함께 프랑스로 미국으로 망명을 가야 했고, 몇 년 동안은 무국적자로 지내야 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긴 했어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대학살을 당해야만 했던 현실, 또 스탈린 치하의 볼셰비즘 아래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현실, 즉 도저히 이성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현대의 전체주의 앞에서 그녀는 '인간이라는 것' '인간으로 산다는 것' '인간의 광기'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그녀의 분석이 어느 정도 정확한 것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으나, 반유대주의(인종주의), 제국주의 등이 현대의 전체주의와 한 줄로 꿰어지고, 그것은 일반 대중들의 '잉여감' '소외감' 등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주된 논지라고 할 수 있다. 결말 부분에 쓴 그녀의 글은 시적인 감성을 포함하고 있어서 감동적이다. 그리고 그녀가 경고하고 있는 것은 전체주의라는 절대악이 일회적인 현상이 아니고,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 현상을 실제로 캄보디아의 폴포트 정권, 인도네시아의 대학살, 유고슬라비아의 전쟁, 아프리카에서의 각종 분쟁 등에서 보아 왔다(그녀의 개념 정의에 꼭 맞는 것은 아니겠으나). 


우리는 분단 국가로서 늘 전쟁의 위험을 안고 살아 왔지만, 지난 65년 간 운좋게도 전쟁을 겪지 않았고, 독재 정권 아래서 불안에 떨기도 했지만 그래도 경제적 발전과 함께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 은 상황에 무감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한편으로는 의미하는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10년 가까운 시간을 들여 이 방대한 저작을 공들여 번역한 이진우, 박미애 두 분의 노고에도 감사를 드린다.)


[최종 발췌]

(24)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으로부터 출발한 전체주의적 운동이 결국 "모든 것은 파괴될 수 있다'는 것만을 보여주었다면, 전체주의는 우리에게 항상 자유에 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한다.

- 전체주의를 가능하게 만든 핵심적 요소는 당시 근대사회에 만연했던 '쓸모없는 존재'(superflousness)의 경험이었다. 이 경험은 근대 국민국가가 몰락하고 현대적 대중사회가 출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35) 문제는 우리 시대의 선과 악은 너무나 기묘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팽창을 위한 팽창'이 없었다면 세계는 결코 하나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 장치인 '권력을 위한 권력'이 없엇다면 인간이 가진 힘의 크기는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 불확실성이라는 우리 시대의 본질을 너무나 명료하게 보여주는 전체주의 운동의 허구세계가 없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파멸을 향해 질주했을 것이다.


(54) 제국주의 시대 이전에는 세계 정치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세계 경제가 없었다면 세계 지배에 대한 전체주의의 권리 주장은 이해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242) 폭민은 일차적으로 각 계급의 낙오자들을 대표하는 집단이다. (이 때문에 폭민을 국민과 혼동하기 쉽다. 국민 역시 모든 계층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국민이 모든 혁명에서 진정한 대의제를 위해 투쟁했다면, 폭민은 항상 '강한 자', '위대한 지도자'를 소리 높여 외친다. 폭민은 자신을 소외시킨 사회를 증오하며, 자신을 대변해주지 않는 의회 역시 증오하기 때문이다.  


(244) 폭민의 눈에는 유대인이 자신들이 증오하는 모든 것에 대한 구체적 실례였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사회를 증오한다면 사회가 유대인을 얼마나 관대하게 다루는지를 지적할 수 있었다. 그들이 정부를 증오한다면, 국가가 어떻게 유대인들을 감싸며 이들과 한통속인가를 지적하면 되었다. 폭민이 유대인만을 제물로 삼았다는 생각은 잘못되었지만, 어쨌든 유대인은 그들이 애호하는 희생물 중 으뜸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268) "팽창이 전부다"라고 말했던 세실 로즈는 매일 밤 머리 위 하늘을 쳐다보면서, "우리가 결코 갈 수 없는 저 별들, 저 거대한 세계들, 할 수만 있다면 훔쳤으면 좋으려만"하고 절망했다.

("EXPANSION is everything," said Cecil Rhodes, and fell into despair, for every night he saw overhaed, "these stars . . . these vast worlds which we can never reach. I would annex the planets If I could." (124)


(271) 정치의 영원한 최상 목적인 팽창은 제국주의의 중심적인 정치 이념이다. 팽창은 일시적인 약탈 행위도 정복을 통한 지속적인 동화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사상과 행위의 유구한 역사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개념이다. 이 개념이 이렇게 놀라운 독창성을 가지는 이유--전적으로 새로운 개념이란 정치에서 매우 희귀하기 때문에 놀랍다--는 이 개념이 실제로 정치 개념이 아니라 사업 투기의 영역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이 영역에서 팽창은 19세기의 특징인 산업 생산과 경제 거래의 영속적인 확장을 의미한다


300) 권력 축적 기계장치가 없다면 지속적인 팽창은 가능하지 않는데, 이 기계는 자신의 무한한 과정 속으로 삼켜버릴 수 있는 재료들을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마지막 승자로 남은 국가가 '혹성을 합병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권력 생산의 무한한 과정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306) -주49. Hilferding -사회적으로 팽창은 자본주의 사회의 보존을 위한 절대 필요한 조건이다. 경제적으로 그것은 이윤율의 유지와 일시적인 이윤율 증가를 위한 조건이다.

(307) 제국주의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사실은 남아도는 이 두 세력, 잉여 자본과 잉여 인력이 손을 잡고 함께 나라를 떠났다는 것이다


(309) 마르크스주의자의 관점에서 폭민과 자본의 동맹이라는 새로운 현상은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계급 투쟁의 교리와도 명백하게 배치되기 때문에 제국주의적 시도의 실질적 위험--인류를 주인 인종과 노예 인종으로, 고급 종족과 하급 종족으로, 유색 민족과 백인으로 나누는 것, 이 모든 것은 국민을 폭민의 토대 위에서 통합하려는 시도였다--을 완전히 간과했다


(314) 역사적 염세주의자들은 이 새로운 사회 계층의 본질적인 무책임성을 알았고 또 민주주의가 전제정치로, 그 독재자들이 폭민에게서 발생하고 폭민을 지지 기반으로 둘 그런 전제정치로 바뀔 가능성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그들이 알지 못한 사실은 폭민이 부르주아 사회의 폐물일 뿐만 아니라 이 사회가 직접 생산한 부산물이며, 그래서 결코 이 사회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317) 인종주의는 실제로 서구 세계와 전체 인간 문명의 운명을 완성할지도 모른다. 러시아인이 슬라브족이 되고, 프랑스인이 흑인 부대의 지휘자 역할을 맡고 영국인이 '백인'으로 변한다면, 모든 독일인이 아리아인이 되었다는 불길한 주문처럼, 그렇게 되면 이 변화는 그 자체 서구인의 종말을 의미한다. 학식 있는 과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건 간에 인종은, 정치적으로 말해서, 인류의 시작이 아니라 종말이고 민족의 기원이 아니라 쇠퇴이며, 인간의 자연적 탄생이 아니라 그의 부자연스러운 죽음이기 때문이다

(320) 문제의 역사적 진실은 인종사상의 기원이 18세기에 있지만 19세기에 모든 서구 국가에서 동시에 출현했다는 것이다. 인종주의는 세기 전환기에 제국주의 정책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 인종주의가 옛 유형의 인종 견해들을 모두 흡수하고 다시 활성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과거의 인종사상들은 하나의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로서의 인종주의를 창조하거나 그것으로 전환할 수는 없었다.


(348) 토크빌 - 18세기에는 "인종의 다양성을 믿었지만 인류의 화합을 믿었다."

헤르더(독일) - 인종이라는 "천박한 단어"를 인간에게 적용하기를 거부.

(349) 다원설(polygenism) - 혼혈인은 참된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인종에도 속하지 않고 "모든 세포가 내란의 무대"인 일종의 괴물이다.

(350) 다윈주의는 상속(유전inheritance)을 토대로 인종과 계급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무기를 제공한 까닭에 다른 모든 교리를 압도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고 인종차별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양쪽 모두에게 이용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말한다면 다윈주의 자체는 중립적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가장 첨예한 형태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평화주의와 세계주의를 낳았다.  

[하지만 사회 진화론, 사회 다윈주의는 인종차별 정책,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봉사.] [이 부분의 언급들 중요]


(361) - 유럽인이나 문명인이 전혀 이해할 수 없던 사람들, 그들의 인간성이 이민자들에게 너무나 두렵고 치욕적이어서 같은 인간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던 사람들을 설명하는 임시방편이 인종이었다. 인종은 사람을 압도하는 아프리카의 기괴함--야만인들이 거주하고 그들로 넘쳐흐르는 전체 대륙--에 대한 보어인들의 대답이었다. 그것은 "청천벽력"처럼 그들을 사로잡아 눈을 뜨게 했던 광기의 설명이었다. "모든 짐승들을 절멸하라." 


(366) 남아프리카 골드러시의 새로운 경향은 이곳에 있던 행운 사냥꾼들이 문명 사회의 외부에 존재하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 반대로 매우 분명하게 이 사회의 부산물, 자본주의 제도의 불가피한 찌꺼기이며 잔인하게 잉여 인력과 잉여 자본을 생산하는 경제의 대표

[아렌트는 행운 사냥꾼의 예로 커츠를 들고 있지만 커츠보다는 [진보]에 나오는 두 사람에게 더욱 잘 들어맞는 지적.]


(367) 또한 그들은 자발적으로 사회로부터 걸어나온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들에게 침을 뱉고 내쫓은 것이다. 그들은 문명의 허용된 경계 너머로 모험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쓸모없고 기능이 없는 단순한 희생자였다. 그들의 유일한 선택은 부정적인 것, 즉 노동 운동을 거부하는 결정이었다.

[정확하게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글을 토대로 해서 논의를 전개시켜 볼 수는 있다.]

- 콘래드의 [암흑의 심장]에 나오는 쿠르츠 씨처럼 그들은 "속속들이 텅 비어 있었고" "두둑한 배짱도 없이 무모했으며 호방함이 없이 탐욕스러웠고 용기 없이 잔인했다." 


(368) 카를 페터스(쿠르츠의 모델이었을 것이다) -- 하층 떠돌이로 취급받는 데 신물이 나서 이제 주인종에 속하기를 원한다. 


(376) 모든 이데올로기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은 완강하게 인간적 면모를 간직하기를 고집했기 때문에, '백인들'은 자신들의 인간성을 재규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 자신은 인간 이상의 존재이며 명백하게 신에 의해 흑인들의 신이 되도록 선택되었다고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런 결론은 야만인과의 모든 공통적인 끈을 극단적으로 부정하기를 원할 때 피할 수 없는 논리적인 결론이다. 


(408) 자신은[로즈] 절대로 "그릇된 일을 할 수 없으며 자신이 한 일은 항상 옳다"고 말할 정도로 로즈는 분별력을 잃게 되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였다. 그는 스스로를 신으로--그 이하는 결코 아니었다--느꼈다. 


(421) 주8 - 범게르만 동맹의 에른스트 하세(Ernst Hasse)는 특정한 민족들(폴란드인, 체코인, 유대인, 이탈리아인 등)을 해외 제국주의가 비유럽 대륙에서 원주민들을 다루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다룰 것을 제안했다.  


450) 볼테르에서 르낭과 텐에 이르는 '계몽주의자'들의 주장, 즉 유대인의 선민 개념 그리고 종교와 민족을 동일시하는 경향과 역사에서 절대적인 점유하고 있으며 신과 유일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유대인의 주장이 서구 문명에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광신적 요소를 (진리의 배타적인 소유를 주장하는 기독교에 의해 전해 내려온) 들여왔으며, 다른 한편으로 위험스럽게 인종적 왜곡에 가까운 민족적 자부심이라는 요소를 들여왔다는 그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II

25) 단순히 수가 많거나 공공 업무에 관한 무관심 때문에, 아니면 이 둘 다의 이유로 인해 정당이나 자치 정부, 전문 조직 또는 노동조합처럼 공동 관심에 기초한 조직으로 통합될 수 없는 사람들을 상대할 때에만 '대중'(mass)이라는 용어는 적용된다. 대중은 잠재적으로 어느 국가에나 존재하며, 정당에 참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투표하러 가지도 않는 중립적이고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람들이 다수를 형성한다. 


28) 19세기 폭민 조직과 20세기 대중 운동의 결정적 차이는 쉽게 인지되지 않는다. 현대 전체주의 지도자들이 심리적, 정신적으로 초기의 폭민 지도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62) 엘리트의 문제와 폭민의 문제가 근본적인 방식으로 동일해졌고, 그것이 대중 문제와 대중의 심성 구조를 미리 보여주었다는 것은 전체주의 운동의 커다란 기회였다. 또한 그 때문에 지성적 엘리트와 폭민의 일시적 동맹이 나타날 수 있었다


84) 1939년 1월 독일 제국의회에서 행한 히틀러의 성명

- 나는 오늘 다시 한번 예언을 하고자 합니다. 유대인 금융업자들이 . . . 사람들을 세계 대전으로 내모는 데 성공할 경우, 그 결과는 유럽에서 유대인 인종의 전멸일 것입니다. 


189) 인간과 물질의 관점에서 고려할 수 있는 모든 행위와는 무관하게 작용하며 국가 이익과 국민의 행복에는 전적으로 무관심한 전체주의의 태도를 비전체주의 세계는 파악하지 못했고, 그래서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는 이상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223) 상식과 '평범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 한다.

What common sense and "normal people" refuse to believe is that everything is possible. (440-41)


223) 어떤 경우이든 최종 결과는 생명이 없는 인간이다. 다시 말하면 심리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며, 그가 심리학적으로 또는 다른 방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인간 세계로 복귀하는 것은 예수가 죽음에서 살린 나사로의 부활과 거의 유사하다. 심리학적인 설명이든 사회학적인 설명이든 모든 상식적 설명은 "공포와 전율에 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피상적"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을 더욱 부추길 뿐이다.


227) 질적인 발전과 변화라는 개념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전대미문의 극단적인 악의 출현이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기준도 역사적인 기준도 또는 그저 단순히 도덕적인 기준도 없다. 우리가 이해해왔던 그런 의미의 정치와 관련이 없어야 할 일이 현대 정치에서 중요한 문제가 된 것 같다는 인식 정도가 기껏해야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전부 아니면 무'가 문제인 것이다. 


249) 인간을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전체주의의 시도는 과잉 인구로 시달리는 지구에서 자신들이 별 쓸모없다는 것을 알게 된 현대 대중의 경험을 반영한다. 죽어가는 자들의 세계에서 인간은 처벌이 죄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지고 아무에게도 이윤을 가져다부지 않는 착취가 자행되는 생활방식을 통해 자신들이 쓸모없다는 것을 배운다. 이런 세상은 무의미가 매일매일 새롭게 생산되는 곳이다. 그러나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틀 안에서 이보다 더 사리에 맞고 논리적인 것이 없다. 


251)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 신앙은 이제까지 모든 것이 파괴될 수 있다는 것만 증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과정에서 전체주의 정권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 때, 그것은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악이 된다. 절대악은 이기심, 탐욕, 시기, 적개심, 권력욕이나 비겁함 같은 사악한 동기로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로도 복수할 수 없고 사랑으로도 참을 수 없으며 우정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 죽음의 공장이나 망각의 구멍 속에 있는 희생자들이 사형 집행인들의 눈에는 더이상 '인간'이 아닌 것처럼, 이 최신종 범죄자들은 인간에게 모두 죄가 있다는 의식 하에 우리가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영역 너머에 있다.


277) 고립과 무기력, 즉 근본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무능력은 항상 압제의 특성이었다. 사람들 사이의 정치 접촉은 압제 정부에서 차단되고, 행동하고 권력을 추구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파괴된다. 그러나 인간들 간의 모든 접촉이 깨진 것은 아니며 또 인간의 모든 능력이 파괴된 것도 아니다.


279) 외로움은 고독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