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규. 강인황 옮김. 서울; 이산, 2003.
1. 인류의 개척자들
(14) 아프리카인은 전 인류를 대신하여 지구에서 가장 살기 힘든 지역을 개척해 온 개척자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는 그들이 인류역사에 크게 공헌한 점이며, 아울러 그들이 존중받고 지원받으며 깊이 연구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16) 대부분의 열대 아프리카 지역이 처음으로 외부세계와 접촉하게 된 것은 노예무역을 통해서였다. 인구가 부족한 대륙에서 추종자를 늘리겠다는 엘리트들이 일상에 필요한 상품을 얻기 위해 그 대가로 사람을 수출했다는 것은 잔인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7) 아프리카 사회는 범상치 않은 생명력으로 유럽인의 지배에 저항했으며, 따라서 식민통치자가 국가를 형성하기란 그들의 아프리카인 선조들보다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인은 기계를 이용한 수송, 식자의 확산, 의료의 발달 등 중요한 혁신을 이룩하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의료의 발달은 인구를 늘리는 데 골몰했던 아프리카 사회에 그 수와 속도 면에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인구성장을 가져왔다.
(18) 아프리카인이 노예로서 가치를 얻게 된 것은 그들이 유라시아의 질병과 열대성 질병에 유난히 강한 저항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4.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동아프리카의 무역과 이슬람교
(102) (5-7세기의 이란 도기 발견)
- 인도양 무역이 나이저 강 중류의 상업망보다 약간 작은 규모의 현지 상업망과 이미 연계되어 있었음.
(103) 916년 알 마수디(al-Masudi ?~957))가 동아프리카 해안에서 발견했듯이 주요 수출품은 상아. 상아는 페르시아 만을 경유해 인도와 중국으로 건너갔다.
[10세기 경에 이미 상아가 중요한 수출품]
(104) 스와힐리어는 해외무역에 참여했던 최초의 아프리카인들에 의해 사용되다가, 이후 무역 확대와 함께 동아프리카 남쪽 해안으로 퍼져 나가 동아프리카 전 해안의 링구아 프랑카가 되었다.
- A.D. 1000년부터 동아프리카 해안의 이슬람화와 상업적 발전은 가속화되었다. 11~12세기 초반에는 적어도 8곳의 해안가 취락에 석조 모스크가 지어졌다.
- 11세기 상업의 팽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는 여태껏 어촌에 불과했던 탄자니아 남주 해안의 킬와에 무슬림 왕조가 창설된 것이다.
[명나라 정화의 선단, 인도와의 무역 등] [중세의 이 시기에, 그러니까 11-15세기에 교역이 활발. 16세기에 유럽 세력이 들어오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생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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