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이데올로기와 테러: 새로운 국가 형태
257) 전체주의 정부가 전례 없는 정부 형태라고 말하는 대신 우리는 그것이 정치 철학에서 정부의 본질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 기초가 되는 양자택일의 가능성, 즉 법적 정부와 무법 정부, 자의적 권력과 합법적 권력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파괴했다고 말할 수 있다.
258) 전체주의 국가와 문명세계 간의 연결 고리가 전체주의 정권의 기이한 범죄로 인해 끊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이 범죄는 단순한 공격성, 무자비함, 전쟁과 반역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법적 합의를 의식적으로 파괴했기 때문이다.
259) 인간 내면에 있는 자연 법칙의 표현으로서 인종의 법을 믿는 나치 신념의 근간은 인간이 자연적 발전의 산물이며 이 자연적 발전은 반드시 현재의 인간종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다윈의 이념이다. 이와 비슷하게 역사 법칙의 표현으로서 계급 투쟁을 믿는 볼셰비키의 신념을 뒷받침하는 것은 사회가 거대한 역사 운동의 산물이라는 마르크스의 사회관이다. 이 역사 운동은 자신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폐기 처분하게 되는 역사의 종말을 향해 경주한다.
- 마르크스의 역사적 접근과 다윈의 자연주의적 접근의 차이는 종종 지적되어 왔고, 이 경우 대개 그리고 정당하게도 마르크스에게 유리한 결론이 났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르크스가 다윈의 이론에 지대하고 긍정적인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을 잊는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역사학의 다윈"이라 부르는 것보다 마르크스의 학자적 업적을 칭송할 수 잇는 더 큰 찬사를 생각해낼 수 없었다.
- 다윈이 자연에 발전의 개념을 도입하고 또 적어도 생물학의 영역에서 자연의 운동은 순환 형태가 아니라 직선 형태, 즉 무한히 진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 것은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역사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 압도당하고 자연의 삶이 역사적인 것으로 간주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자생존이라는 '자연' 법칙은 마르크스의 가장 진보적 계급의 생존 법칙처럼 역사 법칙이며 또 그것만큼 인종주의에 의해 이용될 수 있었다.
[이 부분은 "굴드"의 글에 비추어 볼 때, 아렌트 측에서의 다소 오해가 있는 듯하다. 이 당시에는 이런 생각이 보편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261) 마르크스 - 노동 ; 자연이 강요하는 영원한 필연성으로서, 그것 없이 인간과 자연간의 신진대사는 있을 수 없으며 그러므로 생명도 없다.
264) 전체주의 지배는 시민의 자유(liberties)를 축소하거나 기본적인 자유를 말살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한된 지식에 의하면 전체주의는 인간의 마음에서 자유에 대한 사랑을 뿌리뽑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모든 자유의 전제가 되는 단 하나의 본질적인 필수조건, 즉 공간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운동 역량을 파괴한 것이다.
- 전체주의 정부의 본질인 총체적인 테러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또 인간에게 대항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연이나 역사의 힘에 운동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도구를 제공한다.
270) 19세기의 세계관과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가 전체주의적이지 않다. 비록 인종주의와 공산주의는 20세기의 결정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지만, 원칙에서 다른 것들보다 '더 전체주의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원래 이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던 경험적 요소들--세계 지배를 위한 인종들 간의 투쟁, 각국에서 정치 권력을 놓고 벌이던 계급들 간의 투쟁--이 다른 이데올로기의 경험보다 정치적으로 더 중요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274) 노동자들은 볼셰비키 통치 아래서 제정 러시아의 탄압에도 보장되었던 권리마저 잃었고, 독일 국민들은 독일 국가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요구에 대해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었던 전쟁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
[결말 부분 잘 볼 것]
277) 고립과 무기력, 즉 근본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무능력은 항상 압제의 특성이었다. 사람들 사이의 정치 접촉은 압제 정부에서 차단되고, 행동하고 권력을 추구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파괴된다. 그러나 인간들 간의 모든 접촉이 깨진 것은 아니며 또 인간의 모든 능력이 파괴된 것도 아니다.
277) 고립은, 인간들이 공동의 관심사를 추구하면서 함께 행동하는 삶의 정치 영역이 파괴되었을 때, 그들이 내몰린 막다른 골목을 말한다. 그러나 고립은 비록 권력을 파괴하고 행위 능력을 파괴하지만, 이른바 인간의 생산 활동을 온전하게 내버려둘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해서는 심지어 필요하기도 하다.
278) 인간이 제작인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노동하는 동물로 취급되며 그의 '자연과의 신진대사'가 어느 누구의 관심사도 되지 못할 때, 정치적인 행위 영역에서 자기의 자리를 잃은 고립된 인간은 사물의 세상에서도 버림을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고립은 외로움이 된다. 일반적으로 고립에 기초한 압제정치는 인간의 생산 능력을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러나 '노동자'에 대한 압제정치는 자동적으로, 예컨대 고대의 노예에 대한 지배처럼 고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롭기도 한 사람들에 대한 지배가 될 것이며 전체주의로 흘러갈 것이다.
279) 고립이 고독의 예비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뿌리 뽑힘은 무용지물의 예비 조건일 수 있다.
- 고독은 인간 조건의 기초적 요구와 모든 인간의 삶의 근본 경험 중 하나와 정반대가 된다. 심지어 물질적, 감각적인 세상에 대한 경험조차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우리의 공통 상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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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은 고독이 아니다. 고독은 혼자 있기를 요구하지만, 외로움은 다른 삶과 함께 있을 때 가장 날카롭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몇 가지 다소 빗나간 논평들과는 별도로--이 논평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카토의 진술처럼 역설적인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홀로 있을 때보다 덜 외로운 적은 없었다." 또는 차라리 "그가 그독 속에 있을 때보다 덜 외로운 적은 없었다."(Cicero, De Re Publica, I, 17)--그리스 출신 해방 노예 철학자인 에픽테투스가 처음으로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했던 것 같다. 그의 발견은 다소 우연히 이루어졌다. 그의 주 관심사는 고독도 외로움도 아니었고 절대적인 독립이라는 의미에서 혼자 있다는 문제였다. 에픽테투스(Dissertations, Book 3, ch. 13)에 의하면 외로운 사람은 그가 관계를 맺을 수도 없고 그를 향해 적개심을 노출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반대로 고독한 사람은 혼자이며 그래서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인간은 "자신과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나는 고독 속에서 나 자신과 함께 "나 혼자" 있으며, 그러므로 한 사람-안에-두 사람인 반면, 외로움 속에서 나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고 실제로 혼자 있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 모든 사유는 고독 속에서 이루어지며, 나와 나 자신의 대화이다. 그러나 한 사람-안의-두 사람이 전개하는 대화는 같은 인간들과의 접점을 잃지 않는다. 내가 사유의 대화를 함께 이어가는 동료 인간들이 이미 나 자신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고독의 문제는 한 사람-안의-두 사람이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정체성과 결코 오인될 수 없는 정체성을 가진 불변의 개인이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내 정체의 확인을 위해서 나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 고독한 사람들에게 교우 관계가 주는 가장 큰 장점은 그들을 다시 '전체'가 되게 하고, 항상 불명확한 존재로 남게 되는 사유의 대화에서 그들을 구해주며, 정체성을 복구시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한 사람의 한 목소리로 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독은 외로움이 될 수 있다. 내가 혼자 있으면서 나 자신의 자아에게 버림받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한다. 고독한 사람들이 이중성, 애매모호성과 의혹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줄 교우관계의 장점을 발견할 수 없을 때면 항상 외로움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281) 헤겔의 임종 : 한 사람 빼고는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역시 나를 오해했다.
282) 루터 - 인간은 그가 믿을 수 있는 존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신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283) 공포와 공포의 원인인 무기력이 반정치적 원칙으로서 인간을 정치 행위와는 반대되는 상황으로 던져넣는 것처럼, 외로움과 이 외로움의 결과, 즉 논리적-이데올로기적으로 최악의 경우를 추론하는 태도는 반사회적인 상황을 대변하며, 모든 인간적 공동 생활을 파괴하는 원칙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의 전제적, 자의적인 의지에 의해 지배당하는 모든 사람의 비조직적인 무기력보다 조직적인 외로움이 훨씬 더 위험하다.
284) 아우구스티누스 - 시작이 있기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다.
옮긴이의 말
319) 어떻게 인간이 다른 인간을 체계적으로 말살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사건이 이해되지 않으면 않을수록, 우리는 그것을 더욱더 빨리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려 한다. 우리가 달력을 뜯어내면 과거가 잊혀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으로 종종 착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20) 이 책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가 언제든지 다시 가능하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정치와 자유에 관해 성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의해 한 번 가능해진 것은 두 번 일어날 수도 있다. 자유주의적인 정치체제조차도 언제든지 전체주의의 세균에 다시 감염될 수 있다.
321) 근본악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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