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자발성의 강점과 약점
(123) 식민주의의 수혜로부터 배제된 원주민과 식민지적 착취를 이용하여 이득을 누리는 원주민들 사이의 적대감이다.
(127) 케냐의 마우마우 반란
[이 부분과 블릭센의 글과 어떤 괴리가 있는지를 보도록]
(138) 콩고에서는 1957년부터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량 청소년들'을 시골로 돌려보내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벨기에 군대의 보호 아래 이주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이 곳의 운영은 선교단의 손에 맡겨졌다.
(144) 농민 대중은 언제나 반란에 부응하지만, 만약 반란 지도자들이 대중을 배제하고도 일을 성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룸펜 프롤레타리아는 오히려 억압자의 편에서 온몸을 던져 싸울 것이다. 억압자는 당연히 흑인들끼리 서로 싸우는 것을 환영하므로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약점인 무지와 몽매를 아주 노련하게 이용한다. 따라서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곧바로 혁명 세력에 편입시키지 못한다면 그들은 용병처럼 식민지 군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게 된다.
(147) [유화정책, 문화정책] 단지 굶주렸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자신의 사회가 자기 눈앞에서 해체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아니면 이주민에게서 짐승 같은 대우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무기를 들었던 원주민은 그 유화 조치에 매우 우호적으로 반응한다.
(148) 전쟁은 한 차례의 전투가 아니라 수많은 국지적 교전의 총체다. 정확히 말하면, 결정적인 전투란 없다.
(152) 이주민은 단순히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니다. 식민주의자들 중에는 일부 원주민보다도 민족투쟁을 더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혈통이나 인종적 편견의 장벽은 양측에서 무너진다. 마찬가지로, 흑인이나 무슬림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순수한 혈통이라는 생각도 사라진다.
3. 민족의식의 함정
(157) 민족의식은 모든 사람의 내적인 희망을 아우르는 결정체가 아니며, 대중 동원의 즉각적이고 명백한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속이 빈 껍데기일 뿐이고 원작의 치졸한 모작에 불과하다.
(158) 식민지 체제가 붕괴한 뒤 권력을 이양받은 민족 부르주아지는 저개발 상태의 부르주아지다. 따라서 그들은 경제력도 없으며, 자신들이 대신하고자 하는 모국 부르주아지와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도 민족 부르주아지는 자기도취에 빠져 모국 부르주아지가 하던 역할을 자신들이 더 잘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을 말 그대로 궁지에 몰아넣는 독립은 결국 민족 부르주아지의 내부에 파멸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로 인해 그들은 예전의 모국에게 필사적으로 도움을 호소하게 된다. 신생국 지식인층 대다수를 차지하는 대학 출신자와 상인계층은 수적으로 소수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기업, 농업, 자유 전문직 등에 종사하므로 자본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 이 민족 부르주아지에서는 거물 금융가나 실업가를 찾아 볼 수 없다. 저개발국의 민족 부르주아지는 생산, 발명, 건설, 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오로지 중개업의 분야에서만 활동한다. 그들은 사업을 경영하면서 늘 부정부패에 얽혀든다. 그들은 산업의 책임자라기보다는 경영자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주민들과 탐욕과 식민지 시절에 시행된 각종 금지조치로 인해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166) (신생 독립국에서 주로 연방제를 택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식민지 지배는 일부 지역을 특권적 위치에 올려놓았다. 식민지 경제는 나라 전체의 경제에 통합되지 않고, 여전히 모국 경제를 보완하는 편제를 취하고 있다. 식민주의는 나라 전체를 종합적으로 개발하지 않고, 천연자원을 캐내거나 모국의 공업적 필요에 부응하는 수출품에만 주력한다. 그 결과 식민지의 특정한 지역만 상대적으로 부유해지고 나머지 지역은 저개발과 빈곤에 시달리게 된다.
(168) 세네갈에서는 [새 아프리카]라는 신문이 매주 이슬람교와 아랍인에 대한 증오심을 유포하는 역할을 한다. 서부 해안지대의 소규모 상업망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는 레바논인들은 국가적 비난의 대상이다. 선교사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유럽 식민주의가 도래하기 오래전에 위대한 아프리카 제국들이 아랍의 침략으로 인해 멸망했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알려 준다.
(169) 아프리카는 흑과 백으로 나뉘며, 바뀐 지명들--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사하라 이북 아프리카--도 잠재된 인종주의를 다 은폐하지는 못한다. 흔히 화이트 아프리카는 1천 년 문화의 전통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곳은 지중해권이고, 유럽의 연속이며, 그리스-라틴 문명이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블랙 아프리카는 우둔하고, 잔인하고, 비문명적인 지역, 한마디로 야만적인 곳으로 간주된다.
(170)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에서는 흑인들은 어리석은 가부장제를 가지고 있다거나 논리와 과학에 둔하다는, 서구 문화에서 파생된 혐오스런 견해가 여전히 적나라하게 존재한다. 심지어 일부 흑인들은 일종의 반[half] 노예제에 묶여 있으므로 블랙 아프리카의 나라들이 화이트 아프리카의 나라들에 대해 일종의 신중한 태도, 바꿔 말하면 불신을 품는 게 당연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블랙 아프리카의 주민은 화이트 아프리카의 대도시 거리를 지날 때 아이들이 자신을 '네그로'(nègro: 검둥이)라고 부르는 것을 자주 들으며, 공무원들이 자신에게 흑인 특유의 부정확한 말투로 말을 거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171) 서구 부르주아지는 근본적으로 인종주의적이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수사를 통해 그 인종주의를 은폐한다.
(173) 민족 부르주아지는 점점 더 자기 나라 오지의 사정과 저개발국의 참된 현실에 등을 돌리면서, 예전의 모국과 외국인 자본가들을 지향한다. 그들은 이윤을 민중과 공유하지 않으며, 외국 대기업들이 지불한 돈을 민중에게 조금도 분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체제를 안정시키는 역할과 더불어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영속화시키는 역할을 해줄 만한 민중 지도자가 필요해진다. 저개발국에서 부르주아 독재를 가능케 하는 힘은 그런 지도자가 있다는 데서 나온다. 주지하다시피 선진국의 부르주아 독재는 부즈주아지가 지닌 경제력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저개발국에서는 그런 지도자가 도덕적 권력을 대변한다. 신생국의 야위고 빈곤에 찌든 부르주아지는 그 지도자의 보호를 받으면서 부유해지는 것이다.
(174)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의 모든 부를 병합하는 그 부르주아 신분은 뜻밖에도 다른 흑인들과 아랍인들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데, 이는 예전에 식민지 권력이 보였던 인종주의적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민중의 빈곤, 부르주아 신분의 돈에 대한 무절제한 탐욕, 다른 계층을 멸시하는 그들의 태도는 점차 생각과 행동으로 굳어진다.
(181) 저개발국의 민족 부르주아지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나라의 총체적이고 조화로운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말 그대로 그들이 아무런 쓸모도 없기 때문이다.
(184) 민족 부르주아지는 중개업의 분야에서 활동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힘의 근간은 무역과 소기업 경영에 적성을 보이고 수수료를 챙기는 데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장사의 재주다. 그들은 투자를 즐기지도 않거니와, 한다 해도 진정한 부르주아지의 탄생과 성장에 필요한 자본 축적을 할 수는 없다.
(186) 대중의 정치 훈련은 대중을 어린이처럼 취급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어른으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197) 이주민은 늘 원주민이 굼뜨다고 투덜댄다. 현재 일부 독립국에서는 지배계급이 바로 그런 불평을 늘어놓고 있다. 사실 이주민은 원주민에게 열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고상한 요소를 분리해 내는 일종의 신비화 과정을 통해 이주민은 노예에게, 그가 일하는 땅이 마치 그의 것인 양, 그의 건강을 해친 광산이 마치 그의 재산인 양 여겨지게 하고자 했다. 이주민은 묘하게도 노예의 그 고통을 통해 자신이 점점 부자가 된다는 사실은 잊고 있었다.
4. 민족문화에 관하여
(212) 식민주의의 중추를 부러뜨리기로 결심한 우리의 역사적 사명은 모든 반란, 모든 필사의 행동, 피의 강을 흐르는 모든 실패한 시도에 찬동하는 데 있다.
(214) 아마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이겠지만, 원주민 지식인들은 오늘날 야만의 역사 앞에서 넋을 놓고 서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에 과거를 더 깊이 파들어가고자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가 창피하기는커녕 고상하고 화려하고 장엄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크게 기뻐했다. 과거의 민족문화에 대한 요구는 단지 민족을 다시 살려내고 미래의 민족문화에 대한 희망을 정당화하는 역할만을 하는 게 아니다. 심리-정서적 안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원주민에게 중대한 변화를 일으킨다.
(215) 식민지 시대의 큰 특징인 문화적 소외를 위해 기울인 노력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어느 것도 우연이 아니며, 식민지 지배가 추구했던 총체적인 결과는 식민주의가 원주민 사회의 어둠을 밝혀 주기 위해 온 것이라고 원주민들을 실제로 납득시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식민주의는 원주민의 머리 속에, 만약 이주민이 떠난다면 원주민은 즉각 야만과 타락의 짐승 같은 생활로 되돌아가리라는 생각을 심어 주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216) 식민주의는 굳이 엄밀한 구분을 내리려 하지 않으면서도, 무조건 흑인은 야만인이라고 주장한다. 식민주의자에게 흑인은 앙골라인도 나이지리아인도 아니고 그저 '흑인'일 따름이다. 식민주의에게 이 방대한 대륙은 야만인들이 사는 곳, 미신과 광신이 가득한 곳, 경멸해 마땅한 곳, 신의 저주를 받은 곳, 식인 풍습을 가진 곳, 요컨대 흑인의 땅이다. 식민주의의 경멸은 전 대륙을 포괄한다. 식민지 이전의 역사에는 인간성의 어두운 면이 지배적이었다는 식민주의의 주장은 아프리카 대륙 전역을 대상으로 한다.
(217) 오늘날 아랍의 작가들이 자기 민족에게 아랍 역사의 위대한 부분들을 열심히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은 지배세력이 유포한 거짓에 대한 대응이다.
(222) [보편적인 입장] 그 이유는 원주민 지식인이 서구 문화를 탐식했기 때문이다. 마치 입양아가 자신의 심리 안에 안전을 보장해 주는 최소한의 토대가 자리잡고 난 뒤에야 비로소 새 가정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듯이, 원주민 지식인은 유럽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236) 식민지 나라에서 식민주의는 원주민들을 전장에 데려다가 부려먹은 다음에 독립운동을 진압하는 병력으로도 활용한다.
민족문화와 자유를 위한 투쟁의 상호적인 기반
(242) 민족문화는 무의식적인 습관이 되어 일부 복식 전통과 몇 가지 관습으로만 명맥을 이어 갈 따름이다. 그런 잔존 문화에서는 활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거기에는 현실적인 창조성도 없고 흘러넘치는 생명력도 없다. 민중의 빈곤, 민족의 억압, 문화의 억제는 모두 같은 것이다. 한 세기 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고 나면 문화는 굳어 저리거나 찌꺼기만 화석처럼 남는다.
5. 식민지 전쟁과 정신질환
(253) 식민주의는 타인에 대한 체계적인 부정이며 타인의 인간적 속성 전부를 부인하려는 광포한 결단이기 때문에, 피지배 민중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실제로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자답하도록 강요한다.
(254) 독일 점령기의 프랑스 국민은 인간이었고 프랑스 점령기의 독일 국민도 인간이었다. 그러나 알제리의 지배는 단순한 지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오로지 모든 땅만 점령하겠다는 결정이다. 따라서 알제리 사람, 베일로 가린 여자, 야자수, 낙타 등은 풍경, 즉 프랑스인들을 위한 자연 환경이 된다.
식민지에서 적대적이고 고집스러우며, 근본적으로 반역적인 자연은 숲, 모기, 원주민, 열병으로 표현된다. 식민화는 이 까다로운 모든 자연이 마침내 성공적으로 길들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숲을 가로지르는 철도, 늪지의 배수 작업, 정치적*경제적 실체가 없는 원주민은 실상 모두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74) 초등학교에 다니는 열세 살과 열네 살인 두 명의 알제리 소년이 유럽인 급우 한 명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
- 어느 날 우리는 그를 죽이기로 했어요. 유럽인들이 아랍인들을 모조리 죽이려 하니까요.
(295) 근육의 수축은 사실 원주민의 침묵하는 자세에 수반되는 부수물일 따름이다. 즉 원주민의 완고함과 식민지 당국에 대한 거부감이 근육적인 형태로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
민족해방전쟁에서 비롯된 북아프리카인의 범죄 충동
(303) 알제 학파
- 알제리인에게는 내적인 삶이 없다. 북아프리카인에게 내적인 삶이란 없다. 그 반대로 북아프리카인은 주변 사람들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걱정을 없앤다. 그는 분석을 하지 않는다.
(304) 원주민의 특성
- 정서적 능력의 완전한, 혹은 거의 완전한 결여
- 극단적인 것을 쉽게 믿는 경솔함
- 끈질긴 고집
- 정서적 유아성, 그러나 서구 어린이 같은 호기심이 없음
- 우연과 암시적 반응에 끌리는 경향
(A. 포로 [의학-심리학 연보)
(305) 포로 교수는 북아프리카 원주민의 삶이 간뇌(두뇌의 가장 원시적인 부분)의 자극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았다.
- 원시성은 성숙성이 결여되었다거나, 지적인 심리의 발달 과정에서 뚜렷한 중단이 일어났음을 뜻하지 않는다. 다만 사회적 조건이 진화의 끝에 도달했을 따름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우리와 다른 삶에 수용된다.
(306) 이 원시성은 개별적인 교육의 결과인 생활방식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우리는 그 토대가 체계적인 구조의 특수한 성질, 혹은 적어도 신경 센터들의 역동적인 위계에 있다고 본다. 우리 앞에는 일관적으로 행동하는 신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잇는 일관적인 삶이 있다. 알제리인은 피질이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알제리인은 마치 열등한 척추동물처럼 간뇌의 지배를 받는다. 설사 피질이 존재한다 해도 그 기능은 아주 미약하며, 존재의 역학 속에 거의 연관되지 못한다.
- 아프리카인은 전두엽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정신의학의 모든 특수성은 전두엽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귀착될 수 있다.
(307) 정상적인 아프리카인은 '전두엽 절제 수술을 받은 유럽인'과 같다는 것
- [캐러더스]
이상의 내용은 유럽인의 범주와는 무관한 사실들이다. 그 사실들은 아프리카 동부, 서부, 남부의 여러 지역에서 수집되었고, 대체로 학자들은 서로의 연구에 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들 연구의 본질적인 유사성은 대단히 놀라운 결과다.
[이런 주장을 현실이라고 굳게 믿고 했다는 사실은 인간이 도대체 현실을 볼 수 있는 힘이 있는가에 질문을 던지게 하고, 현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도 묻게 한다.]
(309) 엄연히 존재하는 인류에게 가해지는 모역에 대해서는 언제 어디서든 명확하게 폭로하고, 탈신비화하고, 그것에 반격을 가해야 한다는 점이다.
(313) 알제리인의 범죄성, 충동성, 살인의 폭력성은 신경체계가 잘못 조직된 결과도, 독특한 성격 때문도 아니라 식민지 상황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결론
(317) 수백 년 동안 유럽은 이른바 정신적 체험이라는 명목으로 인간성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320) 그들은 인간의 마음에 가장 끔찍한 범죄, 인간의 기능을 훼손하고 통일성을 파괴한 병리학적 범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또한 차별, 계층화, 계급에 의해 촉발되는 유혈의 긴장이라는 범죄를 공동체의 차원에서 저질렀으며, 마지막으로, 인류의 거대한 범위에서는 인종적 증오, 노예제, 착취, 무엇보다도 150억의 인명을 살상한 잔인한 대학살을 저지렀다.
2002년판 후기 모하메드 아르비(Mohammed Harbi)
(323) '파농이즘'(fanonisme)이 설득력을 갖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제3세계의 '반(반대 anti)엘리트주의적인 엘리트'의 열망에 부응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붕괴된 마르크스주의가 그 시대에 확산시키고 있던 것과는 다른 사회발전론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파농은 행동으로, 또한 외부와 내부의 적들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제3세계를 옹호했다.
(327) 지배자와 집행자에 속한 집단을 편드는 모든 시도, 그리고 민중을 본질적으로 무능하고 순종해야 할 집단으로 정의하며 그들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하는 관료주의를 옹호하는 모든 시도를 비판하고 경계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는 영원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경고가 담겨 있다. 착취자는 바뀔 수 있지만 피착취자는 언제나 민중일 뿐이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