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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Frantz Fanon) -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1961] (1) 남경태 옮김. 서울: 그린비, 2016 (초2004)

by 길철현 2019. 1. 11.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남경태 옮김. 서울: 그린비, 2016 (초2004)

Les damnés de la terre



[인용]


2002년판 서문 - 알리스 셰르키(Alice Cherki)

9) 원주민의 원시사회적 성격 - 알제 학파의 정신의학론

10) 파농은 어떤 희생으로도 개인을 소외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어떤 권리도 없고 불평등과 살인이 원칙적으로 합법화된 나라, 원주민이 자기 나라에서 영원히 소외자가 된 채 완전한 자아상실의 상태에서 살아가는 나라에서 그들을 원래의 위치로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썼다.

(1956년, 알제리 주제 프랑스 총독 로베르 라코스트에게 보낸 편지)

12) 인종차별은 우연한 현상이나 심리적 변덕이 아니라 식민지에 만연된 억압체제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배문화에 의한 억압, 즉 공동체와 정치와 문화만이 아니라 심리상태에도 타격을 주는 억압의 결과를 명백히 밝히지 않는다면 인종차별과의 투쟁은 헛된 싸움이었다.

13) 파농이 담론의 성격과 수준--정치*문화*심리적 분석--에서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비판, 그리고 정신적 소와를 다룬 정신과의사로서 겪은 경험을 다룬 사례드이 정치의 장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비판이 있었고, 그런 비판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또한 그의 문체가 감상적이고 예언적이란 비판도 있었다.

18) 소외와 역학관게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이나, 주체의 실존주의적 혹은 교양주의적 해석(정신분석학적 차원에서는 주변세계와 단절된 주관적 사건이란 해석)이 어느 쪽의 손도 들어 주지 않던 시대에, 파농은 정치의 미래를 건설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주관적 경험으로 몸과 언어와 이타성을 거론하면서 새로운 지식의 장을 정리하는 예언자적 모습을 보였다. 이런 방법은 마르쿠제 학파의 방법론과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정치적 성향 때문에 2차대전의 와중에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망명한 빈의 정신분석학자들의 입장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61년판 서문 - 장 폴 사르트르

23) 수백 년 동안 유럽은 이른바 정신적 체험이라는 명목으로 인간성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26) 식민지 이주민은 오직 한 가지, 야만적 폭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그럴 능력이 있을 경우--원주민은 예속과 주권 중에서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29) 식민지에서의 폭력은 노예화된 사람들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을 비인간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원주민의 전통을 말살하고, 그들의 언어를 우리의 언어로 대체하고, 우리의 문화를 그들에게 주지 않으면서 그들의 문화를 파괴하기 위해 온갖 조치가 행해졌다.

32) 그들[원주민들]은 게으르지만 그것은 바로 태업의 한 형태다. 그들은 교활하고 도둑질을 한다. 상상해 보라! 그들의 좀도독질은 아직 체계화되지 않은 저항의 단초를 나타낸다.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들 중에는 총포 앞에 맨손으로 몸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유럽인들을 살해하고 총살당함으로써 스스로 인간이 되는 사람도 있다. 도적이든 순교자이든 그들의 고뇌는 겁에 질린 대중을 일깨운다.

33) 궁지에 몰린 그들에게 광적인 살인의 충동이 왜 집단무의식의 표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부족들끼리 싸우는 이유는 그들의 진정한 적을 대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식민 정책을 잘 이용하면 그들이 계속 다투도록 할 수 있다.

[전쟁은 어느 사회에든 만연해 있었던 것 아닌가?]

(35) 알제리와 앙골라에서 유럽인들은 눈에 띄기만 하면 살해된다. 지금은 부메랑의 시기, 즉 폭력의 제3단계다.

36) 파농은 [그렇게] 분출되는 폭력을 분노의 표출로 보지도 않고, 야만적인 본능의 부활로 보지도 않으며, 심지어 원한의 결과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재창조하는 과정이다. . . . 부드러움으로 폭력의 흔적을 지워 버릴 수는 없다. 오직 폭력 자체만이 폭력을 부술 수 있는 것이다.

39) 우리가 인간성이 죽음과 절망 가까이에 있다고 여긴다면, 그는 그것이 고통과 죽음 너머에 있다고 여긴다.

40) 인간주의(humanism) - 그것은 위선의 이데올로기일 뿐이고 약탈에 대한 완벽한 정당화다. 그 미사여구, 그 허구적 감수성은 우리의 침략에 대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 당신이 아무리 비폭력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 해도 체제 전체가 천 년 동안이나 억압을 당해 왔다면, 당신의 수동성은 당신을 억압자의 편에 서도록 할 뿐이다.

- 우리의 관점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곧 식민주의의 공범자로 산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식민지적 착취의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41) 우리에게는 인종주의적 인간주의보다 더 일관적인 게 없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노예와 괴물을 창조함으로써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딘가에 원주민들은 존재했으나 지금까지 그런 사기극은 폭로되지 않았다. 인류라는 개념에서 우리는 보편성이라는 추상적 전제를 얻어내는데, 이것은 대단히 현실적인 실천을 은폐하는 데 기여한다.

[이 부분의 의미 다소 불분명. 불어와 영어판을 참조한다면?]

- 자세히 보면 피가 묻지 않은 게 하나도 없음을 알 것이다.

43)"이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죽입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알제리 사람의 대뇌 피질은 덜 발달해 있어요." 또 어떤 사람들은 중앙아프리카를 모델로 삼아 "아프리카인은 전두염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45) 동포들이여, 우리의 이름으로 온갖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것에 관해 한 마디도 다른 사람에게 내뱉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1. 폭력에 관하여

49) 탈식민화는 언제나 폭력적인 현상일 수밖에 없다.

- 탈식민화란 쉽게 말해서 어떤 '종'의 인간을 다른 '종'의 인간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50) 탈식민화는, 식민지적 상황에서 배태되고 배양되었기에 그 본성상 서로 대립적일 수밖에 없는 두 세력의 만남이다. 두 세력의 첫 만남은 폭력적이었다. 그리고 양자의 병존--즉 이주민에 의한 원주민의 착취--은 총검과 대포의 힘을 바탕으로 가능했다.

- 꼴찌가 첫째가 되고 [마태복음] 20장 16절

55) 식민지 세계는 마니교(선과 악의 이분법을 근본으로 하는 종교--옮긴이)의 세계다. 이주민은 원주민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즉 군대와 경찰력의 도움으로 제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마치 식민지적 착취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이주민은 원주민을 악의 본질로 생각한다.

- 원주민은 윤리 의식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즉 원주민의 가치관은 단지 부재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부정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원주민은 가치관의 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절대 악이다. 원주민은 유독한 요소로서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 유독한 요소는 아름다움이나 도덕과 관련된 모든 것을 변형시킨다. 원주민은 사악한 무의식이며, 맹목적인 힘의 도구다.

59) 세네갈  상고르(Sanghor)

65) 식민화된 인간은 자신의 골수에 깊이 감추어진 이 공격성을 자신의 동포에게 터뜨린다. 이럴 때 흑인들끼리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경찰과 행정관은 북아프리카에서 엄청난 범죄의 파도가 몰아칠 때 어찌할 바를 모른다.

69) 심리는 위축되어 심리 자체가 사라져 버리거나 자신의 신체적 힘을 과시하는 양상으로 배출구를 찾는다.

- 원주민의 오락은 바로 근육의 힘을 탕진하는 형태를 취하며, 그것을 통해 날카로운 공격성과 어찌할 수 없는 폭력성을 배출하고 변형시키고 쏟아내는 것이다.

72) 민족주의 정당은 체제의 근본적인 타도에 그 목적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장투쟁의 필요성은 결코 강조하지 않는다. 평화를 주장하고 법률을 존중하는 그들은 사실상 새로운 질서를 지지하지만, 식민주의 부르주아에게 "우리에게 권력을 달라"는 정도로 요구하는 게 고작이다.

- 원주민 지식인은 자신의 공격성을 식민지 세계에 동화되고자 하는 은근한 욕망으로 은폐한다.

73) 식민지 나라에서 유일하게 혁명적인 세력은 농민이다. 그들은 잃을 게 없고 얻을 건 전부이기 때문이다.

74) 타협은 식민지 체제와 젊은 민족 부르주아지(bourgeoisies nationale) 모두가 가담한 일이다.

76) 로빈슨 크루소가 칼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프라이데이가 어느 맑은 날 아침 탄알이 장전된 권총을 손에 들고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가정할 수 있다. 여기서 '폭력'의 관계 전체가 역전된다. 프라이데이는 명령을 내리고 크루소는 일할 수밖에 없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반뒤링론] 제2부 제3장 '폭력의 이론'

(If Crusoe could porcure a sword for himself, we are equally entitled to assume that one fine morning Friday might appear with a loaded revolver in his han, and then the whole "force" relationship is inverted. Friday commands, and it is Crusoe who has to drudge. 205)

82)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 민중이 거둔 위대한 승리는 엄밀히 말해서 베트남만의 승리가 아니다. 1954년 7월 이후 식민지 민족이 스스로 자문해 온 문제는 이것이었다. "디엔비엔푸처럼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식민지의 사람들은 누구나 디엔비엔푸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90)1945년 세티프에서 4만 5천 명이 죽은 사건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넘어갔다. 1947년 마디가스카르에서 9만 명이 죽은 사건은 신문에 단 몇 줄의 기사로만 실렸을 뿐이었다. 1952년 케냐 진압에서 20만 명이 희생된 일은 거의 무관심 속에 파묻혔다.

91) 우리는 억압자의 군사 장비와 비교하면 원주민의 폭력이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그러나 우리는 그 폭력을 국제적 상황의 역학 속에 위치시키면 억압자에게 무서운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94) 중립주의는 냉전이 만들어 낸 것으로, 저 개발국은 중립을 잘 이용하여 양대 진영 모두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101) 인간의 평등에 관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말하지만, 콜 드 사카모디에서 일곱 명의 프랑스인이 죽거나 부상한 사건은 모든 문명인들의 양심에 분노를 일으키는 반면, 게르구르와 제라의 촌락들이 약탈을 당하고 주민 전부가 학살된 사건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단지 사카모디 보복 사건이라고만 알려질 따름이다). 테러는 대항 테러를 부르고, 폭력은 대항 폭력을 부른다. 이러한 증오의 악순환은 알제리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108) 유럽의 풍요는 노예제에 기반하고 있기에 말 그대로 모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노예들의 피로 자라났고, 저개발 세계의 흙과 땅에서 직접적으로 나왔다. 유럽의 복지와 진보는 흑인, 아랍인, 인도인, 황인종의 땀과 죽음을 토대로 건설된 것이다.

110) [아프리카에서 자본주의 국가보다는 사회주의 국가가 더 적합함을 이야기]

116) 세계를 핵으로 무장하려는 계획은 중단되어야 하며, 저개발 지역에 대규모 투자와 기술 원조를 해야 한다. 세계의 운명은 이 문제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