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읽은 지 두어 달은 지난 듯한데, 이제서야 정리를 하고 감상문을 적는다.) 이 책은 1960년 파농이 골수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마지막으로 저술한 책으로 책이 출간된 1961년은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유럽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했거나(1959년은 아프리카 곳곳에서 독립국이 세워지던 해였다 11), 독립을 향한 투쟁을 가열차게 진행시키고 있던 시기였다. 정신과 의사였던 파농의 시각은 정신분석적인 것과 마르크스주의를 결합했다는 점에서 프랑크프루트 학파와 유사하지만, 프랑크프루트 학파보다 훨씬 더 민중지향적이다.
이 책은 식민 지배가 가져온 폐해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어떻게 투쟁해야 할지, 또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다소 정형적인 언어로--그것이 옳은 이야기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지적하고 있다(책의 뒷부분은 식민지 통치에 따른 원주민들의 정신병리적인 사례와 실제를 정리했다).
식민 통치자들이 "식민지 세계를 마니교"적으로 이분화하고, 원주민을 유럽인들보다 열등한, 심한 경우에는 거의 비인간화까지 나아가는 인종주의를 유포하고, 식민지를 문명화한다는 그릇된 관념을 이식하는 것들은 익숙하게 보아온 내용임에도 '유럽인들이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이념들의 허구성'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지 못하는 한, 아직도 그 이념의 연장선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또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자각하게 한다.
다소 정형화, 도식화된 면, 지나치게 마르크스주의적인 면 등은 약간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지만, 반면에 마니교적 이분법이라는 개념, 화이트 아프리카와 블랙 아프리카의 이분법, 민족 부르주아지에 대한 설명 등은 논문을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가본 적도 없고, 아는 아프리카 출신 친구나 지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프리카가 내 안에 이렇게 깊이 자리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세상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일들로 가득 찬 있는 가운데, 아프리카에 대해서 하나둘 씩 알아가고 있다. 제국주의 또한 하라리의 말처럼 부정적인 것으로만 파악할 수 없는, 너무나 큰 흐름이다.
[인용]
55) 식민지 세계는 마니교(선과 악의 이분법을 근본으로 하는 종교--옮긴이)의 세계다. 이주민은 원주민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즉 군대와 경찰력의 도움으로 제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마치 식민지적 착취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이주민은 원주민을 악의 본질로 생각한다.
- 원주민은 윤리 의식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즉 원주민의 가치관은 단지 부재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부정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원주민은 가치관의 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절대 악이다. 원주민은 유독한 요소로서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 유독한 요소는 아름다움이나 도덕과 관련된 모든 것을 변형시킨다. 원주민은 사악한 무의식이며, 맹목적인 힘의 도구다.
101) 인간의 평등에 관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말하지만, 콜 드 사카모디에서 일곱 명의 프랑스인이 죽거나 부상한 사건은 모든 문명인들의 양심에 분노를 일으키는 반면, 게르구르와 제라의 촌락들이 약탈을 당하고 주민 전부가 학살된 사건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단지 사카모디 보복 사건이라고만 알려질 따름이다). 테러는 대항 테러를 부르고, 폭력은 대항 폭력을 부른다. 이러한 증오의 악순환은 알제리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108) 유럽의 풍요는 노예제에 기반하고 있기에 말 그대로 모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노예들의 피로 자라났고, 저개발 세계의 흙과 땅에서 직접적으로 나왔다. 유럽의 복지와 진보는 흑인, 아랍인, 인도인, 황인종의 땀과 죽음을 토대로 건설된 것이다.
144) 농민 대중은 언제나 반란에 부응하지만, 만약 반란 지도자들이 대중을 배제하고도 일을 성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룸펜 프롤레타리아는 오히려 억압자의 편에서 온몸을 던져 싸울 것이다. 억압자는 당연히 흑인들끼리 서로 싸우는 것을 환영하므로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약점인 무지와 몽매를 아주 노련하게 이용한다. 따라서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곧바로 혁명 세력에 편입시키지 못한다면 그들은 용병처럼 식민지 군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게 된다.
(152) 이주민은 단순히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니다. 식민주의자들 중에는 일부 원주민보다도 민족투쟁을 더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혈통이나 인종적 편견의 장벽은 양측에서 무너진다. 마찬가지로, 흑인이나 무슬림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순수한 혈통이라는 생각도 사라진다.
(158) 이 민족 부르주아지에서는 거물 금융가나 실업가를 찾아 볼 수 없다. 저개발국의 민족 부르주아지는 생산, 발명, 건설, 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오로지 중개업의 분야에서만 활동한다. 그들은 사업을 경영하면서 늘 부정부패에 얽혀든다. 그들은 산업의 책임자라기보다는 경영자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주민들과 탐욕과 식민지 시절에 시행된 각종 금지조치로 인해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169) 아프리카는 흑과 백으로 나뉘며, 바뀐 지명들--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사하라 이북 아프리카--도 잠재된 인종주의를 다 은폐하지는 못한다. 흔히 화이트 아프리카는 1천 년 문화의 전통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곳은 지중해권이고, 유럽의 연속이며, 그리스-라틴 문명이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블랙 아프리카는 우둔하고, 잔인하고, 비문명적인 지역, 한마디로 야만적인 곳으로 간주된다.
(171) 서구 부르주아지는 근본적으로 인종주의적이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수사를 통해 그 인종주의를 은폐한다.
(181) 저개발국의 민족 부르주아지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나라의 총체적이고 조화로운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말 그대로 그들이 아무런 쓸모도 없기 때문이다.
(184) 민족 부르주아지는 중개업의 분야에서 활동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힘의 근간은 무역과 소기업 경영에 적성을 보이고 수수료를 챙기는 데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장사의 재주다. 그들은 투자를 즐기지도 않거니와, 한다 해도 진정한 부르주아지의 탄생과 성장에 필요한 자본 축적을 할 수는 없다.
(214) 아마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이겠지만, 원주민 지식인들은 오늘날 야만의 역사 앞에서 넋을 놓고 서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에 과거를 더 깊이 파들어가고자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가 창피하기는커녕 고상하고 화려하고 장엄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크게 기뻐했다. 과거의 민족문화에 대한 요구는 단지 민족을 다시 살려내고 미래의 민족문화에 대한 희망을 정당화하는 역할만을 하는 게 아니다. 심리-정서적 안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원주민에게 중대한 변화를 일으킨다.
(215) 식민지 시대의 큰 특징인 문화적 소외를 위해 기울인 노력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어느 것도 우연이 아니며, 식민지 지배가 추구했던 총체적인 결과는 식민주의가 원주민 사회의 어둠을 밝혀 주기 위해 온 것이라고 원주민들을 실제로 납득시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식민주의는 원주민의 머리 속에, 만약 이주민이 떠난다면 원주민은 즉각 야만과 타락의 짐승 같은 생활로 되돌아가리라는 생각을 심어 주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