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안경을 잊어버리고 출근하였다
집으로 돌아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간밤 취해서 부딪혔던 골목 귀퉁이가
각을 잃고 편안히 졸고 있는 걸 보고 발길을 돌렸다
길이 뿌옇게 흐렸으므로 무단횡단도 하지 않았다
나의 약시가 담 모서리의 적의를 용서한 덕분일까
새 학기 들어 처음 흡족하게 강의를 마쳤다
미운 놈 고운 놈 제각각이던
학생들도 모두 둥글둥글 예뻐 보이고
오늘 따라 귀를 쫑긋 세우고 열중하는 것 같았다
담배를 피워물고 창밖을 내다보니
황사 며칠, 서울도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
흐릿해진 풍경 어딘가에 봄 내음이 스며
조용조용 연둣빛으로 옮겨내는 중이다
나는 세상을 너무 자세히 보려 했던 모양이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어딘가로 번져가는 중이기에
수묵 같은 흔적을 남기는 것이기에
안경 도수가 높아갈수록 모든 것은 자취를 감추고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두웠던 눈에 봄이 처음
연둣빛 투명한 안경을 씌워준 날,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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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이 두렵고 눈이 자꾸 침침해 답답했는데,
집 부근 야산으로 산책을 나갈 때
과감히 안경을 벗어 던지고
맨 눈으로 나가봤습니다.
'세상을 너무 자세히 보려' 한 것은 아닌지 반성을 하면서.
춘설이 내린 산길이 약간 미끄럽긴 했지만
그래도 넘어지거나 하지는 않았구요.
그 동안 혹사시킨 눈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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